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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91화 (391/530)
  • 391화. 은자(隱者)

    운현과 검성, 객옹은 자리를 옮겼다.

    후원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더 이상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할 만한 곳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저택을 관리하는 총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뒷일을 부탁하고, 세 사람은 조용한 서재에 둘러앉았다.

    그곳에서 운현은 지난번 검성과 헤어진 이후 있었던, 주로 검과 관련되었던 일들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음.”

    운현의 이야기를 들은 검성이 눈을 빛냈다.

    “내력도, 검기도 없이 모든 것을 베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찻잔을 쥔 운현이 대답했다.

    “당시 저는 내력을 사용할 수 없던 상태였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로도 천하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다.

    “흥미롭군.”

    검성이 말했다.

    “한번 겨뤄 보고 싶을 정도로.”

    운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검성이라면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쯧.”

    옆에 있던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현이가 심마에 들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검성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선비들조차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다. 헌데 칼을 든 무인이 그 정도의 결의가 없어서 되겠느냐?”

    운현을 돌아보며 검성은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본래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는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검성의 말은 옳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마저 버려야 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방법일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버리라는 것에 있지 않다.”

    검성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심마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라면 반드시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의 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았다.

    찻잔을 든 객옹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검성이 물었다.

    “환우오천존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그건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정사대전 당시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의 고수를 사람들은 일컬어 환우오천존이라 했다.

    일성, 일승, 일왕, 일선, 그리고 일은이 바로 그들이다.

    “본래 오천존이니, 사대고수니 하며 절정고수들의 우열을 논함은 헛된 일이다. 승패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상황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지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서로 싸운 적 없는 고수들을 대상으로 이러니저러니 우열을 논하는 건 사실 무의미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 무림에 그런 말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환우오천존이다.”

    운현의 가슴이 뛰었다.

    수적인 우열이나 상황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상황 자체를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진짜 고수들.

    그들이 바로 환우오천존이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만.”

    검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철혈사왕 염중부와 독선은 삼태상을 이기지 못했다.

    검성 역시 운현과 승부를 결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보다 강한 것으로 추측되는 일대상인도 있다.

    사실상 환우오천존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허나 환우오천존 중에서도 일은(一隱)은 특별하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는 우리와 전혀 다른 경지에 다다른 자다.”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일은이 누구기에 검성이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전혀 다른 경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검성이 말을 이었다.

    “그는 우리와 다른 곳에 서서 다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경지에 대해 말할 수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우리 중에 가장 강하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검성은 단언했다.

    객옹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찻잔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놀라는 운현에게 검성이 말했다.

    “그러니 너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일은일 것이다.”

    ‘일은…….’

    잠시 생각하던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분은 누구십니까?”

    환우오천존은 일성, 일승, 일왕, 일선, 그리고 일은이다.

    일성(一聖)은 곧 검성을, 일승(一僧)은 괴승이라고도 불렸던 신승을 말한다.

    일왕(一王)은 철혈사왕이며 일선(一仙)은 약선이자 독선이었던 객옹이다.

    하지만 일은(一隱)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

    강호 무림에 환우오천존이라는 명호를 듣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도 말이다.

    “모른다.”

    검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가 강하다는 것뿐이다.”

    “그래. 그건 확실하지.”

    객옹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나 그 외에는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출신은 물론 사문도 이름도 명호도, 심지어 얼굴조차도 분명하지 않지. 얼굴을 가린 그 얄팍한 검은 너울을, 우리 중 누구도 꿰뚫어 보지 못했으니까.”

    말하는 객옹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각자 천하제일을 자부하던 그들에게 일은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화산지약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그는 강호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가 일은이라 불린 것도 환우오천존이라는 말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다. 아마도 불영 그놈이 한 짓이겠지만.”

    말하던 객옹이 검성을 쳐다보았다.

    “네게도 아무 말이 없었더냐? 그를 화산에 데려온 사람이 불영이잖나?”

    검성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단지 불영이 그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불영을 찾아왔다는 것밖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운현이 문득 말했다.

    “혹시 와불 선사님은 아니셨을까요?”

    와불은 신승 불영의 스승이다.

    내력을 잃기 전의 그가 혹 일은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검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와불 선사가 내력을 잃은 것은 화산지약 이전이다.”

    한 줌 내력조차 없는 와불이 검성이나 독선, 의심 많은 염중부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와불 선사는 소(簫)를 못하지 않느냐?”

    “네?”

    그건 또 난데없는 말이었다.

    “소라면, 퉁소[洞簫] 같은 악기 말입니까?”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은의 소는 가히 천하일절이었다. 단 한 번 들었을 뿐이지만.”

    “그리고 제법 부유해 보이더군.”

    객옹도 말을 덧붙였다.

    “그의 옷이나 차림새는 결코 세상을 등진 은자(隱者)의 것이 아니었다.”

    운현은 혼란스러웠다.

    일은에 대해 들을수록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검성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는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반드시 비무를 청했겠지만…….”

    “일은은 독기공을 익혔다.”

    “뭐라고?”

    검성이 객옹을 돌아보며 반문했다.

    그건 검성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도 놓칠 뻔했다. 그러나 독기공 특유의 기운을 분명히 느꼈다. 그조차 단 한 순간뿐이었지만.”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검성의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 너는 알겠군. 일은이 누구인지.”

    독술과 독공을 넘어 독기공의 경지에 이른 곳은 오직 당문뿐이다.

    독기공의 고수가 나온 문파도 천하에 당문밖에는 없다.

    그러니 일은이 독기공을 익혔다면 당문의 사람이라는 결론이 된다.

    하지만 객옹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모르는 독기공의 고수가 당문에 있다고? 그것도 나조차 간신히 알아차릴 정도의 경지에 이른 이가 말이냐? 차라리 나도 모르는 내 자식이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믿기 쉽겠다.”

    허탈한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혹 과거에 갈라졌던 당문의 방계가 대성을 이룬 것인가 생각 했지만 그조차 아니었다. 십 년간 천하에 흩어진 당문의 계보를 샅샅이 훑고 난 후에야 확실히 알 수 있었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객옹이 태상령패를 손에 넣은 것도 그 시기였다.

    “으음. 어쩐지 마음이 동하지 않더라니, 싸웠어도 얻을 것은 없었겠군.”

    검성의 말에 객옹이 피식 웃었다.

    “염가도 비슷한 말을 했지. 그놈의 냄새가 고약해서 상대하기 싫다고.”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하에 염중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생각할수록 일은은 신비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검성과 독선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강자인 데다가 천하일절의 음률을 뽐내는 사람이라니.

    긴 퉁소를 비스듬히 들고 음률을 연주하는 신비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혹 일대상인이라는 자가 일은은 아니었나?”

    검성의 물음에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그를 몰라볼 리가 있겠느냐? 그는 일은이 아니다.”

    객옹은 서슴없이 단언했다.

    운현은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네놈, 의외로 말이 많군.”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성에게 말했다.

    “본래 이러했더냐?”

    “가끔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검성이 말했다.

    “불영과 있을 때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귀가 따가운 건 나였지만.”

    한 번 검성이 말하면 신승 불영은 그 열 배쯤 수다를 늘어놓곤 했다.

    객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객옹이 운현에게 물었다.

    “어찌하겠느냐?”

    운현 역시 고민하고 있었다.

    영웅맹은 무너졌지만 진정한 흑막인 일대상인은 여전히 건재하다.

    심지어 그는 영웅맹이 무너진 것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단서조차 막연한 일은을 찾아 나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라.”

    객옹이 말했다.

    “세상 일이 어찌 사람의 생각대로만 되더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무익하고, 시도도 하지 않고 가능성을 논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니 너는 그저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네 뜻이 이끄는 대로 해라.”

    그 말은 무당에서 만났던 도사, 적풍 진인의 말을 떠오르게 했다.

    그 역시 ‘성인은 무위에 처한다[聖人處無爲]’며 운현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행하라 하지 않았던가?

    “알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검성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미 운현의 마음은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일은이라는 분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운현의 눈빛은 단호했다.

    검성도, 그리고 객옹도 운현의 말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은.’

    운현은 새삼 일은이라는 신비인에 대해 생각하며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지만 운현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검성이 떠나겠다고 말한 것은 며칠 후, 서재에서 차를 마시던 도중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검성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의 기행을 아는 운현은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히히힝.

    운현의 명에 따라 총관이 내어 온 준마는 대단히 강인해 보였다.

    검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십니까?”

    운현이 물었다.

    검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서쪽으로 가려 한다.”

    “왜? 천기가 그리로 가라 하더냐?”

    객옹의 말에 검성이 피식 웃었다.

    “요즘 서장이 시끄러운 듯해서.”

    “서장이라고?”

    대뜸 눈살을 찌푸리며 객옹이 반문했다.

    서장이라면 밀교로 유명한 장족(藏族)의 땅이다.

    자신들이 정통이라 주장하는 서장 밀교는 강호 무림에 큰 분란을 일으키곤 했다.

    대륙의 동쪽 끝인 이곳 항주와는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는 머나먼 곳이다.

    “서장에 피바람이 불겠군.”

    객옹이 중얼거렸지만 검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휙.

    가볍게 몸을 날린 검성이 말에 올라탔다.

    애초에 자신의 검, 한월 외에는 짐이랄 것조차 없었다.

    “또 오마.”

    검성이 말했다.

    운현은 웃으며 답했다.

    “네. 언제든지요.”

    희미한 미소가 검성의 입가에 걸렸지만 그건 곧 사라졌다.

    “하아!”

    한 줄기 외침과 함께 준마는 즉시 땅을 박찼다.

    따가닥, 따가닥.

    검성은 말과 함께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운현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검성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검성은 떠났다.

    일은을 찾으라는 과제를 운현에게 남기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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