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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85화 (385/530)

385화. 대치(對峙)

땅에 떨어진 횃불들이 길 위를 밝혔다.

부서진 마차의 파편과 짐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마부와 철혈대는 길바닥에 쓰러진 채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길 위에 나뒹구는 금은보화가 횃불의 불빛에 반짝였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운현의 눈앞에 암천무제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휘릭.

가냘픈 몸매의 여성이 무제의 뒤로 날아내렸다.

소리도 없이 가볍게 땅을 딛는 그녀의 한 손에는 염중부가 들려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염중부의 모습은 그녀가 손을 썼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사락.

긴 머리가 천천히 내려앉고, 여인은 무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목표를 확보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염중부를, 비록 정상이 아니라 해도 이토록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운현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운현의 눈동자는 오직 한 사람, 암천무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무제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뜻이오?”

지금 이 자리에 무제와 비련이 나타난 것이 우연일 리는 없다.

무제는 운현의 물음에 답했다.

“상인께서 명하셨소.”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일대상인이 영웅맹에 개입하려 한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무제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영웅맹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으나 염중부가 죽는 건 이야기가 다르오. 그는 천하패령의 주인이었던 문왕에게 무릎 꿇은 자이니까.”

운현은 무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대상인은 영웅맹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왕이 정식으로 거두었던 염중부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무제는 정신을 잃은 채 늘어져 있는 염중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일대상인은 결코 자애롭지 않다.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들에게 돌아갈 것은 죽음뿐이었다.

슥.

무제는 운현을 향해 눈을 들었다.

“당신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해 왔소. 창룡검주.”

운현을 바라보는 무제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 기대가 헛되지 않아 다행이오. 비록 지금은 때가 아니겠으나…….”

“내가.”

운현의 목소리가 무제의 말을 끊었다.

“허락하지 않겠다면?”

말하는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운현이 진심이라는 것을 무제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제의 눈동자가 단번에 불타올랐다.

“바로 지금이 그때가 되겠군.”

화아아악.

암천무제는 기다렸다는 듯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츠즈즈즈.

발밑으로 서리가 번져 갔다.

동시에 새하얀 기운이 모습을 드러내며 운현을 휘감듯 솟아올랐다.

비련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그녀가 막 한 발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나지막한 음성이 비련의 귓가에 울렸다.

그것은 바로 독선의 목소리였다.

“한 줌 핏물이 되기 싫다면.”

그 말이 결코 허세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비련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비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선의 협박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무제가 생사결을 벌이게 할 수는 없었다.

“무제님! 상인께서는…….”

“안다.”

무제는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답했다.

“허나 명을 이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더냐?”

어쩔 수 없다는 말과는 달리 무제의 눈동자에는 희열이 번져 가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세상을 등지고 천산에 들어가 오직 검에만 매진했다.

상인의 뜻마저 뒤로 미루어 둔 것은 오로지 창룡검주, 운현이 보여 준 검 때문이었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다만 그것만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하늘과 같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검이, 그 충격이 지금도 무제를 소름 돋게 하는데 운현과 마주 선 이 순간이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무제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인에게 염중부를 넘겨줄 수는 없다.

염중부는 영웅맹의 수괴이자 황법을 어지럽힌 대역 죄인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암천무제와 마주한 순간, 염중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운현이 북해로 간 것은 바로 무제 때문이었다.

무제와 치른 일전을 통해 자신이 부족함을 알았고, 스스로의 검이 자신이 보았던 경지에 미치지 못함을 통감했다.

그래서 북해로 향했고 운명처럼 그 검로를 만났다.

한때 내력을 잃은 것도, 폐인처럼 되었던 것도 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

자신 안에 있는 한 자루 검만으로 지금 운현은 충분했다.

“나 또한.”

후우우우욱.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기세의 폭풍 속에서, 운현은 무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기를 기대해 왔소.”

무제는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을까?

전서체와 같이 투박하면서도 장대하던 그 기상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던 그 힘찬 검로는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이번에도 그의 검이 그때처럼 운현을 일깨워 줄 수 있을까?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닿을 것 같은 그 꿈결과도 같은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을까?

이 순간 운현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의미를 잃었다.

운현의 눈동자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꿈틀.

지켜보던 독선의 눈썹이 경련했다.

‘설마.’

어쩌면 운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대적이라 부를 만한 상대를 만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어느 무인이 흥분하지 않을까?

설사 세상 그 어떤 것인들 지금 운현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독선은 운현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또한 분명히 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운현의 모습은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일대상인과 마주쳤을 때도, 철혈사왕 염중부를 꺾고 나서도 변하지 않던 운현의 눈빛은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은 이제껏 독선이 보아 온 운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독선은 확신했다.

이 한 걸음을 내딛고 나면 운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마치 하늘을 가르고 승천하는 푸른 용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독선은 이를 악물었다.

‘심마!’

운현은 그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독선에게 스스로의 목숨마저 맡겼다.

바로 지금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콰과과과곽.

무제와 운현, 두 사람의 기세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때아닌 눈 폭풍이라도 불어닥친 것처럼, 주위의 기온이 싸늘하게 얼어붙고 허공중에 미세한 얼음 조각들이 휘날렸다.

그저 두 사람이 대치하는 것만으로 이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 사이에 끼어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아무리 독선이라 해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독선은 주저하지 않았다.

저벅.

독선이 막 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흠. 그저 습관처럼 무림맹에 들렀을 뿐인데…….”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엄청난 기세가 길 저편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피어나는 먹구름처럼 삽시간에 주위를 뒤덮었다.

‘이건!’

독선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운현과 무제의 대치 탓에 다른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독선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저벅.

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체격과 강렬한 눈빛, 그리고 태산과도 같은 기세를 지닌 사람.

그는 바로 검성 이검학이었다.

“이런 곳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었군.”

독선은 와락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검학! 네가 어떻게…….”

그러나 검성은 독선의 말은 무시한 채 말했다.

“나도 함께하지.”

그건 결코 운현을 돕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운현과 무제를 바라보는 검성의 눈동자에는 열기가 번져 가고 있었다.

슥.

검성은 자신의 검 한월(寒月)에 손을 가져갔다.

“거, 검성?”

비련은 놀란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검성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비련을 돌아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너는…….”

훅.

문득 무제가 내력을 거두었다.

사방에 소용돌이치던 기세가 순식간에 잦아들고, 상대를 잃은 한기 역시 가만히 그 위세를 숙였다.

“다시 뵙는군요.”

사락.

놀랍게도 무제는 검성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검성은 오히려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내력을 거두었느냐?”

“섬기는 분의 명을 행하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당신과 다시 승부를 결할 마음은 없습니다.”

“……아쉽군.”

그 말은 진심이었다.

검성은 강렬한 눈빛으로 무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제는 이미 뜻을 접은 후였다.

슥.

무제는 운현을 향해 눈을 들었다.

“주군께서 이자를 데려오라 하셨소. 그대가 이자와 무관치 않음은 알고 있으나…….”

“데려가라.”

대답은 운현이 아니라 독선이 했다.

독선은 무제를 향해 말했다.

“그에게 더 이상 의미는 없다. 그는 이미 환우오천존조차 아니니,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운현을 돌아보며 독선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느냐? 현아.”

사락.

살갗을 찌를 것 같던 한기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새하얀 서리는 여전히 주위를 뒤덮고 있었지만, 더 이상 아까와 같은 날카로운 기세는 없었다.

“……어르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운현은 독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독선은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정작 장본인인 검성 이검학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지만 말이다.

“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검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무제가 검성에게 말했다.

그리고 독선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무제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겠소.”

그 눈빛은 아직 식지 않은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 역시.”

운현은 무제에게 말했다.

“기다리겠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독선이 와락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뭐하느냐? 어서 가지 않고!”

그 말에 비련이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무제 역시 몸을 돌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운현을 보는 시선이 그의 미련을 말해 주는 듯했다.

저벅, 저벅.

몸을 돌린 무제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길 위에는 운현과 독선, 그리고 검성 이검학만 남게 되었다.

“괜찮냐?”

독선이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아, 네. 괜찮습니다.”

무제와 생사결을 펼친 것도 아니고 검조차 나누지 않았다.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없었다.

저벅.

그러나 독선은 운현에게 다가와서는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어, 저기…….”

“흠. 괜찮군.”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독선이 말했다.

그리고 검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냐?”

독선의 질문은 당연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던 검성이 갑자기 이곳에, 그것도 이 시점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천산을 내려와 무림맹에 들렀다.”

검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오랜 비무행이 끝나면 무림맹에 있는 와룡헌에 들러 신승 불영을 만나곤 했다.

지난번 운현을 만난 것도 그래서였다.

이번에도 검성 이검학은 습관적으로 무림맹에 들렀다.

“하지만 불이 났더군.”

“그건 영웅맹이다.”

독선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하지만 검성은 무슨 말이냐는 듯 독선을 바라보았다.

“영웅맹? 그사이 무림맹이 이름을 바꿨나?”

독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바뀐 건 이름이 아니라……. 됐다. 그래서?”

본래 검성은 강호 무림의 정세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검성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주변을 살피다가 범상치 않은 기세를 발견했다. 그래서 왔다.”

“그랬군.”

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운현과 무제가 뿜어낸 기운은 독선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검성이 그 기운을 따라 이곳으로 오는 것은, 적수를 찾아 만 리 길조차 마다하지 않는 검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문득 검성이 물었다.

“불영은 어디 있나?”

침묵이 흘렀다.

운현도, 독선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쏴아아.

부는 바람에 새햐얀 서리가 천천히 걷혀 갔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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