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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83화 (383/530)

383화. 금선탈각(金蝉脱殻)

항주, 영웅맹 총단 맹주전.

철혈사왕 염중부는 불을 환하게 밝힌 맹주전에 앉아 있었다.

사락.

맹주전의 문이 열리고 수하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맹주님.”

가까이 다가온 수하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슥.

길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던 염중부는 고개를 들었다.

“무한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쯤 창룡맹 임시 총단을 습격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웅맹의 핵심 전력을 쏟아부은 습격이었지만 정작 염중부는 여전히 항주 영웅맹 총단에 머물러 있었다.

염중부가 직접 쏘아 올린다고 했던, 무한의 밤하늘에 피어오른 불꽃 신호도 당연히 그가 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오로병진이라 하며 전력을 다섯으로 나누고, 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도록 했을 때부터 염중부가 어디 있는지 다른 수적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수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다만 창룡맹의 준비도 철저한 것으로 보여 일의 성패는 불투명합니다.”

장강에 소문이 가득한데 창룡맹이 모를 리가 없다.

가까운 소림, 무당, 화산, 모용세가는 물론이고 아미와 남궁세가까지 무한 임시 총단에 정예를 급파했다.

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 소식이 마두들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성패 따윈 의미가 없었으니.”

영웅맹의 무한 습격은 처음부터 시선을 끌기 위한 빈 껍질에 불과했다.

빛을 반짝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매미의 빈 껍질 말이다.

“철혈대는?”

영웅맹의 철혈대는 맹주 직속의 무력 집단이다.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맹주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바스락.

염중부는 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도 수고가 많았다.”

수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껏 염중부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해도 되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아무런 잡음 없이 준비해 냈으니 말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수하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 능력이 미천하여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염중부는 빙긋 웃었다.

“그러냐? 하긴 네가 전임자들에 비해 딱히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

그 말에 수하는 의아해했다.

사락.

염중부는 수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수하는 엄청난 힘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을 느꼈다.

“컥!”

수하의 무릎이 꺾이고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를 짓누르는 힘은 멈추지 않았다.

“매, 맹주님. 어, 어째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수하가 염중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염중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사람은 반드시 딴생각을 한다.”

담담한 눈빛으로 수하를 내려다보며 염중부는 말했다.

“게다가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크윽.”

수하를 내리누르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그 힘에 수하는 완전히 바닥에 엎드린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슥.

맹주 염중부가 가볍게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저 그것만으로 수하의 가슴은 박살 나 버렸다.

콰직.

“커헉!”

맹주전 바닥에 피가 번져 흘렀다.

그리고 수하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원통한 듯 눈조차 감지 못한 채였다.

“억울해 할 것 없다.”

염중부는 말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어 마땅한 나름의 죄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수하의 죽음을 확인한 염중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피가 번져 가는 시신을 뒤로하고 염중부는 맹주전을 나섰다.

밤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는 염중부의 머릿속에 죽은 수하에 대한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애초부터 그는 수하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맹주님.”

사락.

건장한 체격의 철혈대주가 염중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맹주전 앞에는 백여 명의 철혈대가 한 손에 횃불을 들고 맹주 염중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혈사왕 염중부와 함께 창룡맹 임시 총단을 칠 거라던 그들 역시 여전히 항주 무림맹에 있었다.

염중부는 철혈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철혈대주는 고개를 숙여 염중부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철혈대에게 외쳤다.

“출발한다! 각자 맡은 일을 시작하도록!”

“네!”

백여 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후 즉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남은 사람은 삼십여 명뿐이었다.

저벅.

염중부는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철혈대주와 삼십여 철혈대가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웅맹의 정문 앞이었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가 횃불 사이로 흘러나왔다.

정문 앞은 짐마차들로 가득했다.

오십여 대가 넘는 짐마차들이 짐을 실은 채 빽빽하게 도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횃불들 탓에 마부들의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마부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삐를 쥔 채 숨소리조차 낮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맹주 염중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영웅맹 따윈 얼마든지 내어 주마.’

어차피 영웅맹은 사상누각이다.

명분도 없고 의리도 없으며 조직조차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말 그대로 모래 위에 지은 누각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 사상누각조차 온전히 염중부의 것은 아니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염중부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오십여 대의 짐마차들을 바라보았다.

은자와 금자는 물론 갖가지 보석과 귀중품들, 전대 마두들이 바친 신병이기와 비급들, 그리고 상단들을 통해 모은 영약들까지.

말 그대로 현재 영웅맹이 가진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들은 그저 기반일 뿐이다.

천하는 넓고 광대하니, 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변방으로 들어가 힘을 기르면 권토중래도 꿈은 아니다.

아니, 그 기다리는 시간조차 왕처럼 군림하며 살 수 있다.

강호 무림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작은 일조차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일이다.

장강에 대한 영향력을 놓치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수군 훈련이 시작되면 잃어버릴 것이니 미련 같은 건 없었다.

슥.

염중부는 철혈대주에게 턱짓을 했다.

철혈대주는 즉시 염중부의 뜻을 알아차렸다.

“출발하라!”

우렁찬 목소리로 철혈대주가 외쳤다.

마부들은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짐마차를 몰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히히힝.

마차의 소음이 정문 앞을 뒤덮었다.

그 모습을 염중부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특히 영웅맹의 모든 소유를 옮기는 이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행렬이 움직인다면 당장 난리가 날 게 뻔했다.

그래서 빈 껍질이 필요했다.

금선탈각, 곧 금빛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날아가듯 천하의 이목을 집중시킬 빈 껍질인 무한 공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한 공략의 성패 따위가 염중부에게 중요할 리가 없다.

오히려 둘 다 죽어 준다면 더 좋은 일이다.

“금빛 매미라……. 훗.”

이 일에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염중부는 생각했다.

저 짐마차들 안에는 빛나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니까.

“가자.”

“네. 맹주님.”

염중부와 철혈대주는 준비된 말에 올랐다.

따각, 따각.

염중부는 느긋하게 말을 몰아 영웅맹 정문 앞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남은 삼십여 철혈대 역시 말에 올라 짐마차를 호위하듯 움직였다.

그때였다.

화륵.

마부들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정문 너머, 영웅맹 안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치는 사람도,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철혈대는 아예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고, 마부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힐끔힐끔 불길을 바라볼 뿐이었다.

따그닥. 따그닥.

화르륵.

불길이 오르는 영웅맹을 뒤로하고 오십여 대의 마차들은 침묵 속에 정문 앞을 떠났다.

그 모습은 마치 빛을 내는 커다란 짐승이 꿈틀거리며 나아가는 것 같았다.

***

영웅맹을 출발한 행렬은 순조롭게 항주를 빠져나왔다.

나중에 합류한 철혈대 칠십여 명이 더해져 행렬은 오십여 대의 짐마차와 백여 명의 무인들로 불어나 있었다.

따그닥, 따그닥.

마부들은 묵묵히 짐마차를 몰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불타고 있는 영웅맹의 모습이 이곳에서도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쯤 항주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낮에만 해도 멀쩡하던 영웅맹이 불에 타고 있는 데다, 아무도 불을 끄지 않고 있을 테니 말이다.

“엇.”

누군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말발굽 소리에 곧 묻혔지만 마부들은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화륵.

불타던 영웅맹의 한 누각이 무너지고 있었다.

멀리서도 똑똑히 알 수 있는 그 모습은 마부들에겐 여간 불길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철혈대의 살기등등한 눈빛과, 이 짐의 주인이 다름 아닌 철혈사왕 염중부라는 것도 그들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심지어 마부들은 이 행렬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각.

앞서 가던 짐마차들이 천천히 멈춰 섰다.

뒤따르던 마차들도 자연히 설 수밖에 없었다.

“워, 워.”

마부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말을 멈췄다.

아마도 앞에 장애물이라도 나타난 듯싶었다.

“뭐냐!”

행렬 중간에 있던 철혈대주가 외쳤다.

하지만 선두에서 전령이나 보고는 오지 않았다.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철혈대주에게 눈짓을 했다.

철혈대주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즉시 선두 쪽으로 말을 달렸다.

“하아!”

따가닥, 따다각.

그 뒷모습을 보며 염중부는 혀를 찼다.

“쯧. 이런 간단한 일조차…….”

말하던 염중부가 흠칫했다.

마부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륵, 털썩.

마부 한 명이 옆으로 쓰러졌다.

고삐마저 놓아 버린 그 마부는 잠에 빠져 있었다.

‘이건!’

염중부는 눈을 부릅떴다.

털썩, 털썩.

잠에 빠진 이들은 마부만이 아니었다.

말에 타고 있던 백여 명의 철혈대 역시 여기저기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타닥.

철혈대가 놓친 횃불이 길 위에 뒹굴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오직 염중부 혼자 남은 듯 섬뜩하고 괴기한 광경이었다.

이 상황이 무슨 의미인지 염중부가 모를 리 없었다.

“너 이놈! 독서어어어언!”

염중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째서 네가 날 방해하는 거냐아아아!”

귀를 울릴 듯 커다란 소리였지만 잠에서 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두로 간 철혈대주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파라라락.

허공에서 들리는 소리에 염중부는 눈을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누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탁.

깃털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선 그는 바로 독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박.

독선의 팔에 안겨 있던 운현이 땅을 디뎠다.

“결국.”

운현은 염중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되는군요.”

으드득.

염중부는 이를 악물었다.

창룡검주이자 창룡맹의 맹주인 그가, 당연히 무한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운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염중부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채로 말이다.

운현을 바라보는 염중부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운현의 시선은 그저 서늘하기만 했다.

마치 북해의 얼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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