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무한에서 생긴 일
호북성, 무한.
무한에 도착한 운현 일행은 숙소를 정한 후 황학루에 올랐다.
영호준의 추천이 있었던 데다, 옛 시(詩)로도 유명한 황학루는 운현 역시 꼭 가고 싶던 곳이었다.
쏴아아아.
“우와, 시원하네요.”
황학루에서 담소하는 그제야 살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왜 황학루를 그리도 칭송하나 했더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서 그런 건가 봐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황학루에 오르니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층마다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조금씩 다른 것도, 가장 높은 층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장강의 모습도 무척이나 좋았다.
감찰어사 조관과 객옹도 이곳이 마음에 드는 듯 눈빛이 부드러웠다.
영호준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 나지막이 시를 읊기도 했는데, 그 모습에 나들이 온 몇몇 아가씨들이 눈을 빼앗기기도 했다.
“해가 지는군요.”
문득 영호준이 말했다.
석양이 물드는 장강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붉게 물드는 하늘과 장강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후우.”
영호준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매력적인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이라도 생긴다면 단번에 사랑에 빠지겠는데요?”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총군사시라면 몰라도 제게 그런 일은 안 생기겠지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여인들의 시선을 끄는 영호준이라면 혹 모르지만 자신은 무리다.
“과연 그럴까요?”
영호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운현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쏴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을 느긋하게 음미하며, 운현은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무한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황학루를 내려온 후, 조관은 보고를 위해 안찰사사로 향했다.
영호준과 담소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중개인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
어째서 하필 주루에서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나중에 숙소에서 뵙지요. 아름다운 도시이니 느긋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맹주님을 지켜야 한다며 늘 같이 다니던 영호준이었지만, 객옹이 합류한 이후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긴 객옹이 있는데 영호준이 무슨 걱정을 할까?
영호준과 담소하가 마차를 타고 떠나자 남은 사람은 객옹과 운현뿐이었다.
“어디로 갈 거냐?”
황학루에서 본 석양의 정취 때문일까?
객옹 역시 무한을 돌아보고 싶은 듯했다.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했으니까.
“총군사가 추천한 음식점이 몇 군데 있으니, 그쪽으로 가 보도록 하지요.”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는 마차를 잡아탈까 했지만 느긋이 걷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가시지요.”
운현은 객옹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오색 등불이 걸려 있는 무한의 밤거리가 부드럽게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
무한의 밤거리는 개봉과 또 다른 정취가 있었다.
장강 물류의 요충지여서 그런지 온갖 다양한 식재료로 만든 길거리 음식이 사방에서 운현과 객옹을 유혹했다.
운현과 객옹은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긋한 여유를 만끽했다.
그때 문득 객옹이 말했다.
“저기.”
운현은 객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높은 누각이 오색 등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풍경이 제법 좋을 것 같구나.”
그 누각은 아마도 주루거나 다루인 듯 보였다.
석양으로 물든 장강이 여전히 인상에 남아 있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의 야경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가 볼까요?”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객옹은 누각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촤락.
길게 늘어뜨린 오색의 주렴을 걷으며 운현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순간 흠칫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화려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반겼다.
하지만 운현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오색 등을 밝힌 이곳은 주루도, 다루도 아닌 기루였다.
모든 층이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는 데다가, 여인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기녀들이 웃음과 재주를 파는 곳이 분명했다.
“저는 화설이라고 해요. 두 분 모두 이곳은 처음이시지요?”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며 화설이 말했다.
“아, 저기 저희는…….”
잘못 들어왔다고 말하려는데, 객옹이 문득 말했다.
“장강이 잘 보이는 곳이 어디냐?”
“그야 당연히 가장 높은 층이지요.”
화설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선객이 있으시네요. 그곳은 층 전체가 하나의 방이라 다른 분을 더 모실 수가 없답니다.”
슥.
객옹은 고개를 들었다.
누각은 가운데가 비어 있는 건축 양식이라 천장이 상당히 높았다.
객옹은 잠시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로 아래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요. 그곳에서 보는 야경도 아주 아름답지요. 우리 아이들의 재주를 보시기엔 참 좋은…….”
화설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잇던 때였다.
“문제가 생긴 것 같군.”
객옹이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집중하니 확실히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와는 전혀 다른, 앳되고 가느다란 비명이 말이다.
운현의 안색이 굳었다.
탁탁탁.
“크, 큰일입니다.”
안쪽에서 하인이 급히 뛰어왔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화설에게 말했다.
“손님들께서 예향이를…….”
화설의 안색이 변했다.
예향이라면 최고층에 들여보낸 예기다.
“예향이가 왜?”
“그게, 손님들이 예향이의 뺨을 치고 오, 옷을 찢었습니다.”
화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은 웃음과 재주를 파는 곳이다.
기녀에게 손을 댔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옷을 찢는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된다.
‘하필이면…….’
화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최고층의 손님은 절대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는 이들이었다.
아니, 무한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을 거스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대로 예기의 위급을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화설이 근처에 있던 다른 여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분들 좀 안내해 드리겠어?”
“네, 알겠습니다.”
여인은 즉시 고개를 숙여 화월의 명을 받들었다.
화설은 운현과 객옹에게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사락.
고개를 든 화설이 돌아섰다.
그리고 하인과 함께 급히 걸음을 옮겼다.
객옹과 운현은 그런 화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손님들. 이리로…….”
다른 여인이 그들을 안내하려는데 문득 객옹이 말했다.
“선객이라면 상관치 않겠다만.”
저벅.
발을 옮기며 객옹이 말했다.
“내 집 주변을 더럽히는 쥐새끼들이라면 내쫓아야겠지.”
‘내 집’이라는 표현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무한에 임시 총단을 차릴 참이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객옹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화설과 하인은 이미 이 층을 지나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같이 가시지요.”
운현은 객옹의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혹여 뒤처질까 싶은 운현은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
무림맹이 무너지기 전, 무한에서 무당파 속가제자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각기 소속된 문파나 무관은 다르더라도 무당의 자부심으로 뭉친 그들은 동문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분쟁은 무당의 속가제자들이 나섰다는 소문만으로도 정리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무림맹이 무너지고 영웅맹이 장강을 장악하면서 모든 것은 바뀌어 버렸다.
그 중심에 바로 귀면마존과 음산살귀가 있었다.
“크하하하! 뭐 하는 거냐?”
귀면마존이 술잔을 들고 크게 웃었다.
명호처럼 흉측한 얼굴을 가진 그는 악사들을 향해 즐거운 듯 소리쳤다.
“노래를 불러라! 악기를 울려! 이렇게 즐거운 때에 노래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하하하하!”
그러나 악사들은 겁에 질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사람도 있었다.
바로 앞에서 눈 뜨고 못 볼 꼴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발…….”
이곳의 기녀, 예향이 두 손으로 찢어진 앞섶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녀의 뺨에는 손찌검을 당한 자국이 역력했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성스레 단장한 머리와 장신구는 이미 흐트러져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녀의 자랑이던 칠현금도 저편에 나뒹굴고 있었다.
“크흐흐. 누가 죽인다더냐?”
음산살귀가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새의 발톱처럼 웅크린 그의 손에는 예향의 찢어진 옷자락이 쥐여 있었다.
“본좌께서 널 예뻐해 주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
귀면마존과 음산살귀는 전대 거마였다.
두 사람 모두 중년의 나이처럼 보이지만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호의 노괴였다.
온갖 악행으로 무림맹의 척살 대상까지 되었던,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들이 이곳 무한에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음산살귀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예향의 앞섶 사이로 드러난 뽀얀 가슴을 바라보았다.
“아!”
예향이 흠칫 어깨를 떨며 찢어진 앞섶을 끌어당겼다.
절망적인 시선으로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도움의 손길 같은 건 없었다.
“소용없느니라.”
음산살귀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감히 본좌의 뜻을 거스를 자는 이 무한에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크크크.”
극악무도하고 성격조차 지저분한 그들이었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무당 본산의 고수라면 모를까, 속가제자들로서는 음산살귀와 귀면마존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두 전대 거마의 손에 죽어 나간 속가제자들의 수가 열을 넘어가자 결국 무당파 속가제자들도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무당이 제자들의 산문 출입을 금하는 사이, 무한이 두 전대 거마와 영웅맹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이다.
“연주 안 해?”
귀면마존이 악사들을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순간 뻗어 오는 기세에 악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급히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연주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끼잉, 끼이잉.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음산살귀는 예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어서 이리로…….”
당장이라도 실신할 듯 예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바로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화설이 들어섰다.
예향을 희롱하던 음산살귀도, 악사들을 괴롭히던 귀면마존도 고개를 돌렸다.
“뭐야? 기분 잡치게.”
귀면마존이 인상을 썼다.
음산살귀 역시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꺼져라. 네년은 부른 적 없다.”
그의 목소리는 살벌했다.
화설은 떨리는 손을 마주 쥐며 웃음을 머금었다.
“두 분의 흥취를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미소를 머금은 채 화설이 말했다.
“허나 예향은 남자를 기쁘게 할 줄 모르는 아이입니다. 두 분을 즐겁게 해 드리기에는 부족하지요.”
“흥!”
귀면마존은 코웃음을 쳤다.
“누구 마음대로 네가 그런 걸 결정한단 말이냐?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래서?”
음산살귀가 흥미를 나타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화설에게 말했다.
“우리가 즐길 만한 아이가 따로 있다는 말이렷다?”
“물론이지요.”
화설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말 한마디에 여럿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색이 뛰어나고 남자를 즐겁게 할 줄 아는 아이들입니다. 지금 바로…….”
“벗어라.”
갑작스러운 말에 화설이 멈칫했다.
그러나 음산살귀는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화설을 쳐다보며 말했다.
“벗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그러면 네 말대로 해 주마.”
“후후후.”
화설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 같은 건 보셔도 그리…….”
“내가.”
음산살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장난하는 것 같아?”
순간 화설은 깨달았다.
설령 화설이 옷을 벗는다 해도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화설에게 치욕을 주고, 그것을 즐기려는 것뿐이다.
노골적인 그 의도가 음산살귀의 눈빛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화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화설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에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누군가 그녀 앞으로 나섰다.
뒷모습뿐이었지만 화설은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처음 보았던 두 손님, 그중에서도 유난히 조용해 보이던 문사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