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몰락(沒落)
철혈사왕 염중부는 이를 갈았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독선과 운현이었다.
백여 명의 철혈대와 오십여 명의 마부들이 잠에 빠지고, 세상에 오직 염중부만 깨어 있는 것 같은 이 기괴한 상황에서 그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염중부는 독선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드디어 화산지약을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구나.”
독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말이냐? 언제?”
염중부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이 짓이 네 소행이 아니란 말이냐!”
백여 명의 철혈대와 오십여 명의 마부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숨소리만 아니라면 죽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것은 분명 독선의 작품이다.
오존은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는 화산지약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독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귀찮은 것들을 조용히시켰을 뿐이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독선은 말했다.
“이조차 너에 대한 적대라면, 네가 살아 숨 쉬는 것도 나에 대한 적대가 아니겠는가?”
“헛소리! 그런 궤변은…….”
염중부가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면 설마 이딴 것들의 도움마저 구해야 할 정도로…….”
독선은 서늘한 눈빛으로 염중부를 바라보았다.
“구차해졌다는 뜻이냐? 염가야.”
염중부는 이를 악물었다.
독선의 지적은 정확했다.
제아무리 백여 명의 철혈대라 해도 환우오천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 염중부가 화를 내는 것은 철혈대가 무력화된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계략이 무위로 돌아간 데다가, 맹주가 영웅맹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천박한 속셈이 남김없이 드러났다는 수치심이 더 컸다.
그러니 마부와 철혈대가 전부 잠든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걱정할 것 없다.”
독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의 일에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저벅.
아예 독선은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독선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허나 염가 네가 이 자리에서 도망하려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네게 천향접을 날리겠다.”
그 말에 염중부의 안색이 변했다.
독선의 천향접은 염중부조차 경시할 수 없는 절기였다.
염중부를 똑바로 바라보며 독선은 말했다.
“생사결에서 등을 돌리는 놈 따위를 내 어찌 환우오천존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말하는 독선의 눈빛은 시퍼렇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염중부에 대한 가차없는 질책이었다.
염중부가 문왕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수하가 된 것을, 독선은 아직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흐, 흐흐흐.”
나지막한 소리를 흘리며 염중부가 웃었다.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 하지 않느냐? 지저분한 변명 따위는 집어 치우고 말이다.”
파라라라락.
염중부의 옷깃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폭풍처럼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와라.”
운현을 노려보며 염중부가 말했다.
“나, 염중부. 결코 그냥 죽지는 않을 것이다.”
스릉.
운현은 검을 뽑았다.
그의 검, 미명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번뜩였다.
“당신이 제 의제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었으니.”
염중부를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나도 당신의 죽음을 욕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흐흐. 그것 참 고맙구나.”
어깨까지 들썩이며 염중부가 웃었다.
“허나 죽은 다음 따위야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랴? 예로부터 죽은 정승은 산 개만도 못한 것이…….”
파앙.
염중부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는 운현을 향해 엄청난 빠르기로 짓쳐 들었다.
“바로 인간사니라!”
그의 손에서 번뜩이는 것은 검붉은 날을 가진 짧은 검이었다.
한때 피를 마시는 흡혈마검으로 불렸으며, 주인이었던 흡혈마와 함께 사라졌다는 마검이 염중부의 손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쉭.
흡혈마검은 운현을 향해 그 섬뜩한 칼날을 번득였다.
운현은 그저 가볍게 몸을 뒤트는 것만으로 그 검을 피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염중부가 노리던 바였다.
휘릭.
염중부의 손에 들린 마검이 기이하게 움직이며 운현의 허리를 노리고 휩쓸어 갔다.
하지만 운현은 이미 자신의 검, 미명을 자연스럽게 위로 쳐올리고 있었다.
쉬익.
“큭!”
순간 염중부가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검을 놓았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반응이었지만 염중부의 대처는 옳았다.
칭.
미명과 맞닿은 마검은 마치 달라붙은 듯 운현의 검을 따라 위로 치솟았다.
만일 염중부가 저 검을 쥐고 있었다면, 허공으로 내던져진 것은 그저 마검만이 아니었으리라.
휘리릭.
허공을 날아간 흡혈마검은 소리도 없이 독선의 발 앞에 꽂혔다.
그러나 독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사이, 염중부의 손에 모습을 나타낸 그의 독문병기 적사편은 허공을 찢으며 운현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꽈과광.
벼락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적사편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둘로 갈라진 적사편의 두 끝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운현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사박.
운현이 발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그의 검, 미명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적사편이 그 궤적과 만나는 순간.
콰아앙.
폭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곧 폭풍 같은 기세가 주위를 휩쓸었다.
콰과곽. 쿵, 콰직.
마차가 부서지고 짐이 길 위에 나뒹굴었다.
부서진 짐 안에서 금은보화가 사방에 흩뿌려지고, 말들은 마차에 묶인 채 버둥거리거나 혹은 달아났다.
쓰러진 마부와 철혈대가 땅에 나뒹굴었지만 그 와중에도 깨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모든 광경을 독선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욱.
먼지가 가라앉고 기세가 잦아들었다.
독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기괴했다.
사방에 널린 금은보화가 달빛 아래 반짝이는데, 적사편을 든 염중부는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허억, 헉.”
그의 손에 들린 적사편은 그 끝이 무참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조금 전 운현의 일검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리고 운현은 한 손에 미명을 든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달빛 아래 명상에 잠기듯 고요하게.
쏴아아아.
길 위에 바람이 불었다.
독선은 승부가 난 것을 알았다.
특별한 초식도 놀라운 절기도 없었다.
이전처럼 백호실전검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운현은 염중부를 꺾었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자 영웅맹의 맹주인 철혈사왕 염중부를 말이다.
“흐으.”
염중부가 헛웃음을 흘렸다.
손에 쥔 적사편은 마치 머리를 잃은 뱀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염중부의 입가에는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놈, 그사이 더 강해졌구나.”
“아닙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이 약해진 것입니다.”
염중부의 눈동자가 빛났다.
“내가 약해졌다고?”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도, 독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염중부는 약해졌다.
어쩌면 그건 심리적 요인인지도 몰랐다.
지금 염중부는 영웅맹을 버리고 도망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염중부가 문왕 앞에 무릎 꿇었을 때부터였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맹주의 자리를 받아들였을 때, 염중부는 더 이상 환우오천존이라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철혈사왕임을 포기한 순간부터 염중부는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쿨럭.”
염중부는 입에 손을 가져갔다.
묻어나는 피를 보며 염중부는 웃었다.
“흐흐. 그래, 너희는 항상 그랬다.”
염중부는 고개를 들어 독선을 노려보았다.
“환우오천존이라 하지만 늘 나를 무시하고 경멸했지. 바로 지금처럼.”
운현은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슥.
독선의 손이 운현을 제지했다.
운현은 말을 멈췄다.
염중부는 독선에게 말했다.
“좋더냐? 이 어린놈에게 빌붙어 사는 것이?”
“나쁘지 않더군.”
독선이 나지막이 답했다.
“어차피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염중부는 조소했다.
“흥, 너도 결국은 변했군. 그 고고하고 잔혹하던 독선이 뒷방 늙은이 같은 꼬락서니라니…….”
독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중부는 운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영웅맹을 버릴 줄 어찌 알았더냐?”
“당신이라면 반드시 그리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손해 보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니까요.”
“흥.”
염중부는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그따위 근거를 가지고 이곳까지 왔단 말이냐? 내가 무한에 있었다면 네 수하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럴 리 없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무한을 치려 했다면 오히려 은밀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맹호가 울부짖는 것은 겁을 주기 위함이지, 결코 적을 치려 함이 아니니까요.”
염중부는 반박하지 못했다.
애초에 무한 공략은 천하의 이목을 끌기 위한 빈 껍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영웅맹을 버리려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수군도독의 죽음에 대한 헛소문과, 영웅맹이 무한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운현에게 확신을 주었다.
제갈기호가 전해 준 소식도 운현의 판단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제갈세가에서도 말하더군요. 최근 영웅맹이 운남과 광서에 부쩍 사람과 서신을 자주 보냈다고요.”
운남과 광서는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변방 중의 변방이다.
지리가 험하고 날씨도 무더우며, 이민족이 많이 사는 곳이라 사실상 관의 통제가 불가능한 곳도 많다.
사람이 사는 곳보다 전인미답의 지역이 더 많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할까?
“흥, 무능한 수하 놈 같으니.”
염중부는 씹듯이 내뱉었다.
“이딴 일 하나 제대로 못 하고 꼬리를 밟히다니, 내가 너무 편하게 죽여 줬구나.”
이미 끝난 일에 불평을 말해 봤자 헛것이다.
조금만 더 갔다면 도착했을 항구에서 은밀히 염중부를 기다리는 배처럼 말이다.
염중부는 고개를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죽여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염중부가 말했다.
“그래도 신승이라는 놈이 먼저 뒈지는 꼴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느냐? 크흐흐흐흐.”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은 이를 모욕하는 염중부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끝까지.”
염중부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디며 운현이 말했다.
“어리석군요.”
스륵.
운현의 검 미명이 비스듬히 위로 솟구쳤다.
아름다운 칼날이 달빛 아래 푸르게 번쩍이고, 염중부는 이를 악물며 그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건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에 있는 염중부는 더 이상 철혈사왕조차 아닌, 처참하게 몰락해 버린 과거의 잔재일 뿐이니까.
쉭.
운현의 칼날이 푸른 기운을 내뿜으며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현아!”
독선이 날카롭게 외쳤다.
운현 역시 변고를 알아차렸다.
휘릭.
미명이 그 검로를 바꾸어 허공에 유려한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콰과과과곽.
엄청난 기세가 사방을 휩쓸었다.
충격은 컸지만 운현은 가볍게 그것을 흘려 냈다.
하지만 염중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운현도, 독선도 더 이상 염중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았다.
저벅.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오랜만이군.”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만으로도 운현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운현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갔던 유일한 상대를 말이다.
“반갑소. 창룡검주.”
어둠 속에서도 강렬한 눈빛을 빛내는 건장한 사내.
그는 바로 어두운 하늘 아래 선 자, 암천무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