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일파만파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이 죽었다는 소문은 단숨에 무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영웅맹 무한 지부는 즉시 그 소문을 부인했지만 그들 역시 두 마두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기루를 수색하려 했으나 그조차 쉽지 않았다.
어디선가 무당파 속가제자들이 나타나 영웅맹의 수적들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온갖 험한 말이 난무했지만 충돌은 없었다.
영웅맹의 수적들로서는 속가제자들을 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속가제자들도 수적들을 치거나 공격하지는 않았다.
결국 수적들은 빈손으로 지부로 돌아가야 했고,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의 행방은 그대로 묘연해지고 말았다.
영웅맹 무한 지부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무당파 속가제자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그동안 숨죽이던 크고 작은 문파들이 연일 심상치 않은 모임을 가졌다.
곧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과 함께 무한의 분위기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달칵.
“아, 그러면 이곳에 총단을 두시려는 것이군요.”
현음 진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적양자와 함께 객잔으로 찾아온 현음 진인은 운현, 영호준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옆에서 총군사 영호준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입니다. 따로 건물을 세우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군요.”
현음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찻잔을 매만지던 그가 운현에게 말했다.
“실은 이곳의 상황에 대해 본산에 알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을 받으려고 말입니다.”
그들의 본래 목적이던 두 마두는 죽었다.
그러나 창룡맹의 맹주, 운현이 이곳에 있음을 안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현음 진인과 적양자는 본산에 상황을 알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무당산에서 답이 온 것이다.
“그렇군요. 어찌하라 하시던가요?”
운현의 물음에 현음 진인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당과 창룡맹은 뜻을 같이하여 피로써 맹약하였으니, 맹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라 하시더군요.”
“무당의 속가제자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양자가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맹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언제라도 영웅맹을 몰아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제게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당은 뜻대로 행할 권한이 있으니까요.”
창룡맹은 문파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일에 운현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아닙니다.”
현음 진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님께서 아니 계신다면 모르거니와, 이곳에 계시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찌 저희가 함부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적양자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슬쩍 총군사 영호준을 돌아보았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현음 진인과 적양자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이곳 무한에서 영웅맹을 몰아내십시오. 이것이 제 뜻입니다.”
운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비록 자신의 말로 인해 피가 흐를 것은 알지만, 맹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음 진인과 적양자의 눈동자에 열기가 스쳤다.
덜컹, 덜컹.
두 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사락.
운현도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답례했다.
“두 분 모두 무사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영웅맹 무한 지부에 그들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이미 없다.
하지만 현음 진인과 적양자는 운현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좋은 소식을 가지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현음 진인은 그렇게 말하고 즉시 적양자와 함께 자리를 떴다.
무당파 속가제자들과 무한의 문파들이 이미 모여 운현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영호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무한이 아주 시끄럽겠군요.”
영호준의 말은 옳았다.
그날, 무한은 말 그대로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다.
***
콰앙.
영웅맹 무한 지부의 정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와 동시에 칼을 든 수십 명의 무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와아아아아!”
영웅맹 무한 지부의 수적들은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막아라! 죽여!”
수적들은 즉시 칼을 뽑았지만 이미 기세부터 밀리고 있었다.
채앵, 챙, 차앙.
여기저기서 칼이 번득이고 날카로운 쇳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크악!”
“으아악!”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그동안 벼르고 별러 온 문파들이 살기등등하게 짓쳐 든 데다가, 무당파 속가제자들의 무공은 한낱 수적들이 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부장을 찾아라!”
“우두머리를 잡아!”
외침과 함께 몇몇 무사들이 건물 안으로 쳐들어갔다.
“아악!”
비명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이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은 칼을 들었건 안 들었건 영웅맹 소속이다.
무사들의 칼날은 자비가 없었다.
콰장창.
방문이 부서지고 무사가 방 안으로 짓쳐 들었다.
그리고 영웅맹 무한 지부장 독비염라를 발견했다.
그는 급히 주요 서류와 은자 들을 챙기던 중이었다.
“여기 있다아! 무한 지부장 독비염라가…….”
“닥쳐라!”
독비염라는 즉시 비수를 흩뿌렸다.
그의 절기인 독비가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쉬쉬쉭.
“커억!”
소리치던 무사는 그의 독비에 목을 꿰뚫렸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무사는 아니었다.
카앙.
독비를 튕겨 낸 무당파 속가제자 고당호는 눈을 빛냈다.
어찌 그가 독비염라를 잊으랴?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의 손에 죽어 가던 동문을 비웃으며, 무당파를 모욕하던 독비염라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너, 이놈.”
으드득.
고당호는 이를 갈았다.
“드디어 내 손으로 네놈을 죽일 날이 왔구나.”
“크흐흐.”
독비염라는 조소를 흘렸다.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나?”
그는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이미 항주의 총단에 보고를 올렸다. 이제 곧 너희가 감당치 못할 전대 고수들께서 이곳으로 오겠지.”
독비염라는 원독 어린 눈빛으로 고당호를 노려보았다.
“무한은 지옥이 된다. 바로 너희가 무한을 지옥으로 만든 것이다. 크하하하.”
“헛소리!”
고당호는 독비염라의 원념어린 저주를 일갈했다.
“무한을 지옥으로 만든 건 바로 너희…….”
쉭.
독비염라의 손에서 비수가 쏘아져 나왔다.
그러나 고당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캉.
비수를 쳐 낸 고당호는 그대로 한 발을 크게 내디디며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컥!”
독비염라의 가슴에 피가 번져 갔다.
“……크흑, 개자식.”
고당호를 노려보며 독비염라는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마.”
독비염라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번득이던 눈빛이 꺼졌다.
털썩.
영웅맹 무한 지부장 독비염라는 죽었다.
원통함인지, 혹은 쌓아 온 악업 탓인지 눈조차 감지 못했다.
고당호는 그 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탁자를 검으로 내리쳤다.
콰앙.
화려한 탁자가 고당호의 검 아래 두 동강이 났다.
“이제 무한에!”
피를 토할 듯 격정적인 목소리로 고당호는 소리쳤다.
“더 이상 영웅맹은 없다!”
내력을 담은 그의 사자후는 복도를 지나 바깥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이어지는 비명과 칼부림 소리 속에 그의 외침을 들은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영웅맹 지부가 무한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항주, 영웅맹 총단 맹주전.
“지금 뭐라고 했나?”
영웅맹의 맹주, 철혈사왕 염중부가 물었다.
수하는 덜덜 떨며 답했다.
“무, 무한 지부가 무너졌습니다. 지부장 독비염라가 죽고 부지부장과 일부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으득.
염중부가 이를 악무는 것을 본 수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불호령이 머리 위로 떨어질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염중부의 불벼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수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염중부의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고함도, 분노도 터트리지 않았다.
영웅맹의 주요 지부들 중 하나인 무한 지부가 무너졌는데도 말이다.
“……어, 어떻게 할까요?”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한은 주요 거점이다.”
염중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가득한 분노를 수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무한은 우리 것이다. 우리 영웅맹의 것이란 말이다.”
으득.
염중부가 이를 갈았다.
“자기 것을 뺏기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러고도 남들이 우리 영웅맹을 두려워하길 바라나?”
염중부의 눈빛은 불타오르는 듯했다.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을 죽인 자들이 무당의 고수들이라 했나?”
“그, 그렇습니다.”
“열 명을 보내라.”
수하는 흠칫 눈을 들었다.
염중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 항주에 있는 마두들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난 열 명을 보내 무당의 고수들을 쳐 죽이고 무한을 되찾아라.”
그건 무당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말과 같았다.
수하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염중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지부에 연락해서 전 인원을 끌고 무한으로 가라 명해라.”
“네?”
수하조차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염중부는 단호했다.
“못 들었나? 모든 지부의, 전 인원을 무한에 모으란 말이다.”
수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이 일에 영웅맹의 존망을 걸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장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허나 그리되면 관이…….”
제일 큰 염려는 바로 관이었다.
그 많은 수적들이 움직이면 관이 나설 것은 자명했다.
지금처럼 지역 관청에 돈을 찔러 주는 것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마찬가지다.”
염중부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군 훈련이 시작되면 영웅맹은 끝이다.
움직인다면 차라리 지금 움직여야 했다.
“무한을 빼앗기고 나면 그다음은 어디가 될 것 같나? 중경? 합비?”
염중부는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 모든 지부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다들 도망가기 바쁠 테니까.”
영웅맹은 본질적으로 수적과 녹림 집단이다.
의리가 있을 리 없고 신의가 지켜질 리 만무하다.
폭력과 이익 관계로만 이루어진 모래성, 그것이 바로 영웅맹이다.
물론 그래도 아무 문제는 없었다.
창룡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만일 영웅맹이 무한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게다가 수군 훈련까지 시작되면 모든 지부는 각자 살아남을 길을 찾을 것이다.
한순간에 영웅맹이 무너지는 것이다.
으드득.
이를 갈며 염중부가 말했다.
“감히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그 짙은 살기에 수하는 몸을 떨었다.
이것은 그저 감정에 휩쓸린 분노가 아니었다.
냉철한 계산과 치밀한 생각 끝에 선택된, 유일한 방책인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명하신 대로…….”
“수군도독의 행적은 파악했나?”
“네? 네. 파악했습니다.”
수하는 즉시 얇은 서찰을 받들어 올렸다.
염중부는 서찰을 펼쳤다.
바스락.
눈을 빛내며 염중부는 서찰의 내용을 살폈다.
그곳에는 수군도독 진림에 대한 신상은 물론 평소의 습관과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훗.”
염중부는 조소를 흘렸다.
“돼지 새끼 같은 놈이로군. 처먹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 주지 않다니…….”
슥.
염중부는 고개를 들어 수하를 바라보았다.
“나가서 철혈대주를 들라 해라.”
철혈대는 맹주 직속의 무력집단이다.
수하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염중부가 물었다.
“내가 따로 시킨 건 잘되고 있겠지?”
“네? 아, 네. 명하신 대로 은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절대 발설하지 마라.”
차가운 눈빛으로 수하를 노려보며 염중부는 말했다.
“널 죽이고 또 새로 사람을 뽑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니까.”
순간 수하는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파랗게 질린 그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봐.”
염중부의 말에 수하는 뒷걸음으로 허둥지둥 맹주전을 나갔다.
그 탓에 무한에서 잠시 이상한 소문이, 두 거마를 죽인 사람은 무당의 고수가 아니라 문사 차림의 청년이었다는 말이 잠깐 돌았다는 사실은 미처 보고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