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구제(驅除)
화설 앞에 나선 사람은 운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운현의 모습에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화설이 막 옷자락을 풀려던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불쾌감은 더욱 컸다.
“넌 뭐야?”
귀면마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디서 빌어먹을 개자식이 어르신들의 흥취를 방해하는 거냐?”
흉측한 얼굴을 가진 그가 인상을 쓰자 그 모습이 더욱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운현은 말없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악사들은 악기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멀리 칠현금이 나뒹굴고 있었고, 예기로 보이는 여인은 찢어진 앞섶을 부여잡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운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예기의 찢어진 입술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육시랄 놈이 사지가 뜯겨 나가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귀면마존은 운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르신이 묻지 않냐? 대답 안 해?”
당장이라도 손을 쓸 듯, 귀면마존이 윽박질렀다.
하지만 음산살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운현을 살펴보고 있었다.
운현이 검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음.’
음산살귀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애매했다.
무인 특유의 외모는 애초부터 아니었다.
운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조용한 문사 그 자체였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특별한 기세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데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치 상대가 맞받아치지 않고 슬쩍 피해 버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도가나 불가 특유의 느낌마저 풍겼다.
“소, 손님.”
화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운현에게 말했다.
“여기는 손님께서 나서실 곳이 아닙니다. 어서 이곳을…….”
“이자들은.”
운현의 목소리가 화설의 말을 끊었다.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를 바라보며 운현은 화설에게 물었다.
“영웅맹입니까?”
화설이 흠칫했다.
“크하하하.”
귀면마존이 광소를 터트렸다.
“놈, 그래도 영웅맹은 알고 있는가 보구나.”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귀면마존이 말했다.
“허나 영웅맹은 알면서 우리는 모르더냐? 우리가 바로 귀면마존과 음산살귀시니라.”
귀면마존은 턱을 치켜들며 눈을 빛냈다.
허나 그 역시 앞에 서 있는 운현을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괴의 감이 무언가 이상함을 알려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단번에 쳐 죽였을 것이다.
“역시 영웅맹이군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객옹이 아니라 운현이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영웅맹과 마주치면 모습을 감추겠다’고 객옹은 이미 운현에게 말했었다.
객옹은 여전히 화산지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너.”
음산살귀가 문득 말했다.
“소림의 속가제자냐?”
운현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명목상이나마 운현은 소림의 속가제자다.
본의 아니게 와불 선사의 제자이자 신승의 사제로 알려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운현과 와불 선사, 신승의 인연은 그런 호칭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큭큭큭.”
음산살귀는 웃음을 흘렸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방금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아무래도 협객행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소림 본산의 고수라면 또 모를까, 속가제자 정도는 무서울 것이 없다.
덜컹.
음산살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하도 사람을 안 죽여서 몸이 찌뿌드드하던 참이다.”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 음산살귀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네놈의 뼈를 부수고 살점을 뜯어 기분을 달래야겠구나.”
슥.
어느새 그의 손가락에는 날카로운 가짜 손톱인 독조가 끼워져 있었다.
귀면마존 역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운현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운현의 검, 미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귀면마존도, 음산살귀도 눈빛이 변했다.
그러나 그건 경계가 아니라 탐욕의 눈빛이었다.
“클클. 이놈, 검 하나는 아주 끝내주는 걸 가지고 있구나.”
“그러면 뭐하겠나? 어차피 곧 우리 것이…….”
말하던 음산살귀가 흠칫했다.
그건 귀면마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시벌 이게 뭐지?”
귀면마존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운현 뒤쪽을 향해 있었다.
“이것들이 술에 뭘 탔나? 뭔가 시벌, 보이지 말아야 할 게 보이는 것 같은데?”
전대 거마인 귀면마존마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눈에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씨, 씨앙…….”
음산살귀는 이를 악물며 신음처럼 욕을 내뱉었다.
그 역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부정하고 싶었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자, 정사대전 당시부터 이미 공포의 대명사인 독선이 어째서 그들 앞에 있단 말인가?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지 오래되었다던 그를 대도시인 무한 한복판에서, 그것도 기루에서 만난다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음산살귀의 손은 이미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고개를 돌린 운현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래층에 서 있던 객옹이 올라온 것이다.
주위를 슥 돌아본 객옹은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를 바라보았다.
“구제를 게을리하면.”
구제(驅除)는 해충이나 유해 짐승들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두 명의 전대 거마를 지긋이 쳐다보며 객옹은 말했다.
“집이 더러워지는 법이지.”
탓.
귀면마존과 음산살귀의 행동은 빨랐다.
그들은 객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콰장창.
“꺄악!”
상이 엎어지고 예향이 비명을 질렀다.
이곳이 오 층이라는 사실도 아랑곳없이,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는 창문을 향해 주저않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이미 무의미했다.
딱.
“컥!”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두 거마가 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뛰쳐나간 기세가 무색하게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콰당, 쿵.
순간적인 판단도, 재빠른 반응도 모두가 허사였다.
객옹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들의 목숨은 이미 객옹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꺼억, 꺽.”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눈을 까뒤집고 침을 흘리며 그들은 미친 듯이 자신의 목과 가슴을 할퀴어 댔다.
두 거마의 얼굴과 가슴이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경련하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조차 곧 멈추고 말았다.
털썩.
귀면마존과 음산살귀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조금 전의 그 난폭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두 거마가 혀를 내민 채 죽어 버린 것이다.
스륵.
객옹은 손을 내리고 뒷짐을 졌다.
화설도, 예향도, 그리고 악사들도 놀란 눈으로 객옹과 운현을 쳐다보았다.
분명 무언가 한 것 같긴 한데 뭘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면마존과 음산살귀가 죽일 듯 윽박지르는 상황에서 객옹의 손을 보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보았다 해도 손을 튕기는 것만으로 전대 거마가 둘이나 죽는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뭔가 했다면 차라리 검을 빼 든, 물론 그것뿐이긴 했지만, 운현이 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스릉.
운현이 검을 거뒀다.
그리고 객옹에게 물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그건 영웅맹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해도 괜찮겠느냐는 뜻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겐 그저 어르신이 놀라실까 봐 걱정하는 말로 보였지만 말이다.
“상관없다.”
객옹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도 모르면 없던 일이 되는 법이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싶어 악사들을 돌아보았지만 객옹이 손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운현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검은 운현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운현은 문득 예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운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운현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중년 여인, 화설이 객옹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객옹을 바라보던 화설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운현이 빙긋 웃었다.
슥.
운현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아!”
화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화설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치욕의 순간을 넘겼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이 된 것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바로 그때였다.
“음.”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운현도 마찬가지였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놈드을!”
커다란 외침과 함께 십여 명이 넘는 무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눈빛이 강렬하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들은 이미 손에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탁탁탁.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진을 펼치듯 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섰다.
“네놈들의 악행을 드디어 벌할 때가 왔다!”
마치 사자후를 터트리듯 한 무사가 외쳤다.
검광으로 번뜩이는 그들의 눈빛은, 죽음마저 각오한 듯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장 무릎을 꿇고…….”
크게 외치던 무사가 흠칫했다.
결의로 눈을 빛내던 다른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를 향하고 있었다.
“어?”
누군가 어이없는 듯 소리를 흘렸다.
“……죽었어?”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당파 속가제자를 열이나 넘게 죽였던 영웅맹의 거마, 귀면마존과 음산살귀가 죽어 나자빠져 있는 것이다.
상상조차 못 하던 광경에 그들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곳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화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무사들은 그녀도 익히 아는 이들이었다.
바로 무한의 무당파 속가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저벅.
두 사람의 도사가 들어섰다.
검과 불진을 들고 도복을 펄럭이며 들어서는 그들의 기세는 사뭇 대단했다.
저벅, 저벅.
슥.
그들이 들어서자 모든 속가제자들이 검을 맞잡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무슨 일인가? 어째서 검을 내리고 있지?”
두 도사 중 한 사람, 적양자가 말했다.
그는 무당파 속가제자들이 요청한 본산의 고수였다.
무당이 창룡맹에 가맹했다는 소식을 가장 기뻐한 이들은 바로 속가제자들이었다.
속가제자들은 즉시 무당에 고수를 보내 줄 것을 청했고, 무한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던 검파의 장로들은 두 사람을 무한으로 보냈다.
바로 현음 진인과 적양자였다.
제아무리 귀면마존과 음산살귀가 할지라도, 무당파 본산의 고수인 현음 진인과 적양자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두 마두가 이미 도망쳤나?”
“아닙니다. 저기, 그것이…….”
속가제자 중 한 명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눈을 돌리던 현음 진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여전히 당황한 어조로 속가제자가 말했다.
“저자들이 바로 귀면마존과 음산살귀입니다.”
“뭐라고?”
적양자가 즉시 쓰러진 두 거마에게 다가섰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 적양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신중하게 그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죽었군.”
“으음, 이게 대체…….”
현음 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귀면마존과 음산살귀가 이곳 기루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조금 전이다.
영웅맹 무한 지부의 수적들 전부를 상대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기에, 두 고수와 속가제자들은 먼저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를 처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장한 결의를 품고 쳐들어온 결과 발견한 것이 두 거마의 죽은 모습이라니.
일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의심스러운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누가…….”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설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허락도 없이, 게다가 검까지 들고 기루에 난입하다니요. 아무리 무당의 분들이시라 해도 이런 무례가 어디에 있나요?”
그녀의 항의는 정당했다.
현음 진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미안하오. 허나 이 일은…….”
말하던 현음 진인이 멈칫했다.
죽은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를 살피던 적양자도 눈을 들었다.
“허엇!”
적양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맹주님!”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 채 서 있는 문사 차림의 청년, 그는 바로 창룡맹의 맹주이자 창룡검주인 운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