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쉽던데?
무한의 밤은 길었다.
아니, 어쩌면 초조한 마음 탓에 더 길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영웅맹 수적과 마두 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긴 밤으로 기억될 만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 지루한 기다림도 마침내 끝이 났다.
“응? 저것!”
마두 중 한 명이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장삼채는 물론, 황산혈불과 옥면나찰도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한의 밤하늘로 길게 꼬리를 끌고 올라가는 작은 불꽃을 보았다.
“신호입니다!”
장삼채가 즉시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은 필요 없었다.
화악.
꼬리를 늘어뜨리고 솟구치던 불꽃은 곧 커다란 불빛으로 피어올랐다.
아마도 장강에서 올린 것으로 보이는 그 불빛은, 맹주 철혈사왕 염중부의 신호가 틀림없었다.
“일어나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황산혈불이 크게 외쳤다.
밤하늘에 피어난 불꽃의 폭음이 그제야 아스라이 들려왔지만 그런 건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신호가 올랐다! 진격이다!”
“오오오! 진격이다, 진격!”
“젠장, 드디어!”
백오십여 명의 수적과 십여 명의 마두 들은 각기 함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림에 지쳐 있던 그들의 얼굴은 단번에 흥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 가자아아아!”
황산혈불의 목소리가 야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으와아아아!”
수적들은 미친 듯 외치고는 말을 묶어 둔 곳으로 내달렸다.
백육십여 마리의 말을 구하는 건 매우 어렵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무리들이 말을 준비했다는 소문에 그들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을 세우려면 다른 이들보다 뒤처지면 안 되니까 말이다.
두두두두.
수적과 마두 들은 일제히 말을 타고 내달렸다.
횃불을 든 수적 둘과 길을 아는 장삼채가 가장 선두에 섰을 뿐, 진형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질주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밤길에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는 수적들을 더욱 흥분시키고 있었다.
“보입니다!”
앞서 달리던 장삼채가 크게 외쳤다.
길 저편에 불을 밝힌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어둠 속에 유독 환하게 빛나고 있는 그곳은 바로 창룡맹 임시 총단이었다.
‘됐다!’
황산혈불은 창룡맹 임시 총단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다른 무리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크하하하! 공을 세울 때가 왔도다!”
말을 몰며 황산혈불은 크게 웃었다.
“가자! 가서 죽이자!”
그의 외침에 고무된 수적과 마두 들은 더욱 힘차게 말을 달렸다.
두두두두.
불을 환하게 밝힌 저택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방에 불을 밝힌 창룡맹 임시 총단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워! 워어!”
질주해 온 백오십여 명의 수적들은 말을 멈췄다.
그러나 황산혈불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휘릭.
달리는 말 위에서 도약하는 모습을 본 수적들은 눈을 크게 떴다.
뚱뚱한 황산혈불이 새처럼 허공을 날고 있었다.
황산혈불만이 아니었다.
“호호호!”
탓.
옥면나찰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뒤이어 십여 명의 마두들이 날아올랐다.
휙, 휙.
마두들은 대부분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그러나 황산혈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파라락.
“타하!”
허공에서 몸을 한번 튼 황산혈불은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자신의 두 발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콰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 났다.
턱.
부서진 문 앞에 내려선 황산혈불은 마두와 수적 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쳐라! 모두 다 죽여!”
“우와아아아!”
수적들은 칼을 뽑으며 환호했고, 마두들은 인상을 썼다.
황산혈불이 창룡맹 임시 총단의 대문을 부수고 처음으로 쳐들어갔다는 사실이 수적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이다.
더 이상 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두들은 즉시 임시 총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앙.
십여 명의 마두들과 백오십여 명의 수적들은 위태롭게 걸려있던 부서진 문을 걷어차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황산혈불은 활짝 열린 대문에 서서 좌우로 지나가는 수적들을 지켜보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길지 않았다.
“응?”
“뭐, 뭐야?”
저택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등을 걸고 불을 피워 대낮처럼 환했지만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수적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마두들은 인상을 쓰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들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대문을 지키는 무사들도 없었다.
불을 환하게 밝혀 놓고서도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어쩐지 느낌이…….”
옥면나찰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저택 한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이다!”
마두와 수적 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황산혈불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누군가 외쳤다.
“도망치나 봅니다!”
그 말에 마두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크흐흐. 그렇군.”
“놈들이 우리를 보고 도망을…….”
황산혈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느냐! 쫓아라!”
그렇게 외친 황산혈불은 즉시 발을 굴렀다.
눈앞에서 공적이 도망가고 있는 꼴을 보아 넘길 그가 아니었다.
쉭.
황산혈불은 그 큰 덩치가 무색하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추적은 잠깐조차 지속되지 못했다.
조금 전의 요란한 소리를 낸 장본인들이 황산혈불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뭣?’
황산혈불은 와락 인상을 썼다.
칼을 빼 들고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백오십여 명의 괴한들은 바로 영웅맹의 수적들이었다.
그때 황산혈불을 발견한 수적이 놀라 소리쳤다.
“헉! 적의 습격이다! 빨리…….”
“멈춰라!”
황산혈불은 크게 외쳤다.
그리고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탁.
황산혈불의 눈에 소면호리가 보였다.
소면호리는 다른 무리를 이끄는 전대 거마였다
그들이 저택의 다른 방향으로 짓쳐들어온 것이다.
똑같이 문을 박살 내면서 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가까이 다가온 소면호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황산혈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타닥, 타닥.
나무 타는 소리만 들려올 뿐, 넓고 커다란 저택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소면호리 역시 상황을 파악한 듯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소. 게다가 다른 이들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것도…….”
황산혈불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신을 뒤따르던 마두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이곳을 나간다! 모두 주위를 경계하…….”
“하하하하하!”
문득 낭랑한 웃음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내공이 실린 그 목소리는 저택에 쳐들어온 영웅맹의 마두와 수적 들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저기다!”
누군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마두와 수적 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지붕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힘들게 찾아왔으면서 어찌 그리 빨리 돌아가려 하시오?”
펄럭.
밤바람에 화려한 옷자락을 휘날리는 그는 아주 잘생긴 귀공자였다.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마두와 수적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나, 멋진 남자네?”
옥면나찰이 간드러진 미소를 지으며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지붕에 선 청년은 풍류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창룡검주야?”
“하하하.”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매화검 영호준이오. 감히 맹주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너 이노오옴!”
황산혈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감히 공성지계 따위로 우리를 농락하느냐!”
공성지계(空城之計)는 빈 성으로 적의 오판을 유도하는 일종의 허장성세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상황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호준은 웃음을 흘렸다.
“공성지계라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먼 데서 온 불청객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했는지 아시오?”
슥.
말하던 영호준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락, 사락.
지붕 위에서 무수한 관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적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지붕 위에는 많은 사람이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군들은 하나같이 활을 들고 마두와 수적 들을 겨누고 있었다.
“헉!”
영웅맹 수적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러나 황산혈불은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그따위로 우리를 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 마라! 이제 곧 다른…….”
“오로병진이라니, 아주 웃기는 책략 아니오?”
영호준이 황산혈불의 말을 잘랐다.
“상대가 뻔히 알고 있는데도 전력을 분산하는 건 각개격파 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
영웅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관의 눈을 피해 이동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창룡맹이 이미 그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다.
“당신들 외에 다른 세 무리들은 무한에 발도 들이지 못했소. 한 번 싸움에 그대로 일패도지하고 마두들은 모조리 잡히거나 죽었으니까. 그게 바로 어제 일이오.”
말하는 영호준의 눈빛은 서늘했다.
황산혈불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짓말 마라! 그렇게 쉽게 무너질 자들이 아니…….”
“쉽던데?”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화산, 소림, 무당, 아미, 남궁세가, 모용세가의 정예와 고수 들이 나섰는데 전대 거마고 뭐고 무슨 재주로 달아날 수 있겠소?”
빙긋 웃으며 영호준은 말했다.
“덕분에 예전 무림맹 때 놓쳤던 놈들을 한꺼번에 소탕할 수 있었다오. 천하를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지.”
황산혈불은 이를 갈았다.
“노, 놈! 철혈사왕께서 오시면 결코 너희를…….”
“응? 아직 모르고 있었소?”
사뭇 의외라는 듯 영호준이 말했다.
“염중부는 오지 않소. 아니, 아예 무한 근처에도 오지 않았소. 아마 지금쯤은…….”
“헛소리 마라!”
황산혈불이 외쳤지만 영호준은 피식 웃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요.”
영호준은 고개를 돌렸다.
저벅.
관복을 입은 한 사람이 지붕 위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감찰어사 조관이었다.
스릉.
그는 수춘도를 뽑아들고 주저 없이 외쳤다.
“수적들을 쳐라!”
그의 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이 수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쉬쉬쉭.
“크아악!”
“아악!”
야습을 하려던 수적들이 방패 같은 걸 들고 있을 리가 없다.
속절없이 쓰러지는 수적들을 보며 황산혈불은 이를 갈았다.
자신과 다른 마두들이 나선다면 지붕 위의 관군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영호준이 말한 거대 문파의 고수들이 나온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무엇보다 적은 이미 습격을 알고 대비를 마쳤다.
이곳이 함정이라는 것을 안 이상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순식간에 생각을 마친 황산혈불은 크게 외쳤다.
“이곳을 빠져나가라! 빨리!”
수적들은 그제야 허둥지둥 저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마두들은 이미 바깥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고, 황산혈불 역시 미련 없이 몸을 뺐다.
그러나 관군은 지붕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커억!”
“으악!”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화살이 날아왔다.
“관군이다!”
수적 한 명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완전무장을 하고 방패까지 든 수많은 관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방패병들 너머로 화살이 쉬지 않고 날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가의 무복을 입은 무사들도, 승려와 도사의 복식을 한 이들도 보였다.
그들은 영호준이 말한 소림과 무당, 화산, 아미, 남궁세가, 모용세가의 정예와 고수 들이 분명했다.
으득.
황산혈불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크아아악! 네놈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
파라라락.
황산혈불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의 성명절기인 혈공이 시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 겁을 먹는 관군이나 무인 들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