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신승이 남긴 것
창룡맹 총단이 항주에 들어서는 것은 매우 의미 깊고 상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총단 건물이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운현 일행은 당분간 거처할 곳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다행히 항주 외곽에 커다란 저택을 구할 수 있었고, 본의 아니게 창룡맹 임시 총단이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항주 창룡맹 임시 총단, 후원.
나무 그늘이 드리운 탁자에 운현과 검성, 객옹, 그리고 영호준이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일행도 함께 있었지만 각자 맡은 일이 많아 모두 자리를 떴다.
영웅맹이 무너진 뒤처리도 산더미였을뿐더러, 온갖 문파와 상단, 유력 가문들이 창룡맹에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군사 영호준만이 남아서 몇 가지 중요 사항들을 운현과 상의하고 있었다.
“그러면 총단 건설에 대한 것입니다만……, 토지 소유권은 어떻게 할까요?”
영호준의 말에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토지 소유권이라니요?”
“영웅맹의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가 맹주님께 주어졌잖습니까? 창룡맹 총단을 지을 토지도 결국은 맹주님의 것이니, 확실히 정리를 해야지요.”
운현은 영호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리라면 어떤…….”
“우선 창룡맹에 매각하는 방법이 있고, 임대 형태로 매년 사용료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건 제법 수입이 괜찮겠는데요?”
그건 생각지도 못하던 말이었다.
운현은 영호준에게 물었다.
“아니, 그 땅은 본래 무림맹의 것이었잖습니까?”
“그런데 그 무림맹은 없어졌지요. 영웅맹이 불법적으로 점거를 했고, 일시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었다가 결국 맹주님께 주어진 것 아닙니까? 그러니 맹주님의 것이죠.”
뭔가 복잡했지만 사실 관계는 맞았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맹주님의 결정이 필요합니다. 뭐, 맹주님께서 맹을 사유 재산이라 주장하시며 ‘전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는…….”
“아닙니다.”
운현은 얼른 말했다.
“뜻을 같이하여 세운 맹이니 어찌 제 것이라 하겠습니까? 토지는 맹에 기증하는 것으로 하지요.”
영호준은 씨익 웃었다.
“참으로 훌륭하신 결정입니다. 가끔 그런 식으로 문파를 사유화하는 자들도 있거든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앞에서는 모두를 위한 것처럼 말하면서 뒤로 자신의 이득을 채우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조정이든, 무림이든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염중부가 옮기려던 것들도 맹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영웅맹의 모든 재산은 운현에게 주어졌다.
염중부가 빼돌리려던 오십여 대의 짐마차에 실린 것들도 당연히 운현의 소유가 되었다.
“안 된다.”
“그건 안 됩니다.”
객옹과 영호준이 동시에 말했다.
운현이 쳐다보자 객옹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이 들면 뭐라도 쥐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건 노후를 위해 당문의 태상령패를 가지고 있었다던 객옹다운 생각이었다.
물론 천하의 객옹에게 그런 것이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맹을 사유화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맹이 끝까지 맹주님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영호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데다가, 자기 술값은 자기가 내야 궁색하지 않은 법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어쩐지 영호준다운 비유라 생각하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하지요. 다만 당분간은 맹에서 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 보관비는 받을 겁니다. 공사 구분은 엄격해야 하니까요. 하하하.”
달칵.
운현은 찻잔을 들었다.
“태평맹은 어떻습니까?”
영호준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강남에 손을 뻗고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영호준이 말했다.
“당문과 공손세가, 혁련세가의 정예들이 대놓고 강남을 들쑤시고 있는 중입니다. 주로 귀주성과 호남성의 사파들이 대상이다 보니 무력 충돌도 아주 빈번합니다.”
강남이 역사적으로 등한시되어 온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지세가 험하고 이민족이 많은 데다가 물산은 풍부하다지만 대규모 경작지가 강북에 비해 현저히 적어 인구가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사파들이 날뛰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더구나 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아 강남에는 온갖 사파들이 들끓는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들을 대하는 당문, 공손세가, 혁련세가의 손속에도 자비가 없었다.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태평맹은 사파들을 무자비하게 쓸어 나갔고, 덕분에 강남 무림에는 태평맹을 칭송하는 이들조차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중경을 치는 척하며 저희의 등을 찌르는 것 아닌가 염려했습니다만, 그건 아니었더군요. 아, 말씀드렸듯이 북해일문주께서도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영호준이 씩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운현을 보았다.
운현은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도와준 사실은 영호준의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진행되는 상황으로 보아서는 강남 사파들을 일소한 후에 귀주성의 귀양과 호남성의 장사를 장악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인 듯합니다.”
“장사요?”
호남성 장사는 운현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동정호에 면한 장사에는 호암상단의 본가가 있고, 멀지 않은 악양 근교에는 의형 일충현의 본가가 있다.
“당연히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영호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귀양이라면 몰라도 장사를 넘겨줄 수는 없지요. 그간 호암상단에 들인 공이 얼마인데요.”
“공을 들이다니요?”
호암상단에 뭔가 한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운현이 물었다.
“후계 분쟁으로 무주공산이 되었기에 살짝 손 좀 써 놨습니다. 태평맹이 날뛰면 오히려 더욱 우리 쪽으로 기울겠더군요.”
영호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지나가듯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쪽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태평맹이 장사에 발을 디딜 일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 맹주님의 의형 되시는 가문에도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이 그렇게 말하면 확실할 것이다.
“뭐, 당설련 소저가 하는 일이니 이대로 조용히 강남 개척만 할 것 같진 않지만, 당장은 지켜봐도 무관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영호준은 운현과 검성, 객옹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영호준이 떠나고, 운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차를 음미했다.
달칵.
“너는.”
문득 검성이 운현에게 말했다.
“불영의 뒤를 이을 것이냐?”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검성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창룡맹이 또 다른 무림맹이 될 것인지, 운현이 신승 불영의 뒤를 이어 강호 무림을 좌우하려는지 묻는 것이다.
“아닙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운현은 답했다.
“그분이 이미 끝내겠다 하시고 손에서 놓으셨는데, 어찌 제가 다시 그것을 붙들겠습니까?”
운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저 제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려 할 뿐입니다.”
“책임이라면, 조정의 일을 말함이냐?”
검성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분에 넘치는 인연으로 많은 분들께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 책임이 다만 조정의 명에만 있지는 않겠지요.”
운현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창룡맹은 무림맹의 뒤를 잇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문파들에게 대화의 명분이 될 구심점을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뒤는 저들이 할 나름이겠지요.”
옆에서 듣던 객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운현은 강호 무림의 정세에 관심이 없다.
문파들 간의 이권 다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강호 무림은 더 이상 무림맹이 필요한 정사대전의 시대가 아니다.
어쩌면 운현의 생각은 시대의 변화를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군.”
검성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불영이 남긴 것들을 받은 자는 너니, 네가 뜻하는 대로 해라.”
무심코 넘어가려던 운현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운현은 검성에게 물었다.
“……‘남긴 것’이라니요? 그분이 저를 사제라 하신 것 말씀입니까?”
신승 불영은 운현을 자신의 사제라 공언했다.
그것은 창룡맹이 자리 잡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만일 운현이 신승의 사제가 아니었다면 화산이나 무당, 소림의 깐깐한 장로들이 그토록 쉽게 가맹을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창룡맹의 가장 든든한 대의명분과 정통성이 되어 준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조금 전 그 아이도 있지 아니하냐?”
“네?”
운현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조금 전 그 아이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일까?
“불영은 사람을 남기고자 했다.”
검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래를 맡길 사람 말이다. 그중 한 명이 영호준이라는 그 아이다.”
‘아!’
순간 운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영호준의 행보는 사뭇 이상했다.
서기였던 운현을 조사단에 참가시킨 사람도, 소림사로 가게 한 이도 영호준이었다.
무림맹이 무너진 후 화산이 제자들의 산문 출입을 금했을 때도 영호준은 예외였다.
오히려 그는 소림의 혜천과 함께 운현을 찾아와 당연하다는 듯 뜻을 같이했다.
그때는 화산의 매화검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실은 그가 신승의 안배였던 것이다.
“……그렇군요.”
운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영호준은 맹의 총군사를 자처하며 모든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무림맹의 경험 덕분이라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호준은 맹의 업무 전반에 걸쳐 대단히 유능했다.
그건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또한 그렇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객옹이 문득 말했다.
“내가 보기에 불영이 가장 잘한 건 널 남긴 것이다. 보아라. 네가 세상을 바꾸지 않았더냐?”
말하는 객옹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 진심에 운현은 또 한번 가슴이 뭉클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마음을 담아 객옹에게 예를 표했다.
“헌데.”
검성이 물었다.
“일대상인은 뭐냐?”
운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검성은 일대상인이나 문왕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는 문왕을 통해 무림맹을 무너뜨린 배후입니다. 그는 본래 북해에도…….”
“강한 놈이다.”
객옹이 운현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현이를 노리고 있지.”
“호오.”
검성의 눈이 빛났다.
객옹은 그가 원하는 답을 잘 알고 있었다.
운현도 그제야 검성에게 어찌 대답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무제의 주군이기도 합니다. 염중부를 데려간 자 말입니다.”
“그렇군.”
검성은 객옹과 운현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무제와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천산에서.”
짧게 대답한 검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대상인이라는 자가 예전 천기에 나타났던 그자인가 보군.”
운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성의 눈동자에 호승심이 일어나는 건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쯧, 그놈의 천기.”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천하를 유랑하며 살 건가?”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네.”
검성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강자를 찾아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보고 듣는 것도 많아지니까. 자네도 들으면 생각보다 재미있을 걸세.”
“됐네.”
객옹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불영인 줄 아나? 현이나 붙잡고 얘기하든지.”
“후훗.”
검성이 웃었다.
그가 웃는 건 드문 일이라 운현도 놀랐다.
검성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기하군. 이놈이 이렇게 오래 말하는 건 처음인데? 네 덕분인가?”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객옹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도 변했다. 만나면 다짜고짜 기세부터 날리던 놈이…….”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은 무림맹에서 운현을 처음 보았을 때도 난폭한 기세를 날려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후후. 그런가? 마침 말이 났으니 말인데.”
검성이 운현을 보며 말했다.
“잠깐 검이라도 나눠 볼까?”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어조였다.
마치 산책이나, 혹은 차라도 한잔하자는 것처럼.
하지만 운현은 놀라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왜? 싫은가?”
검성이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어느새 열기가 번져 가고 있었다.
뜨거운 그 열기는 운현의 가슴에도 불을 지폈다.
“아닙니다.”
운현은 대답했다.
“감히 부족하오나 바라 마지않는 일입니다.”
그 말은 검성을 만족시켰다.
운현의 눈동자에도 불꽃같은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