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일검충천(一劍衝天)
운현은 검성과 마주 섰다.
지나는 바람이 후원의 나뭇잎을 흔들고, 찻잔을 든 객옹이 무심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생기 가득한 오전의 햇살은 두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운현과 검성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락.
운현이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검을 마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검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일이니까.”
조금 전, 검을 나누어 보자고 했던 이는 검성이었다.
예전 와룡헌에서 운현의 검을 보여 달라고 했던 이도 검성이었고, 첫 만남에서 기세를 내뿜어 운현을 도발한 이도 검성이었다.
“그리고 너는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지.”
검성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기지수들을 향해 쏟아진 검성의 기세 앞에서 마음의 검을 세우고 검성을 마주 본 사람은 오직 운현뿐이었다.
와룡헌에서도 운현은 스스럼없이 검을 보이겠다고 했었고, 검을 나누어 보자는 검성의 말에는 열의를 숨기지 못했다.
지금도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검의 하늘, 검성 이검학을 마주하고도 말이다.
“아직도 아는 것은 검뿐인가?”
스릉.
이검학이 자신의 검, 한월을 뽑으며 물었다.
수많은 고수들을 좌절케 만들고, 단신으로 북해를 무릎 꿇린 그의 검 한월이 차갑게 빛을 뿜었다.
“네. 그렇습니다.”
스륵.
운현 역시 자신의 검, 미명을 뽑았다.
곧게 뻗은 미명의 칼날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만 그뿐입니다.”
미명은 언제나처럼 그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검성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건 북해의 검이로군.”
운현 역시 미명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을 가만히 음미하며 운현은 답했다.
“제게는 의미가 남다른 검입니다.”
미명은 운현과 많은 순간을 같이해 왔다.
무림맹이 무너졌을 때 운현은 미명과 함께 철혈사왕 염중부를, 그리고 인태상과 지태상을 상대했다.
독고랑과 이별하며 잠시 미명을 잃었으나 그의 시신과 함께 돌아왔고, 이후 지금까지 운현을 지켜 주었다.
운현에게는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검을 건네준 그녀, 대궁주처럼 말이다.
“낙일은? 무언가 비밀이 있던가?”
검성은 운현에게 낙일검을 맡겼다.
그리고 그 검에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있었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명을 들어 올려 검성을 향했다.
“이제,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웅.
미명이 나지막이 울었다.
운현의 눈동자 역시 빛나고 있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검성의 눈빛도 변했다.
그는 천천히 한월을 들어 올렸다.
“기꺼이 보도록 하지.”
우우우웅.
한월 역시 나지막이 울음을 흘렸다.
미명과 한월이 검명을 흘리고, 운현과 검성의 시선이 허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쉭.
먼저 움직인 사람은 검성이었다.
흔히 강호 무림에서 하는 삼 초의 양보 같은 건 없었다.
검성 이검학이 원하는 것은 진심을 담은 비무이며, 운현은 이미 양보 같은 건 필요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후욱.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그의 검, 한월을 운현은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놀라운 빠르기 같은 건 없었다.
어쩌면 그저 가볍게 휘둘러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운현은 알 수 있었다.
그의 검에 담긴 무지막지한 내력을.
사락.
운현의 검 미명이 유려하게 허공을 가르며 한월을 향해 나아갔다.
두 검이 서로 만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한월과 미명의 날카로운 검 끝이 허공에서 정확히 마주친 그 순간.
쨍.
무언가 깨져 나가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자루의 검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끝을 맞댄 채 멈춰 있었다.
“음.”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검성은 즉시 내력을 끌어 올렸다.
콰과곽.
갑자기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나뭇잎과 풀 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높다란 나무들이 태풍이라도 만난 양 세차게 흔들리면서, 고요하던 후원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쯧.”
객옹은 혀를 찼다.
쿠당탕, 콰당.
기세에 휘말린 의자들이 소리를 내며 낙엽처럼 굴러갔지만 그가 앉은 곳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찻잔 역시 잔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이 모든 난리의 원인인 검성 이검학은, 여전히 운현과 검 끝을 맞댄 채였다.
콰과과과곽.
두 사람 주위로 폭풍 같은 기세가 휘몰아쳤다.
운현의 옷자락과 머리카락도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지만, 검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언제까지라도 이대로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검성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흠.”
나지막한 소리가 검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영원히 그대로일 것 같던 검 끝이 떨어졌다.
콰앙.
폭음과 함께 갈 곳을 잃은 힘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파라라락.
운현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하지만 운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탁.
검성이 자신의 자리에 내려섰다.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놀랍구나.”
검성 이검학이 말했다.
“이것이 네가 낙일에서 얻은 것이냐?”
운현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운현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조금 전 운현의 검은 분명 한월의 기세를 흘렸다.
철혈사왕 염중부마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수법을, 검성은 오히려 내력을 쏟아붓는 것으로 대응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내력에 의존한 것이었다면 검성은 스스로의 기세에 휩쓸려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검성의 검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운현이 물었다.
검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태극혜검은 나도 좀 인연이 있어서.”
태극혜검은 무당의 비전절기다.
무림인들이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하는 그 절기를, 검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운현은 납득했다.
자신의 검 미명이 한월의 기세를 흘려 낸 것처럼 검성 역시 운현의 기세를 흘려 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두 힘이 태극을 이루며 평형 상태를 유지하듯 말이다.
“그럼 이제.”
사락.
운현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제 검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평범한 검은 검성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운현이 펼쳐 낼 검로는 한 가지뿐이다.
바로 백호실전검 삼식 말이다.
운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검성 이검학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지금이, 마치 일충현에게 처음으로 검을 보이던 그때 같았다.
사락.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미명의 검 끝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이것이 백호실전검 제삼식…….”
츠즈즈즈즈.
웅.
운현의 발밑으로 새하얀 서리가 번져 가고, 북해의 검 미명이 나지막이 울음을 흘렸다.
“중검(重劍)입니다.”
쿠구구구.
하늘로 올린 운현의 검은 묵직한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검 앞에 검성의 기세도 변했다.
스륵.
검성은 자신의 검 한월을 고쳐 쥐며 자세를 잡았다.
지켜보던 객옹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검성이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검에 반응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솟아오른 운현의 검에서, 마치 천 년의 거목 같은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희열이 번져 가는 눈빛으로 검성은 말했다.
“기대가 헛되지 않았구나.”
후우우웅.
한월이 울음을 흘리고, 검성의 기세가 천천히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것은 마치 안개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주위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우우우웅.
객옹의 손에 들린 찻잔에 파문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의 객옹은 운현의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운현의 백호실전검 제삼식을 객옹은 이미 보았다.
하지만 운현의 검은 이번에도 객옹을 소름 돋게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의가 꺾일 것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
그 어마어마한 기세가 사방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검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운현의 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과 사나운 맹호가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훅.
운현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결코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는 그 검로는, 마치 산이 무너지 듯 경이롭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존재감은 곧 압도적인 힘과 함께 검성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짓이겨질 것만 같은 그 검 앞에서, 그러나 검성은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한월.”
검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은 수많은 생사의 기로를 그와 함께한, 검성 이검학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벗의 이름이었다.
화아악.
검성이 쥔 검, 한월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월의 기척이 사라졌다.
‘헉!’
객옹이 눈을 부릅떴다.
검을 날린 것도, 기묘한 수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한월은 여전히 검성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검성 이검학 자신이었다.
쿠구구궁.
하늘이 무너지듯 떨어져 내리는 검을 향해 검성이 고개를 들었다.
검성은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그 목소리에 한월이 답했다.
훅.
한월과 하나 된 검성은 미명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하늘을 꿰뚫는 한 자루의 검.
그것은 바로 검성 이검학의 절기, 일검충천(一劍衝天)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운현의 중검과 솟아오르는 검성의 일검충천이 마치 운명처럼 맞부딪쳤다.
***
“쯧.”
객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원은 마치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작은 나무와 꽃 들은 뿌리째 뽑혀 있었고, 제법 커다란 나무들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객옹이 앉아 있던 탁자와 의자도 박살 난 채 후원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찻잔은 당연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객옹은 흙먼지로 뒤덮인 자신의 소매를 보고 가볍게 털어 냈다.
탁, 탁.
사실은 머리카락도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나마 안 보이는 터라 객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하하하하.”
문득 들려온 웃음소리에 객옹의 눈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 목소리는 바로 검성 이검학의 것이었다.
“과연.”
검성은 운현을 보며 눈을 빛냈다.
“대단하군. 내 일검충천으로도 파훼하지 못하다니.”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운현의 중검과 검성의 일검충천은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혹 두 사람이 전력을 쏟아부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러기엔 위험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이건 생사결이 아닌 데다, 객옹의 찻잔이 날아간 다음부터 그의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기 때문이다.
스릉.
운현은 미명을 갈무리했다.
“음?”
검성이 인상을 썼다.
그는 아직도 비무를 이어 갈 생각이 가득했지만 운현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현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검성에게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는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지요.”
“……아쉽군.”
검성 이검학이 검을 거두었다.
스릉.
한월을 갈무리하며 검성이 말했다.
“지금 한 말을 잊지 말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는 그의 명성과 나이를 순간 잊게 만들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운현이 어색하게 웃고, 지켜보던 객옹은 한숨을 쉬었다.
“다음엔 나 없을 때 해라.”
그 말에 운현이 미소를 머금을 때였다.
“하지만 이상하군.”
문득 검성이 말했다.
“나와 비무하면서도 네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는데, 이전에는 어째서 그리했던 것이냐?”
“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제라는 녀석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무제라니, 검성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검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한낱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는 않을 터. 설마…….”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검성은 말을 이었다.
“심마더냐?”
그 한마디에 운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