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그녀의 초대
운현이 아직 모용세가에 있을 무렵.
대궁주가 탄 마차는 개봉의 번화가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거리는 하나 둘 오색의 등을 밝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따각, 따각.
대궁주는 무심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아니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격랑 속에서 대궁주의 마음은 냉정을 잃고 있었다.
그때였다.
번화가 한가운데 불을 밝힌 삼층 누각이 대궁주의 눈에 들어왔다.
“멈춰요.”
대궁주의 말에 빙혼이 즉시 말을 멈췄다.
“워.”
달칵.
마차가 서고 문이 열렸다.
자박.
대궁주는 빙설과 함께 내려섰다.
지나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대궁주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탁.
빙혼이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무슨 일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궁주는 ‘영화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삼층 누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하게 불을 밝힌 그곳은 주루였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지만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대궁주가 말했다.
“야경이라도 보고 가지요.”
“알겠습니다.”
빙혼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마침 앞에 서 있던 주루의 하인에게 마차를 맡기고 빙혼은 영화각으로 들어갔다.
대궁주는 묵묵히 영화각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불을 밝힌 실내,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고풍스러운 누각.
그 모습은 예전 서호에서 찾아갔던 삼담인월의 전각을 연상케 했다.
서호를 바라보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운현을 보았던 바로 그곳을 말이다.
사락.
대궁주는 영화각 안으로 발을 옮겼다.
빙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지만, 개봉의 번화가는 수많은 오색 등불들과 함께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
대궁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빙설의 어깨 너머로 운현이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라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북해의 밤하늘 아래 만났던 그날에서 조금도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슥.
대궁주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외면했다.
침묵이 흘렀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저벅.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대궁주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운현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비록 대궁주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지만, 운현은 그녀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탁.
삼 층에 올라선 운현이 멈춰 섰다.
대궁주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였다.
운현 역시 충동적으로 올라온 터라, 무어라 말을 걸어야 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이고!”
뒤에서 들린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이곳의 지배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미 아래층에서 난리가 난 것을 보고 올라온 지배인은, 삼 층에도 청년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곤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니, 대체 어쩌려고 이렇게…….”
강경하게 따지려던 지배인은 문득 객옹과 눈이 마주쳤다.
‘윽.’
지배인은 움찔했다.
언뜻 보기에도 객옹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무덤덤한 그 눈빛은 오히려 지배인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꿀꺽.
지배인은 침을 삼켰다.
위협 앞에서도 그는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는지, 혹시 아시면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그는 손까지 모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객옹은 설명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슥.
객옹이 한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잠시 말썽이 있었습니다.”
계단 끝에서 운현이 말했다.
지배인이 고개를 들어 운현을 바라보자 객옹은 손을 거뒀다.
“마, 말썽이라고요?”
“네. 사소한 오해지요. 술자리에서 늘 있는 것 말입니다.”
지배인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이 부드러운 데다 그 언행이 정중해서 차마 무어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부서진 것들은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모용세가에 머물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시면 됩니다.”
배상이라는 말에 화색이 되려던 지배인의 안색이 변했다.
“모, 모용세가라고요?”
개봉에서 모용세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꼴사납게 널브러진 청년들의 가문들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네. 그렇습…….”
“필요 없어요.”
낭랑한 목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사박, 사박.
대궁주는 빙설을 지나 운현에게 다가왔다.
운현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궁주는 계단 아래에 있는 지배인을 향해 무엇인가를 던졌다.
휙.
지배인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대궁주가 던진 것은 작은 비단 주머니였다.
“배상은 그걸로 하겠어요.”
지배인을 내려다보며 대궁주가 말했다.
주머니를 열어 본 지배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커다란 진주였다.
“아, 알겠습니다.”
지배인은 얼른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삼 층에 쓰러진 청년을 힐끗 쳐다보고 물었다.
“저기, 왕 공자님은…….”
“모르는 사람이에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궁주가 말했다.
지배인은 조금 당황했지만 모른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조처하겠습니다.”
그는 하인을 부르기 위해 아래층 계단으로 향했다.
지배인이 사라지자 대궁주가 객옹에게 물었다.
“빙혼은 어떻게 되나요?”
“이쪽의 무사 말입니다.”
운현이 얼른 말을 보탰다.
“이제 풀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놔두면 풀린다.”
객옹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빙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빙혼은 신음을 흘리더니 천천히 검을 내렸다.
움직임은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그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손쓸 사이조차 없이 제압되어 버렸으니 당연하리라.
대궁주는 객옹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객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궁주는 살짝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괜찮으시면 이곳으로 올라오시겠어요?”
객옹은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어차피 운현이 올라간 상황이라 그도 오르려던 참이었다.
그사이, 주루의 하인들이 삼 층으로 올라와 쓰러진 청년과 부서진 집기들을 치웠다.
일 층도 나름 정리가 되었는지 주루는 어느새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부드러운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삼 층으로 올라온 지배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궁주와 객옹, 운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계속해서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락.
지배인이 나가고 휘장이 닫혔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북해의 푸른 늑대께.”
대궁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빙궁의 대궁주가 예를 올립니다.”
슥.
예전처럼 무릎을 꿇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들어 올려 수평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지만, 그 모습마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빙설과 빙혼 역시 운현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그들의 예에 답했다.
고개를 든 대궁주는 객옹을 바라보았다.
“저는 빙궁의 대궁주입니다. 환우오천존의 한 분을 뵙게 되어…….”
그녀는 이미 객옹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객옹이다.”
대궁주의 말을 끊으며 객옹이 말했다.
잠시 의아해하던 대궁주는 곧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궁주가 예를 표했지만 객옹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대궁주 역시 가벼운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소궁주님.”
문득 들려온 운현의 목소리에 그녀가 멈칫했다.
사락.
대궁주가 돌아섰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궁주예요. 그리고 북해일문의 문주이기도 하지요.”
차가운 시선으로 대궁주가 말했다.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녀의 눈빛은 운현의 가슴에 싸늘하게 박혀 들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대궁주는 몸을 돌리려 했다.
운현이 얼른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대궁주가 멈칫했다.
“……왜요?”
사락.
고개를 돌려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여기 오면 안 되나요?”
그녀의 눈빛에는 사뭇 분노마저 흐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운현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반가워서요.”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나서 기쁩니다. 소궁, 아니 대궁주님.”
그건 운현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궁주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슥.
대궁주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외면했다.
운현의 말은 어쩌면 그저 의례적인 인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단순한 말에 이토록 가슴이 뛰는 건 왜일까?
아무런 미사여구조차 없는 한마디에,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 날뛰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건 어째서일까?
살짝 입술을 깨물고 나서 그녀는 운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슥.
“저도 반가워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궁주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떨리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도 어쩌면 인연일지 모르겠군요.”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궁주가 말을 이었다.
“괜찮으면 함께하시지요. 이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제법 아름답답니다.”
그녀의 말과 표정은 여유롭고 느긋했다.
하지만 운현에게는 어쩐지 뭔가를 감추는 듯 어색해 보였다.
예전 서호에서 빙설과 비무를 마친 후, 짐짓 시간을 끌던 그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제아무리 계략에 능한 대궁주라 해도 운현 자신과 객옹 앞에서 무모한 시도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운현이 대답하지 않자 대궁주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싫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운현은 얼른 대답했다.
이런 모습은 언제나의 대궁주다.
“저는 좋습니다. 어르신께서는…….”
객옹을 돌아보며 운현이 물었다.
물끄러미 운현을 바라보던 객옹이 중얼거렸다.
“……둘 정도는 상관없겠지.”
“네?”
무슨 말인지 운현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객옹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궁주가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대궁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객옹께서 함께해 주시니 영광이에요.”
그렇게 말한 대궁주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대궁주의 속셈에 객옹의 말까지, 운현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을 바라보는 대궁주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로 간 운현은 객옹 옆자리에 앉았다.
“감사드려요.”
사뭇 의례적인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비록 그 모습마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말이다.
사락.
대궁주는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운현과 바로 마주한 자리였다.
북해를 떠난 이후 태평맹 연회에서 스치듯 잠시 만났던 두 사람이, 드디어 개봉의 주루에서 마주 앉은 것이다.
운현을 바라보는 대궁주의 눈동자는 마치 눈꽃처럼 아름답고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