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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92화 (392/530)
  • 392화. 난항(難航)

    항주, 창룡맹 총단 터.

    창룡맹 총단이 들어설 자리에는 이미 건축이 한창이었다.

    불타 버린 영웅맹의 잔해는 흔적도 없이 치워졌고, 빈 터에는 석재와 목재가 여기저기 가득 쌓여 있었다.

    바쁘게 오가는 목장과 목공 들도 매우 많은 데다, 어떤 건물은 벌써 뼈대가 올라가고 있는 곳도 있었다.

    “생각보다 아주 빠르군요.”

    운현이 총단 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과 돈을 아낌없이 퍼부으면 이렇게 됩니다. 아, 그렇다고 영웅맹처럼 부실하게 짓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항주 인근에서 이름난 대목장들은 전부 다 불렀으니까요.”

    대목장(大木匠)은 건축을 총괄하는 장인이다.

    주로 사원이나 가옥 같은 큰 건축물을 짓는 자들을 대목장이라 불렀는데 건축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니, 그들이 있는 한 잘못될 걱정은 없었다.

    게다가 총단에 들어설 건물이 한두 채가 아니어서, 고용된 대목장들도 제법 많았다.

    “예전 영웅맹 총단을 얼마나 엉터리로 지었던지, 대목장들 말로는 불에 탄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더군요.”

    “그 정도입니까? 영웅맹 총단이 어떠했길래…….”

    “처참했답니다.”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초에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단기간에 세운 건물들이니 무엇인들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결국 일하는 사람들도 겉모습이나 신경 쓰게 마련이지요. 실력 있는 대목장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겉만 보고 감탄하지만, 아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전 영웅맹 총단 건물은 지나는 대목장마다 혀를 찰 정도로 부실했다.

    “일이 똑바로 되려면 사람부터 제대로 대접해야 하는 법인데, 무조건 아까워만 하니 될 리가 없지요. 아마도 그게 염중부의 한계겠지만요.”

    그건 사뭇 놀라운 말이었다.

    운현이 돌아보자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정확히 계산해서 주고 있습니다. 제대로 돈을 주는 것만큼 확실한 대접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무에 관한 한 대목장들의 의견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요.”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현실적인 내용으로 넘어가는 걸 보니 평소의 영호준이다.

    “물론 이것도 다 맹주님 덕분입니다. 유능하신 우리 맹주님께서 조정과 거대 문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가져와 주신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누가 말했듯이 세상은 예산이 지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영호준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항주에 어울리는 풍류 미남자의 모습이었다.

    말하는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웃던 영호준이 문득 주위를 살폈다.

    “헌데 검노사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객옹은 운현 옆에 있었지만 검성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영호준에게 운현이 답했다.

    “조금 전에 떠나셨습니다.”

    “떠나셨다고요?”

    영호준은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본래 그런 분이시니까요. 이번엔 어디로 가신다던가요?”

    “서쪽으로 가셨습니다. 서장이 요즘 시끄럽다고 하시더군요.”

    “서장이라, 그러고 보니 새로운 활불이 서장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던데……. 뭐, 이번에도 오래 걸리시겠네요.”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총군사님과 잠시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저야 언제든 괜찮지요.”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마침 좀 쉬려던 참이었습니다. 좋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시지요. 가실까요, 어르신?”

    객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운현과 객옹이 그 뒤를 따랐다.

    ***

    영호준이 말한 ‘좋은 곳’은 항주 시내의 작은 찻집이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장식들과 부드러운 차향이 가득한 곳이었다.

    “정말로 좋은 곳이군요.”

    운현이 감탄하며 말했다.

    일행이 안내된 곳은 후원에 따로 마련된 고즈넉한 자리였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데다 거리가 보이지 않아서 시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차도 아주 괜찮습니다. 이곳 주인이 찻잎을 직접 고르는데, 안목이 아주 뛰어나거든요.”

    그렇게 말한 영호준은 하녀에게 차를 주문했다.

    잠시 후, 차가 나오고 따뜻한 향이 주위에 번져 갔다.

    세 사람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차를 맛본 운현은 살짝 놀랐다.

    “괜찮지요?”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 아주 좋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종류의 찻잎인데 이렇게까지 맛이 다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객옹도 만족스러운 듯 말없이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실은 검성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달칵.

    운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성과 나누었던 대화를 영호준에게 전해 주었다.

    영호준은 굳은 표정으로 운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운현의 이야기가 전부 끝나도록 영호준은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일은입니까?”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따뜻한 차향이 오르고, 영호준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거 또 대단하신 분의 명호가 나오는군요.”

    홀짝.

    차를 마신 영호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일은이 누구인지는 무림맹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자그마치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니까요.”

    운현은 눈을 빛냈다.

    무림맹이라면 분명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물론 무림맹은 화산지약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승과 검성에 비견 되는 고수는, 그 존재만으로도 무림맹 체제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거든요.”

    신승 한 사람조차 감당하지 못하던 무림맹이었다.

    당연히 일은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무림맹은 일은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사람 중 한 명인데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지요.”

    천하의 모든 고수를 조사했으나 일은을 찾을 수는 없었다.

    헛소문이라 치부하지도 못했다.

    신승이 일은의 존재를 당연한 듯 말했던 데다가, 당문 역시 독선을 통해 일은이 실재 인물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결국 일은이 누구인지 찾는 것은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단 신승과 검성께 비견 되는 절대고수의 존재 자체가 거대 문파의 수장들에겐 껄끄러웠던 데다가…….”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기인이사가 많은 강호 무림 아닙니까? 본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대로 놔두는 편이 낫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의 결과였지요.”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으로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호준은 혀를 찼다.

    “그런데 놀랍군요. 그가 음률에 뛰어나고 부유해 보이는 데다 독기공을 익힌 사람이라니……. 평소에도 검은 너울을 쓰고 다니지는 않겠지요?”

    그랬다간 오히려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운현은 영호준에게 물었다.

    “찾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영호준은 찻잔을 매만졌다.

    “독기공 쪽은 이미 객옹께서 찾아보셨고, 부유하다는 것도 너무 광범위하군요. 으음, 음률이라…….”

    “이름난 연주자 분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운현의 말에 영호준이 문득 객옹을 돌아보았다.

    “혹시 그때 들으신 음률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음률은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다른 이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테지. 부드러운 음률 속에 담긴 그 기세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음률에 내력을 싣다니, 과연 고수시라서 그런 건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음공 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음률에 도도하게 흐르는 대하 같은 기세를.”

    그것을 느낀 것은 객옹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신승과 검성은 물론 염중부마저도 안색이 변했었다.

    “그렇군요.”

    영호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황실 제례악을 연주하는 분이라면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악사들은 관직을 받고 대를 이어 기예를 전수하니, 관에 소속된 악사들의 가문을 전부 뒤져 보면 될 테니까요.”

    황실 제례와 공식 행사에 연주되는 음악은 아악(雅樂)이다.

    아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은,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아도 정식 관직을 가지고 있으며 자손들에게 기예를 전수했다.

    그들의 가문을 조사한다면 일은으로 의심 가는 이들을 추려 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입니다.”

    영호준은 한숨을 쉬었다.

    “속악(俗樂)은 아무나 연주할 수 있습니다. 손재주만 조금 있으면 눈동냥만으로도 흉내가 가능하고, 체계적인 교육 기관은커녕 제대로 악사 대접조차 못 받는 실정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뒤져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아니다.”

    문득 객옹이 말했다.

    “일은의 연주는 어설프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분명 대가를 통해 제대로 전수받은 것이 분명해.”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객옹이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일은의 연주가 사뭇 깊은 감명을 준 듯했다.

    “대가라……. 하긴 이름난 악사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건 일반적이지요. 일은을 가르치신 분은 이미 세상을 뜨셨을 테지만 동문이나 제자들을 찾아볼 수는 있겠군요.”

    유명한 악사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건 대개 은퇴한 이후다.

    일은에게 음악을 가르칠 정도라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일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영호준은 한숨을 쉬었다.

    “대뜸 일은을 아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혹시 연주 잘하는 절대고수가 주변에 있냐고 추궁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명호나 이름이라든가 용모파기를 아는 것도 아니고요.”

    일은을 아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환우오천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은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나무를 숲속에 숨기듯이, 신승은 일은을 환우오천존이라는 명성 속에 숨겨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시작부터 난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음, 안 되겠군요.”

    결국 영호준이 말했다.

    “우리끼리 말해 봤자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 뿐입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전문가요?”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전문가요. 게다가 현업 종사자들이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의아해하는 운현에게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기루로 갑시다.”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악사라면 당연히 고급 기루에 있지 않겠습니까? 아, 안 가 보셔서 모르십니까?”

    “아니, 가 본 적은 있습니다만…….”

    무한의 기루에 가 본 적도 있고, 예기의 연주를 들은 적도 있다.

    확실히 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기루를 가자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상관없겠군요. 제가 항주의 기루라면 아주 환하니까요.”

    영호준은 얼굴 가득 싱글벙글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세상에 헛고생이란 없는 법이군요. 한때 방황하던 시절의 고생이 이렇게 활용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미야 부여하기 나름이라지만, 기루를 돌아다닌 것을 고생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 빨리 가시지요.”

    “잠깐만요. 지금은 아직 낮입니다.”

    아직 해가 중천이니 기루에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하지만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준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준비요?”

    “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님께는 죄송스럽습니다만, 그렇게 가시는 건 기루에 대한 예가 아닙니다. 옷도 새로 사시고 머리도 좀 다듬어야겠습니다.”

    운현은 당황스러웠다.

    기루가 무슨 명망 높은 사원도 아닌데 예를 갖춘단 말인가?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안 가시니까 못 들어 보셨겠지요. 제가 오늘 가려는 곳은 돈이 많다고 봐주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기루지요.”

    그러면 뭐가 전부인가 싶었지만 영호준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이러다 해가 지겠습니다. 어르신께서도 당연히 가시겠지요?”

    운현은 객옹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싶었지만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이 시작되겠군요. 그만 일어날까요?”

    영호준의 말에 객옹이 일어났다.

    운현도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영호준의 뒤를 따랐다.

    찻집을 나가는 영호준의 발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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