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결심(決心)
운현은 놀란 눈으로 심야의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검고 긴 너울로 허리까지 가렸지만, 너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분명 대궁주였다.
“들어가도 될까요?”
차가운 목소리로 대궁주가 말했다.
“아, 네.”
운현은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자박.
빙설과 대궁주가 운현의 방으로 들어왔다.
얇은 너울이 운현의 눈앞을 일렁이며 지나갔다.
달칵.
운현은 문을 닫았다.
방에 들어온 대궁주는 객옹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다시 뵙는군요.”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북해에는 저런 아이가 많으냐?”
객옹이 지칭한 상대는 바로 빙설이었다.
“빙설은 북해십이비의 한 사람입니다.”
대궁주가 조용하게 답했다.
“오직 북해를 위한 힘이지요.”
“흐음.”
객옹은 빙설을 쳐다보았다.
빙설 역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혹 분위기가 험해질까 싶은 운현이 얼른 말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그러나 빙설도, 대궁주도 앉지 않았다.
사락.
대궁주는 몸을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요.”
얇은 너울 너머로 그녀의 눈동자가 빛났다.
“당신과 나, 두 사람만요.”
운현은 살짝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밖으로…….”
“그럴 필요 없다.”
달칵.
객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었으니 나는 가서 자겠다.”
운현이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객옹은 방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달칵.
운현이 얼른 예를 표했지만 객옹은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객옹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운현이 문을 닫으려는데, 문득 대궁주가 말했다.
“빙설.”
빙설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운현에게도 예를 표한 후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자박.
작은 소리와 함께 빙설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운현은 천천히 문을 닫았다.
탁.
이제 대궁주와 운현, 둘만 남았다.
사락.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대궁주가 검은 너울을 걷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너울이었지만, 한쪽이 열려 있어서 검은 흑립을 벗자 대궁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주위가 환해지는 듯했다.
“……앉을게요.”
대궁주의 목소리에 운현이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운현은 얼른 탁자에 놓여 있던 찻잔을 치웠다.
불 위에 얹어 놓은 따뜻한 물이 있어서 새로 차를 우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사이, 자리에 앉은 대궁주는 운현의 방을 돌아보았다.
사실 여기 머문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운현의 방이라 할 만한 특색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달칵.
운현이 대궁주 앞에 새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차향이 주위로 번져 갔다.
다도(茶道)에는 귀한 손님을 위한 예절들이 있다는데, 운현은 그런 걸 알지 못해 그저 튀지 않도록 조심스레 따라 줄 뿐이었다.
“향이 좋군요.”
찻잔에 손을 가져가며 대궁주가 말했다.
“모용세가의 것인가요?”
“아닙니다.”
운현이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제가 따로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객옹 어르신께서 차를 좋아하시고…….”
찻잔을 쥐며 운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신승께서 주신 찻잎 주머니가 있어서요.”
차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신승의 기억 때문이다.
비록 그가 준 찻잎은 숭산에 뿌렸지만 작은 삼베 주머니는 여전히 운현의 품에 있었다.
찻잎의 향이 어쩐지 위안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군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궁주가 말했다.
사락.
그녀는 가만히 차를 음미했다.
운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를 마시는 대궁주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분위기가 이전과 아주 달랐다.
특유의 말투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겉으로만 미소를 짓던 며칠 전보다는 훨씬 보기가 좋았다.
슥.
입술에서 찻잔을 뗀 대궁주가 문득 운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보시죠?”
상대를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다.
운현은 급히 시선을 내렸다.
“아, 죄송합니다.”
당황한 운현은 얼른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때 대궁주가 급히 말했다.
“조심하세요.”
운현이 멈칫 눈을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대궁주가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델 것 같아서…….”
운현은 멍하니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경고가 없었더라면 확실히 뜨거운 차를 무작정 들이켜다 입천장을 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크흠.”
대궁주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먼저,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운현은 긴장했다.
역시 그녀가 아무런 목적 없이 올 리가 없었다.
“북해일문의 창룡맹 가맹에 대해서 결정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는 북해일문의…….”
“잠깐만요.”
대궁주가 손을 들어 운현의 말을 막았다.
“그것이면 충분해요.”
“네?”
운현이 반문하자 대궁주는 손을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 할 말은 그 결정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도 아니고, 그 결정 때문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말의 의미를 운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할 말은 가맹을 허락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가맹이 허락되거나 거절되어서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창룡맹과 전혀 무관한…….”
“압니다.”
운현의 목소리에 대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운현은 입술에 찻잔을 조심스레 가져가며 말했다.
“무언가 다른 일이 연관되면 소, 아니 대궁주님께선 항상 화를 내셨으니까요.”
“……제가요?”
운현은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네.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대궁주는 가만히 운현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군요.”
어차피 그에게는 처음부터 통하지 않았다.
감췄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착각, 혹은 소망이었을 뿐이다.
“후.”
대궁주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더 이상 주저할 것은 없었다.
이미 그녀 스스로 마음을 정했으니까 말이다.
“단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요.”
대궁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이후로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은 마치 분노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걸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대궁주가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의 뜻을 따르겠어요.”
결연한 눈빛으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북해일문의 현판을 내리라면 그렇게 하지요. 북해로 돌아가라면 돌아가겠어요. 당신이 내게 무엇을 원하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대궁주가 말했다.
“그대로 따르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대궁주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운현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대궁주를 바라보며 운현은 물었다.
“제가 푸른 늑대라서인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달칵.
대궁주는 시선을 내리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다만 이것이 내가 선택한 답일 뿐이에요.”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
운현이 계속 행방불명이었다면 모르거니와, 자신의 건재를 온 천하에 알린 순간부터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쪽을 정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대족장과 원로들조차 북해의 푸른 늑대만은 경외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엄청난 후폭풍이 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그녀 자신이 감당하고 처리해야 할 문제다.
“그러니 이제 말씀하시지요.”
운현을 바라보며 대궁주가 말했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는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운현은 오히려 웃음을 머금었다.
대궁주의 눈썹이 바로 일그러졌다.
“왜요?”
“아니,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대궁주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왜 웃었어요?”
운현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순간 대궁주의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는 건 말이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했다.
“우선 저도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궁주의 눈이 반짝였다.
“뭐죠?”
“제 결정은 조금 전 당신의 말 때문에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제 결정은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건 대궁주가 아까 한 말과 같은 의미였다.
운현의 결정은 대궁주의 말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원하시면 객옹 어르신께 확인하셔도…….”
“믿어요. 아니…….”
대궁주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알아요.”
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그의 진심을 아는 것은 대궁주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운현은 항상 그녀에게 진심이었으니까.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창룡맹의 맹주로서 저는 북해일문의 가맹을 허락합니다.”
대궁주를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북해일문은, 다른 창룡맹의 문파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길을 정하십시오.”
그 말에 대궁주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운현의 말은 그녀에게도, 그리고 북해일문과 북해에도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네.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일문은 강호 무림의 한 문파에 불과합니다. 황법을 지키고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막을 이유가 없지요.”
대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이민족이라며 싫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아닙니다.”
찻잔을 들어 올리며 운현이 말했다.
“그저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언어와 문화가 생소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모든 사람이 온갖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되겠지요.”
운현은 대궁주를 향해 빙긋 웃었다.
“사실 저도 따지고 보면 정통 중원 출신은 아니거든요. 아니, 오히려 이민족에 가까우려나요?”
그의 본가가 있는 광동성 광주는 대륙의 남쪽 끝이다.
역사적으로 중원이었던 하남성 사람들이 보자면 이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리석은 이유로 싸우고 분열하면 결과는 파멸뿐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는 자들입니다.”
“……이상적이군요.”
침묵하던 대궁주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저는 좋네요.”
그녀의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운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특별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락.
대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어요.”
“아니, 저기…….”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대궁주는 거절했다.
“이미 밤이 깊었어요. 제가 찾아온 것 자체가 큰 실례였어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운현은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대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빙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빙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궁주는 흑립을 쓰고 너울을 둘렀다.
사락.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검은 너울 뒤로 모습을 감췄다.
“언제든 찾아오세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궁주가 말했다.
“기쁘게 맞이하겠어요.”
“감사합니다.”
너울 너머에서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대궁주는 밖으로 나섰다.
자박.
빙설이 대궁주의 어깨를 감싸는가 싶더니, 즉시 발을 굴렀다.
탁.
‘엇!’
두 사람의 모습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운현은 문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빠르게 멀어지는 기척만이 그들의 존재를 알려 줄 뿐이었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차가운 밤 바람을 느끼며, 운현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