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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88화 (388/530)

388화. 후폭풍

운현은 폐허가 된 영웅맹을 바라보았다.

장강을 제 세상인 양 활보하던 영웅맹이 지금은 불타 무너진 채 잔해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한때 강호 무림을 내려다보던 무림맹의 흔적이 묻혀 있으리라.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룡맹의 총단을 얼마나 크게 지을까요?’라고 물어본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크게 짓지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강호 무림의 모든 문파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요.”

“네?”

“엥?”

“뭐라고요?”

영호준과 담소하, 진예림이 놀라 반문했다.

옆에 있던 감찰어사 조관과 그 보좌인 항장익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려면 항주 전체를 창룡맹 총단으로 뒤덮어도 모자랄……. 아!”

말하던 담소하가 눈을 빛냈다.

진예림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의도로 운현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천하의 모든 문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가요?”

진예림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창룡맹에 가맹한 문파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대화와 협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건 ‘얼마나 크게’라는 질문에는 동문서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축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우문현답이라고 할 만했다.

“그거 재미있군요.”

영호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냥 담을 세우지 말고, 천하가 창룡맹의 총단이라고 하면 되잖습니까?”

“그럼 다 강제로 창룡맹 가입행이네요. 회비도 내라고 할까요?”

담소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영호준이 흠칫했다.

담소하가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악덕 상인이라도 된 느낌이다.

“크흠, 농담입니다. 그럼 객청을 전면에 배치해야겠군요. 정문도 가능하면 개방적인 형태로 짓고…….”

사실 어떻게 짓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무림맹도 처음에는 협의체였으나, 곧 거대 문파들의 것으로 변질되었으니까.

그러나 창룡맹의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총단의 건축은 결코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강호 무림 전체가 창룡맹을 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뒤에서 들린 발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검성 이검학과 객옹이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들 있었군.”

객옹의 말에 영호준이 즉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왔기에 아직 객옹을 만나지 못했던 터였다.

“그간 평안하셨…….”

말하던 영호준이 입을 딱 벌렸다.

눈앞에 다름 아닌 검성 이검학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호준이 어찌 검성을 모르랴?

검의 하늘, 검성을 눈앞에 둔 영호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담소하와 진예림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다.

이미 운현에게 소개를 받은 데다, 영호준이 다른 일행과 함께 항주에 오기까지 며칠간 매일 얼굴을 마주쳤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어르신.”

“오셨군요.”

심지어 검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까지 했다.

영호준은 놀란 눈으로 진예림을 보았다.

“이, 이분이 누구신지 아시오?”

“네.”

진예림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검노사’시잖아요?”

“검노사?”

“어, 그게……. 검에 미친 분이라고 자기소개를 하시기에 저희끼리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검성 이검학은 스스로 검에 미친 자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르신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어서, 담소하와 진예림은 검노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검옹이라는 단어도 고려했었지만 객옹과 운현이 반대했다.

객옹은 ‘비슷한 호칭으로 이놈과 또 엮이기는 싫다’였고, 운현은 ‘삼태상 중에 검옹이라는 자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검노사로 정해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운현 일행 내에서만 말이다.

“허.”

영호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노인이 검성 이검학이라는 걸 알게 되면 진예림과 담소하는 과연 뭐라고 할까?

어쩌면 객옹 때처럼 그냥 그러려니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성이라는 명호가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는 영호준은 그럴 수 없었다.

스륵.

영호준은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검성에게 예를 표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검성 이검학이다.

천하가 인정하는 검의 하늘이자, 수많은 고수들 앞에 거대한 벽으로 우뚝 선 자.

무림맹의 신승과 함께 사실상 강호 무림의 정점으로 군림해 온 전설적인 인물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화산의 말학 영호준이 검……노사를 뵙습니다.”

호칭은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운현과 객옹, 게다가 검성 자신도 받아들인 것 같으니 말이다.

“안다.”

검성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호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검학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영이 말해 주더군.”

“……그러셨군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곧 사라졌다.

“여기에 총단을 세울 예정이냐?”

검성이 운현에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운현의 대답에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로 오면 되겠군.”

그건 그가 언제나 불영을 찾았듯이 운현에게 오겠다는 의미였다.

영호준은 그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

검성이 찾아온다는 건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지면 거대 문파들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운현은 담담하기만 하고, 객옹은 오히려 인상을 썼다.

“또 온다고?”

“왜? 싫은가?”

검성의 말에 객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찌푸린 객옹의 눈살은 그 대답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후후.”

검성이 웃었다.

운현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담소하와 진예림도 피식 웃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다툼이 어쩐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호준은 놀라고 있었다.

조금 전 객옹의 그 말은, 검성이 다시 올 때까지도 운현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객사도 많이 지어야겠네요.”

진예림이 영웅맹의 폐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불에 탄 잔해들 위로 항주의 환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안찰사에 들렀던 감찰어사 조관은 박 공공의 서찰을 가져왔다.

그곳에는 황태자가 운현의 노고를 크게 치하했다는 말과 함께, 영웅맹의 모든 재산을 운현에게 하사한다는 결정이 적혀 있었다.

***

사천성 태평맹 총단.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의 집무실에는 사방에서 급보가 빗발치고 있었다.

중경과 무한, 남경 그리고 항주에 이르기까지, 장강 유역 전 지역에서 날아드는 급보였다.

상황은 물론 내용도 다양했다.

그러나 결국 핵심은 한 가지였다.

영웅맹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저 총단이 불탄 정도가 아니라 영웅맹의 모든 지부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된 거야? 염중부!’

영웅맹이 이렇듯 단기간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장강은 길고 오가는 배들은 헤아릴 수 없다.

당연히 영웅맹에 흘러드는 재물도 막대하다.

그걸 이렇게 한순간에 날려 버리다니, 당설련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버틸 줄 알았는데…….’

철혈사왕 염중부는 결코 쉽지 않은 상대다.

그라면 수군 훈련이 시작되기 전까지 총력을 다해 창룡맹을 치고, 관의 개입을 최대한 피하며 어떻게든 발악할 것이라 생각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장강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영웅맹 총단은 한순간에 불타 무너졌고, 장강에 산재하던 영웅맹 지부는 거짓말처럼 무력화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일대상인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왕이 죽었다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염중부가 행방불명인 것은 아마도 일대상인이 개입한 것이리라.

그러나 일대상인은 결국 영웅맹을 버렸다.

문왕에게 직접 무릎을 꿇은 염중부에게도 이렇다면 태평맹은 말할 것도 없다.

‘아니, 아직 예단할 필요는 없어.’

톡, 톡.

당설련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의 시선은 펼쳐진 강남의 지도에 머물러 있었다.

“중경은 일단 보류해. 상황이 달라졌다고 본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는 건 좋지 않아.”

수하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총괄군사님.”

당설련이 수하를 보며 말했다.

“북해일문은? 아직 한중에 있나?”

“네. 하지만 곧 떠날 것으로 보입니다.”

영웅맹이 무너지고 창룡맹을 향한 위협이 사라졌으니 북해일문도 한중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들이 움직이는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알겠습니다.”

당문의 가주가 정예들을 이끌고 떠난 뒤에도 당설련은 성도에 남아야 했다.

바로 북해일문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중을 떠나는 대로 당설련도 가주와 합류할 것이다.

“나가 봐.”

“네, 총괄군사님.”

수하는 예를 표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

당설련은 운현에게 말했다.

제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장강에 가득한 영웅맹을 무너뜨리려면 천하를 난리로 뒤덮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과 손을 잡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당설련의 손을 거절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편이 되라고까지 했다.

물론 당설련은 코웃음을 쳤다.

절세의 고수이자 조정의 실세를 등에 업었다고는 해도 무림에서 운현은 철저히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창설한 창룡맹 역시 일인맹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형태였지 않은가?

하지만 그 창룡맹은 곧 강호 무림의 제삼 세력으로 부상하고 강북을 차지한 일대 정파맹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무혈입성에 가까운 형태로 영웅맹을 무너뜨렸다.

각 문파의 정예들이 무한을 지켰다지만 어찌 영웅맹 총단을 무너뜨린 공적에 비할까?

사실상 운현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소하는 운현의 얼굴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으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수치와 분노로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비록 그 누구도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았지만, 그녀의 구겨진 얼굴은 한동안 펴지지 못했다.

***

섬서성, 한중.

백색의 무복을 입은 빙혼이 말에 올랐다.

말을 타고 도열해 있는 백여 명의 북해일문 무사들을 돌아본 후 빙혼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슥.

백여 명의 북해일문 무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북해의 준마를 탄 무사들은 범상치 않은 눈빛과 기세를 흩뿌리며 한중의 중심가를 당당하게 가로질렀다.

백여 명의 무인들이 말을 타고 움직이는 모습은 사뭇 장관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멈춰 서서 북해일문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행렬 중간에 있는 백색의 화려한 마차에 몰려 있었다.

바로 그 마차에 그토록 아름답다는 북해일문주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일문주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태평맹의 연회뿐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문파와 상단, 그리고 유력 가문 사람들은 북해일문주의 미모와 기품, 그리고 도도한 분위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중에서도 그녀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그들 역시 북해일문주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히려 소문이 그녀의 미모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까지 있어서, 일부에서는 그녀가 천하제일미라는 이야기마저 떠돌 정도였다.

하지만 한중 사람들은 그 소문난 북해일문주의 미모를 볼 수 없었다.

하얀색의 촘촘한 너울이 마차의 창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마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소궁주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 제법 괜찮은 곳이었는데…….”

“이곳보다 좋은 도시는 많아.”

책을 읽으며 대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태원에서 할 일도 아직 많고.”

북해일문이 태원을 장악했다지만 아직 처리하지 못한 문제가 산적했다.

게다가 앞으로 산서성 전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갈 길이 아주 멀다.

오히려 한중에서 머문 것이 이례적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언니.”

소궁주의 목소리에 대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반짝이며 소궁주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뭐?”

대궁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소궁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 푸른 늑대님을 만나러 갔던 때 말이야. 언니 돌아왔을 때 보니까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던데?”

‘아.’

대궁주는 소궁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소림사로 운현을 찾아갔지만 대궁주는 그 앞에 나서지 못했다.

개봉에서 운현과 마주쳤으나 마음이 흔들린 그녀는 통고하듯 가맹 의사를 전하고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그 후 대궁주는 뜻을 돌이켰고 모용세가까지 운현을 찾아갔다.

비록 소궁주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대궁주가 무언가 변했음은 알아차렸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날 개봉을 떠나던 대궁주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과 정치적 야망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어느새 빙후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녀의 모습과 똑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대궁주는 돌이켰다.

일말의 후회조차도 없이.

“그냥, 내가 적이 아닌 사람과 싸우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야. 그것도 절대 싸워서는 안 될 사람과.”

“맞아!”

소궁주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서기 오빠는 분명히 언니를 받아 줄 거라고. 그러니까 얼른……. 읍.”

소궁주는 입을 다물었다.

대궁주의 눈빛이 순간 매서워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궁주는 고개를 숙이더니 슬그머니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대궁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따각, 따각.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대궁주는 가만히 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장은 한동안 넘어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언제나처럼 과묵한 빙설이 무심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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