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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79화 (379/530)

379화. 제갈세가의 선택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제갈기호를 바라보았다.

제갈기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조금 전, 운현은 제갈세가가 창룡맹에 가맹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해일문과 같은 상황에 놓인 제갈세가가 결국은 마찬가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북해일문과 제갈세가는 크게 다르다.

가진 바 무력과 영향력은 물론이고 태평맹의 핵심 세가라는 위치까지 있다.

변방의 한 문파인 북해일문과 강호 무림의 거대 세가인 제갈세가는 그 크기와 영향력에서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제갈세가가 창룡맹에 가맹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백기 투항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격적인 선택이다.

그것을 운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주님의 통찰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감탄이 나옵니다만.”

커다란 덩치의 제갈기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갈세가를 북해일문과 같이 보시는 건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제갈세가와 북해일문을 같이 본 것이 아닙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현이 말했다.

“아무리 큰 집단이라도, 예컨대 국가라 해도 그 행동 원리는 개인과 비슷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개인이 더 낫지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사람은 가끔 양심과 도덕을 따라 행하니까요. 반면 집단은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이 강호 무림이고, 또한 역사지요.”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제갈기호는 운현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 무림이야말로 힘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는 곳이니까.

“책에 그런 것도 나옵니까?”

제갈기호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역사를 살피면 대강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제갈 공자께는 재미없을 겁니다. 저야 좋아하지만요.”

“역사가 재미없는 건 저만이 아닐걸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던 제갈기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미 결론을 내려 놓으셨겠군요.”

“물론입니다.”

제갈기호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쳐다보았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창룡맹의 맹주로서, 저는 제갈세가의 가맹을 허락합니다.”

그 대답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얼굴에 긴장이 역력하던 제갈기호는 긴 숨을 내쉬었다.

“후우, 감사합니다.”

제갈기호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야 좀 살겠군요. 사실 들어올 때부터 아주 좌불안석이었거든요.”

좌불안석이라기엔 너무 편안해 보였지만 운현은 그저 미소로 넘겼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세가가 태평맹에 들어간 건 무림맹에 대한 배신 아닙니까? 운 서기님으로선……. 아, 죄송합니다. 맹주님께서 원한을 품으셨다 해도 당연한 일이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면서 원한이니 배신이니 하는 말을 대놓고 하는 제갈기호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사실 이것저것 준비해 온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만…….”

달칵.

찻잔을 들며 제갈기호가 빙긋 웃었다.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지 않아도 되었으니 참 다행입니다. 솔직히 외우기도 귀찮았거든요.”

이번 일은 제갈세가에도 명운을 건 승부였다.

그러니 준비가 소홀할 리가 없었다.

제갈세가가 창룡맹에 가져다줄 이득은 물론, 현재 강호 무림의 정세에서 제갈세가를 받아들여야 할 수많은 이유들까지.

제갈세가가 창룡맹 가맹을 위해 준비한 것은 대단히 많았다.

“아, 그렇다고 맹주님께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사락.

제갈기호는 제법 두툼한 서찰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여기 우리 세가에서 준비한 것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시지요.”

이제 와서 본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았지만, 상대의 성의를 생각해서 운현은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운현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차를 음미하던 제갈기호가 빙긋 웃었다.

“대단하지요? 저도 이런 파격적인 내용은 처음 봤습니다.”

서찰에 쓰인 내용은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협정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은밀한 정보와 제갈세가의 무력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금액의 재정과 수많은 예물들까지.

그 규모는 총군사 영호준이 다른 문파들에서 받아 낸 것들을 가볍게 넘어설 정도였다.

“혹시 따로 더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제갈기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될 겁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찰을 내려놓았다.

아마 영호준이 이걸 보면 대단히 좋아할 것 같았다.

더 받아 낼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 좋습니다만 혼사 이야기는 빼고 싶군요.”

“그건 아쉽네요. 자매를 동시에 신부로 받아들이는 건 흔치 않은 호사인데요. 예전에 황제나 영웅 들이 그랬다지요?”

역사는 싫어한다면서 그런 이야기는 또 용케 기억하고 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제갈세가는 괜찮습니까? 이번 결정으로 위신이 깎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법한데…….”

“명분이 확실한데 무슨 걱정입니까?”

제갈기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창룡맹이 든 반영웅맹의 기치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의명분이었다.

실제로는 먼저 태평맹과 다툴 것이라는 세간의 일반적인 예측을 뒤엎고, 지속적으로 영웅맹과 대적하며 무한에 임시 총단까지 세운 것도 그 명분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이대로 달리면 마차가 뒤집어질 것이 뻔히 보이는데 누가 진로를 틀지 않겠습니까? 설령 세우고 뒤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제갈세가 사람들에게 이번 결정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결단이었다.

이미 강북이 완전히 창룡맹에 넘어간 데다가, 곧 있을 수군 훈련의 의미를 제갈세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 그리고 그 서찰에 적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슥.

제갈기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님께서 원하시면, 무림맹이 무너지던 날 당문이 제안한 은밀한 거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히겠습니다.”

운현의 표정도 변했다.

이미 당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의심과 제갈세가의 증언은 그 파괴력이 전혀 다르다.

아마도 이것은 태평맹에 치명적인 일격이 될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운현이 조용히 답했다.

제갈기호는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이것으로 제 일은 끝난 셈이군요.”

커다란 체격의 제갈기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맹주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운현이 웃으며 답례했다.

제갈기호는 넉살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세가에 소식을 보내면 곧 정식 사절단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러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찻잔을 들며 운현은 말했다.

“이곳 무한에도 좋은 곳이 많습니다. 영호준 대협께 여쭤 보시면 재미있는 곳을 알려 주실 겁니다.”

“오, 그 유명하신 분을 뵙다니 영광이로군요.”

제갈기호는 눈까지 반짝였다.

잘 모르긴 해도 영호준이 무공으로 유명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재미라고 하시니 생각났는데, 요즘 염중부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려던 운현은 제갈기호를 쳐다보았다.

“이상한 짓이라니요?”

“뭐, 어차피 곧 알게 되실 테고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제갈기호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운현에게 무언가 말했다.

“음.”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였다.

달칵.

순간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아직 안 끝났냐?”

들어온 사람은 객옹이었다.

운현은 그가 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갈기호는 깜짝 놀랐다.

“곧 끝납니다. 어르신.”

아무렇지 않은 듯 운현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알았다.”

객옹은 그렇게 말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제갈기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탁.

문이 닫혔지만 제갈기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창룡맹 맹주의 집무실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저 노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분은…….”

“객옹이십니다.”

운현이 말했다.

“맹에 소속되지는 않으셨으나, 저와 개인적으로 함께 계시는 분이지요.”

“개인적이라고요?”

요컨대 사적인 관계라는 뜻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기호는 객옹이 나간 문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요?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도 굉장히 익숙하네요. 어,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용모파기 같은 데서 본 것 같…….”

기억을 더듬던 제갈기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입을 떡 벌린 채 운현을 바라보았다.

“서, 설마…….”

제갈기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갈세가의 중직자들이 강호 무림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숙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출신 문파와 무공은 물론이고 용모파기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독선은, 많은 주요 인물 중에서도 특별히 따로 분류될 정도의 최고위급에 속했다.

그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어르신께서는.”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시더군요.”

“헙.”

제갈기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덩치 큰 그의 그런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러워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남경, 번화가.

따각, 따각.

커다란 마차가 오후의 거리를 천천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사람은 수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마차에는 관의 깃발까지 펄럭이고 있어서 감히 그 앞을 가로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까지 피해 가는 건 아니었다.

히히힝!

“어이쿠!”

마차를 몰던 군병은 급히 마차를 세웠다.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다른 마차와 충돌할 뻔한 것이다.

“이런 씨앙…….”

간신히 충돌을 피한 군병은 욕을 내뱉었다.

이딴 식으로 마차를 몰다니,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쳐 올랐다.

달칵.

마부석 뒤의 작은 창이 열리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 목소리는 관철훈의 것이었다.

그는 수군도독 진림과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다.

군병은 즉시 답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마차와 부딪힐 뻔했습니다. 별일 아니니 곧 출발하겠습니다.”

“알았다.”

탁.

창이 닫혔다.

군병은 나지막이 욕을 중얼거리며 거칠게 마부석에서 내렸다.

멈춰 선 상대 마차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해? 빨리 비켜!”

윽박지르듯 군병이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건 상대방인 데다, 감히 수군도독의 마차를 막아섰으니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구구구.”

상대방 마부는 뒷목을 잡으며 마부석에서 내렸다.

그는 온갖 인상을 쓰며 군병에게 말했다.

“아니, 나으리. 이런 식으로 마차를 모시면 어쩝니까요? 앞을 보셔야지요, 앞을. 눈은 장식이신가?”

군병은 어이가 없었다.

“허!”

헛웃음을 터트린 그는 와락 인상을 썼다.

“너 이놈! 네가 감히 군의 마차를 가로막고도 그딴 헛소리를 한단 말이냐!”

그러나 마부는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군의 마차건 뭐건 간에 댁이 앞도 안 보고 튀어나오셨잖소? 그래 놓고 냅다 소리부터 지르면 어쩌란 거요?”

그건 이상한 반응이었다.

한낱 마부가, 설령 제아무리 믿는 바가 있다 해도 감히 군의 마차 앞에서 이렇듯 당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군병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다.

“뭐라고? 네가 당장 물고를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허세가 아니라는 듯 군병은 칼에 손을 가져갔다.

달칵.

“멈춰라.”

마차의 문이 열리고 관철훈이 내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군병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소란이냐?”

군병은 움찔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 그게…….”

그 순간 마부의 시선이 마차 안을 날카롭게 살피는 것을 군병은 미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관철훈은 아니었다.

금의위에 몸 담았던 관철훈은 마부의 행동이 수상함을 알아차렸다.

“너는…….”

관철훈이 무어라 말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릴 듯 한 말발굽 소리에 관철훈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대의 마차가 질주해 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두두.

또 다른 마차가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건 절대로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주군! 피하십시오!”

관철훈이 즉시 외쳤다.

그러나 두 대의 마차는 이미 지척까지 짓쳐 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으득.

미친 듯 달려드는 두 대의 마차 앞에서, 관철훈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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