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엇갈림
사락.
대궁주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찻잔을 쥐었다.
감싸듯 잔을 쥔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려 가만히 차를 음미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운현 때문에 대궁주는 제대로 맛을 느끼지도 못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궁주가 말했다.
“왜 웃고 계시지요?”
운현은 흠칫했다.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소, 아니 대궁주님을 만난 게 기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찻잔을 쥐고 있던 대궁주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시군요. 저도 기뻐요.”
운현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녀가 말했다.
“위명이 자자하신 창룡맹의 맹주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서요.”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도전적이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긴장이 조성될 듯한 상황이었지만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기쁘신 것 같아서 저도 다행입니다.”
대궁주의 고운 눈썹이 가늘게 경련했다.
하지만 운현은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개봉의 명주와 고급스러운 요리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지만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옆에 앉은 객옹 역시 무심하게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북해는 어떻습니까? 빙제께서는 잘 계신가요? 빙후께서는요?”
북해에서 만났던 빙제와 빙후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던 터라 안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강하세요.”
대궁주는 나지막이 답했다.
“너무 건강하셔서 탈이지요.”
무언가 감정이 담긴 듯한 말이었지만 일단 두 사람 모두 별 탈은 없는 모양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지난번 아미산에서 십이궁주를 만났습니다. 이제는 삼궁주라고 하더군요. 이곳 말도 꽤 잘하던데요? 여전히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알아요.”
대궁주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다른 사람 이야기만 할 건가요?”
대궁주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운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동자조차도 아름다웠다.
“아, 그게…….”
어색한 표정으로 운현이 물었다.
“대궁주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대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에 대해 물어보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 그렇군요.”
운현은 애꿎은 찻잔만 매만졌다.
대궁주도 기분이 나빠졌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도, 마음과는 다르게 날카롭기만 한 자신의 말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슥.
고개를 들고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궁주가 말했다.
“북해일문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운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렇군요.”
대궁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북해가 북해일문을 통해 이루려 하는 일에 대해서도 모르시겠네요.”
운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궁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모를 리가 없지요. 처음 무림맹에서 함께 신승을 뵈었을 때도, 서호에서 빙설 소저와 비무를 했을 때도, 그리고 북해에서 헤어질 때도.”
나지막이 한숨을 쉰 운현은 대궁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뿐이었으니까요.”
북해일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북해일문을 통해 북해가 이루려 하는 것이라면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북해의 오랜 숙원, 즉 검성으로 인해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고 강호 무림에 진출하는 것이다.
“그런가요?”
대궁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이미 다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더 쉽…….”
“그 방법밖에 없습니까?”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북해의 숙원은 그렇게 해야만 성취되는 것인가요?”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한에는요.”
대궁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운현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가 과거와 다르면 되겠군요.”
“네?”
대궁주가 반문했다.
“제가 역사를 좀 공부해 보았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과거에는 갈라져서 싸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과거와 현재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눈까지 빛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물론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풀리지 않은 원한은 과거를 계속 현재와 이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과거의 문제들을 외면하거나 당시엔 다 그랬다며 적반하장격으로 나오는 건 최악의…….”
“그래서요?”
대궁주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건 이상론일 뿐이에요. 그런 무의미한 대화에 버릴 시간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운현이 말했다.
“무의미하다는 그 시간이야말로, 온전히 상대를 위해서 내어주는 것이니까요.”
대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운현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두 사람만을 위한 시간.
그날 북해의 밤하늘 아래에서 들었던 북해의 파도 소리가, 그리고 운현의 목소리가 지금도 대궁주의 귓가에 생생했다.
“그런 건.”
흔들리는 마음과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녀는 냉정을 잃었다.
냉정한 계산도, 치밀한 생각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감정만이 남았다.
그래서 그만 최악의 대답을 내뱉고야 말았다.
“다른 여인과 하세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가슴에 번져 가는 아픔은 어쩔 수 없었다.
대궁주 역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진 후였다.
지금껏 애써 누르고 있던 질투와 배신감이, 이런 식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건 대답이 되지 못한다.”
문득 객옹이 말했다.
대궁주도, 운현도 고개를 돌려 객옹을 쳐다보았다.
“비록 현이가 다른 여인과 그리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너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객옹의 말은 듣기에 따라 엄청난 오해를 부를 수도 있었다.
운현은 얼른 객옹에게 말했다.
“저기, 어르신…….”
“그러니 너는 분명히 대답해라. 좋다는 거냐, 싫다는 거냐?”
“싫지 않습니다.”
의의로 대궁주는 객옹의 물음에 답했다.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대궁주의 대답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싫어요.”
말하는 대궁주의 표정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이해 못 한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고 운현도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달칵.
대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지만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대궁주는 운현과 객옹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환우오천존의 한 분과 창룡맹의 맹주님을 뵙게 되어서.”
차가운 눈빛으로 대궁주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사락.
대궁주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빙혼이 즉시 그녀를 뒤따르고 빙설도 발을 옮겼다.
“대궁주님!”
운현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대궁주는 발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돌아섰다.
운현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저는…….”
그러나 대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북해일문은 창룡맹에 가맹하겠습니다.”
“네?”
그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대궁주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맹은 전적으로 맹주님의 권한이지요? 지금 당장 결정하긴 어려우실 테니 기다리도록 하지요.”
사락.
대궁주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자박, 자박.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아 있는 사람은 운현과 눈살을 찌푸린 객옹뿐이었다.
***
따각, 따각.
개봉의 번화가를 지나는 마차 안에서 대궁주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고운 눈썹이 일그러지고 있는 것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계획을 이런 식으로 망쳐 버릴 생각도, 운현의 그런 얼굴을 보려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꾹.
대궁주는 하얀 손을 꽉 그러쥐었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자신이 이미 그의 안에서 추억이 되어 버렸을까 봐, 소림에서 그랬듯이 자신 없이도 그가 잘 지내고 있을까 무서웠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다른 주제를 끌어들이려 했다.
본래 운현을 만나려 했던 이유인, 창룡맹과 북해일문 그리고 태평맹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모두 다 망쳐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준비하던 패였다 해도…….’
창룡맹의 가맹은 결코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충동적으로 꺼내 들어선 안 됐다.
북해의 숙원이 걸린 일을 사적인 감정에 흔들려 그르치고 만 것이다.
“대궁주님.”
문득 마부석에서 빙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설영대는 어찌할까요?”
운현이 객옹과 모용세가를 떠났을 때 설영대는 그 사실을 즉시 대궁주에게 알렸다.
일행이 두 사람뿐이며, 개봉을 향했다는 것 역시 전했다.
보고를 들은 대궁주는 잠시 기다렸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이상한 놈들이 꼬여 들고, 그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지체된 사이에 운현이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잠시 생각하던 대궁주가 말했다.
“위치만 파악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빙혼이 즉시 손짓으로 설영대에게 명을 전했다.
따각, 따각.
화려한 개봉의 야경이 그녀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대궁주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 아프게 번져 가고 있었다.
***
“괜찮으냐?”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만, 괜찮지 않습니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그 아이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군요.”
사실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도 알고 있는, 함께 북해에 갔었던 독고랑에 대해서도, 신승과 독선 그리고 박 공공의 이야기도 말해 주고 싶었다.
비록 그녀가 꿈에 나온 것은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이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고민할 필요 없다.”
문득 객옹이 말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객옹은 말을 이었다.
“싫다고 했지만, 싫지 않다고도 말했으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본래 세상의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보기 나름’이라는 말은 약과 독에 통달한 객옹이라 그런지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군요.”
나지막이 한숨을 쉰 운현이 객옹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객옹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북해일문에 대해서는 어찌할 작정이냐?”
“총군사인 영호준 대협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궁주가 그저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현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라. 그리고 예물은 이것으로 해라.”
“네?”
“향을 맡아 보니 제법 귀한 약초가 들어간 것이다. 독소의 처리도 잘되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운현은 객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주루에 들어오기 전에 운현이 말했던, 모용세가의 가주에게 줄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손을 안 댔다 해도 이미 열린 술을 선물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옹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