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393화 (393/530)
  • 393화. 한 대 더

    영호준이 운현과 객옹을 안내한 곳은 취선루라는 곳이었다.

    오층 누각의 취선루는 외관부터가 화려했다.

    각 층의 지붕 처마는 하늘로 날아갈 듯 높이 솟았고, 사방에 걸린 오색 등은 취선루를 더욱 빛냈다.

    항주에서는 매우 유명한 곳인지 아직 초저녁인데도 줄까지 서 있었다.

    “가시지요.”

    마차에서 내린 영호준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서 나갔다.

    운현과 객옹은 그의 뒤를 따랐다.

    줄에 서 있던 젊은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운현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입구에 있던 부총관과 영호준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더니, 일행은 곧 취선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취선루 내부는 외관과 달리 정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일 층은 확 트인 공간에서 일반적인 식당처럼 식사나 술을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장식이나 분위기는 매우 고급스러웠고, 유난히 젊은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아니, 젊은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희는 삼 층으로 갑니다.”

    영호준이 운현과 객옹에게 말했다.

    “취선루의 일 층은 아주 무서운 곳이거든요. 저도 한때는 일 층을 주름잡았는데 지금은 솔직히 자신이 없군요.”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운현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일 층에 있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멋있고 세련되어 보였다.

    분명 일행이 아닌데도 남녀가 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저런 자리에 잘못 들어갔다가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을 상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어머, 매화검께서 오셨군요.”

    사뭇 간드러진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영호준에게 말했다.

    “항주에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혀 발길을 안 하시기에 절 잊으신 줄 알았어요.”

    여인은 살짝 눈까지 흘겼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내 어찌 자네를 잊겠나? 맡은 바 책무가 중대하여 잠시 소홀했으니 너무 원망치 말게나.”

    부드럽고 중후한 영호준의 목소리에 운현은 혀를 내둘렀다.

    잘생긴 영호준이 분위기를 잡고 말하니 그 효과가 사뭇 대단했다.

    “여전히 말씀은 잘하시네요. 백 년의 서운함이라도 순식간에 사라지겠어요.”

    장난처럼 말했지만 여인의 뺨에는 살짝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운현과 객옹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취선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연홍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저는 운현입니다.”

    운현의 말에 연홍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점잖은 분이시네요.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연홍은 일행을 안내했다.

    크고 화려한 계단을 올라가며 영호준이 연홍에게 물었다.

    “혹시 소(簫)를 잘하는 사람이 있나? 남자라도 상관없네.”

    “물론 있지요.”

    연홍이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소에는 금과 슬이 잘 어울리니 함께 준비하라 할까요?”

    “그것도 좋네. 다만 반드시 실력이 뛰어난 이들로 해야 하네. 내가 이분들께 취선루의 음률이 최고라고 장담했으니 말일세.”

    “어머, 고마워요.”

    웃음을 머금은 채 연홍은 말을 이었다.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거예요. 우리 취선루는…….”

    바로 그때였다.

    콰작, 쾅.

    “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고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사내의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연홍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소란이 난 곳은 공교롭게도 그들이 올라온 삼 층이었다.

    연홍은 계단 옆에 있던 하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남자 하인들이 서둘러 뛰어가고, 연홍은 시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심가장의 공자님께서…….”

    그 말에 연홍은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바로 심가장의 둘째 아들 심걸위였다.

    연홍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덜컹.

    하인들이 반쯤 부서진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 공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야, 이 새끼들아! 어서 안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복도까지 새어 나오는 격한 목소리에 영호준이 물었다.

    “누군가?”

    하지만 연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곧 정리가 될 테니 우선 이쪽으로…….”

    연홍이 애써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콰장창.

    “으악!”

    “컥.”

    하인들 셋이 문을 부수며 복도로 나뒹굴었다.

    건장한 하인 세 사람이 심걸위를 당해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걸위는 무공을 익힌 데다가 하인들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호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리가 안 될 것 같은데?”

    그 말과 동시에 한 청년이 씩씩거리며 복도로 나섰다.

    사뭇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가 바로 심걸위였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이 온통 붉은 것으로 보아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다.

    자기 분을 못 이긴 듯, 심걸위는 쓰러진 하인을 발로 찼다.

    퍽, 퍽.

    “이 개자식들이! 감히! 누구를 건드려!”

    “으억.”

    하인은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성질을 내고 돌아서던 심걸위가 연홍을 발견했다.

    “오호라, 거기 있었군!”

    성큼성큼 다가오던 심걸위가 멈칫했다.

    영호준을 알아본 것이다.

    심걸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지만 그 눈빛은 영호준을 향한 노골적인 불편함을 담고 있었다.

    영호준은 피식 웃었다.

    그는 심걸위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내의 까닭 모를 적개심은 이미 익숙한 바였다.

    심걸위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데 연홍이 영호준에게 말했다.

    “우선 이 아이와 함께 가시겠어요? 곧 찾아뵐게요.”

    시녀가 운현 일행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연홍은 심걸위를 향해 걸어갔다.

    사박, 사박.

    영호준은 연홍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시녀가 말했다.

    기루에서 말썽은 일상다반사다.

    일일이 참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영호준은 고개를 젓고는 시녀를 따라 발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심걸위는 눈을 부라렸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소월이 그년 데려오라고. 그런데 감히 내 말을 무시하고는, 뭐? 이러시면 곤란해?”

    연홍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심걸위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진짜 곤란하게 해 줘? 우리 심가장이 마음만 먹으면 이깟 취선루, 망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닌 거 몰라?”

    연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그저 허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가장은 본래 항주의 중소 문파였다.

    다른 문파들이 그랬듯이 예전엔 무림맹 소속이었지만 영웅맹이 들어서자 제일 먼저 협력 문파를 자처하고 나섰다.

    항주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심가장은 영웅맹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중소 문파들과 상단들을 수탈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취선루도 심가장의 보호 아닌 보호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영웅맹이 무너졌다지만 심가장의 세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심가장의 아들이 바로 이 심걸위였던 것이다.

    “심 공자님.”

    연홍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소월은 기예를 파는 아이예요. 강제로 옷을 벗기시면…….”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연홍의 고개가 돌아갔다.

    곱게 단장한 연홍의 볼이 금방 붉게 물들었다.

    심걸위가 뺨을 친 것이다.

    “이게 어디서 개소리야? 내가 데려 오라면 데려 와야 할 거 아냐!”

    화를 내며 심걸위가 소리쳤다.

    말 그대로 안하무인이었다.

    “심 공자님. 이러시면…….”

    “이년이 그래도!”

    부웅.

    심걸위가 손을 휘둘렀다.

    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아 내력까지 실은 것이 분명했다.

    연홍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그만하지?”

    나지막한 영호준의 목소리에 연홍은 눈을 떴다.

    치켜든 심걸위의 팔을 영호준이 붙잡고 있었다.

    보기엔 가볍게 팔꿈치 부분을 쥔 것 같은데 심걸위는 꼼짝도 못 했다.

    “이, 이거 뭐야! 빨리 안 놔?”

    심걸위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영호준은 피식 웃었다.

    그가 막 심걸위를 밀어 버리려 할 때였다.

    “차, 창룡맹 총군사가 이래도 되는 거야?”

    영호준의 표정이 굳었다.

    심걸위는 그 모습을 보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창룡맹이 항주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위세를 부리는 거냐고!”

    영호준의 눈가에 한기가 스쳤다.

    서늘한 그 눈빛에 심걸위가 흠칫했지만 도리어 크게 외쳤다.

    “치려고? 쳐 봐, 씨앙! 너희만 손님이야? 창룡맹 총군사면 함부로 사람 쳐도 돼?”

    남들 들으란 듯 그는 일부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전략은 유효해서 오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영호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생각보다 더 영악하고 야비한 자였다.

    이래서는 오히려 영호준이 상대를 핍박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중에 이자를 건드리기도 힘들어진다.

    사적인 감정으로 문파를 겁박한 것이 될 테니 말이다.

    심걸위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욱 크게 외쳤다.

    “그래, 좋다 이거야! 어디 쳐 보라고! 창룡맹 총군사가 기루에서 사람이나 치고! 이러면 너희가 영웅맹하고 다를 게 뭐야? 엉? 뭐냐고!”

    “다른 건 이것입니다.”

    문득 들린 그 목소리는 영호준의 것이 아니었다.

    심걸위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날아오는 손바닥뿐이었다.

    빠악.

    충격과 함께 격통이 심걸위의 얼굴을 덮쳤다.

    무인도 얼굴은 단련하기 힘들다.

    매화검 영호준처럼 내력을 두를 정도가 되면 또 모르지만, 심걸위는 그런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내력은 싣지 않았어도 성인 남성이 제대로 휘두른 일격이다.

    코뼈의 연골 부위가 단박에 주저앉으며 피가 터졌다.

    “끄악!”

    심걸위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젖혔다.

    때마침 영호준이 손을 놓은 탓에, 심걸위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다.

    콰당.

    심걸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으아악! 아아아악!”

    요란한 그의 비명 소리는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었다.

    영호준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일격은 분명 운현이 날린 것이었다.

    “영웅맹과 다를 것이 무어냐고 했습니까?”

    저벅.

    심걸위를 향해 걸어가며 운현이 말했다.

    “창룡맹은 절대 불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태평맹이 조롱했어도 상관하지 않았고, 영웅맹이 위협했어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태평맹의 당설련은 일인맹이라며 비웃었다.

    영웅맹의 염중부는 전대 거마들을 보내 임시 총단을 짓밟으려 했다.

    하지만 창룡맹은 단 한 번도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히 당신 따위가 세간의 눈을 등에 업고 창룡맹의 총군사를 조롱한단 말입니까?”

    운현은 서늘한 눈으로 심걸위를 내려다보았다.

    “으, 으으.”

    심걸위는 한 손으로 코를 가린 채 주춤주춤 물러났다.

    분명히 연약해 보이는 문사건만, 지금 운현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는 심걸위가 감당할 만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서늘한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아니,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말하는 운현의 눈빛은 마치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것은 분명 영호준 때문만은 아니었다.

    슥.

    운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심걸위의 눈이 공포로 물들 때였다.

    “잠시만요, 맹주님.”

    문득 영호준이 말했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이런 일로 맹주님께서 직접 손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위신 같은 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창룡맹과 심가장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맹주 운현이 심걸위를 직접 쳤다고 하면 확실히 위신 문제이긴 했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영호준이 말했다.

    “이런 일도 알아서 처리 못 하면 제 능력 문제가 되니까요. 그러니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시지요.”

    운현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영호준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곤 심걸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번에 서늘해지는 영호준의 눈빛에 심걸위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헉! 사, 살…….”

    슥.

    영호준은 두 손을 등 뒤로하고 뒷짐을 졌다.

    그리고 한 발로 심걸위를 툭 찼다.

    마치 길가는 돌멩이라도 치우듯 가볍게.

    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퍼억.

    “크헉!”

    심걸위는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부웅, 콰당탕.

    그는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이 나왔던 방문을 부수고 처박혔다.

    “꺅!”

    방 안에 있던 기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기녀를 바라보았다.

    심걸위와 함께 있었던 기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자락은 찢어져 있었다.

    붉게 물든 뺨에는 맞은 자국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총군사님.”

    “네, 맹주님.”

    기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한 대 더 치십시오.”

    “기꺼이 그리하지요.”

    환하게 웃으며 영호준이 답했다.

    그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했다.

    연홍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객옹은 덤덤한 눈빛으로 아래층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다행히도 아래층에서 갑작스러운 잠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