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없습니다
하남성, 개봉 외곽.
모용세가 인근 관도.
커다란 마차 한 대가 관도 변에 서 있었다.
마부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버려진 마차는 아니었다.
눈꽃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마차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는 그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조용히 관도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옆에 앉은 시비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사락.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백색 무복을 입은 한 사람이 마차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대궁주님.”
눈꽃처럼 아름다운 그녀, 대궁주가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빙혼, 어떻게 됐지요?”
“그는 일행과 함께 모용세가에 들어갔습니다.”
백색 무복을 입은 빙혼이 답했다.
“모용미 역시 함께입니다.”
대궁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모용미가 운현과 함께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운현이 소림사에서 그녀를 만난 사실을 설영대가 보고했기 때문이다.
은밀 행동에 훈련된 설영대라도 운현의 감각을 숨기고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초원을 내달리는 북해인의 시력은 대단히 뛰어나다.
더구나 설영대라면, 이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도 사람들의 숫자와 그들의 행동을 구분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지만 운현의 위치를 파악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빙혼이 물었다.
운현이 모용세가로 들어갔으니 관측을 통한 감시는 제한이 많아진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운현과 객옹이 상대라면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다.
대궁주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관도 저편, 모용세가가 있는 방향을 그저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빙혼이 다시 말했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면 세가 내의 상황 정도는 충분히 살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동이나 위치 현황 정도라면…….”
“그만.”
대궁주가 빙혼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날이 서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빙혼은 의아했다.
그건 지금의 계획을 철회한다는 뜻일까?
“그를 만나지 않으실 것입니까?”
대궁주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운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 역시 운현이 소림으로 갈 것을 예측했다.
그래서 대궁주는 빙설, 빙혼과 함께 적진이랄 수 있는 소림사까지 갔다.
그러나 대궁주는 소림에서 운현과 만나지 못했다.
이미 모용미가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사락.
대궁주는 하얀 손을 그러쥐며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읽는 재주를 가진 설영대의 보고는 운현과 모용미가 소림사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 주었다.
비록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담긴 친애의 정을 대궁주는 모르지 않았다.
특히나 모용미의 반응은, 같은 여자로서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다.
“대궁주님. 비록 모용세가라 해도 그가 혼자 있는 상황을 노린다면 충분히…….”
“그만하라고…….”
슥.
“말했지요?”
대궁주가 빙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용세가에서 운현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빙혼의 말대로 하려면 오늘 밤 운현의 행동을 전부 주시해야 한다.
만의 하나 운현이 모용미와 단둘이 만나기라도 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해 주는 보고를 듣고 있으라는 말인가?
대궁주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며 관도에 흙먼지가 날렸다.
대궁주는 눈을 들었다.
관도 너머, 저곳 모용세가에 운현이 있을 터였다.
“……모용세가를 감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궁주가 조용히 말했다.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따로 보고할 필요도 없어요. 그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는요.”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다.
가슴이 아픈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빙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궁주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모용세가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며 대궁주가 말했다.
“이만 떠나도록 하지요.”
빙혼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석에 올랐다.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설영대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린 후, 빙혼은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빙혼의 물음에 대궁주는 잠시 생각했다.
아직 운현을 만날 것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저 모용세가로 가는 이 길에 있고 싶지 않을 뿐.
“개봉으로.”
대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개봉은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대도시다.
빙혼은 즉시 말을 몰았다.
“하아!”
따각, 따각.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관도에 작은 먼지가 일었다.
그러나 먼지는 곧 바람에 날아가고, 텅 빈 관도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하남성, 모용세가.
운현 일행은 모용세가의 환대 속에 따뜻한 차를 음미하며 여행의 피로를 달랬다.
그 자리에서 운현은 가주 모용단천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말했다.
다른 일행은 차를 마시며 묵묵히 운현의 이야기를 들었고, 대제자 모용진과 모용미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린 모용상아는 운현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객옹 옆자리에 앉아서 붓과 종이를 가지고 무언가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으음.”
운현의 이야기를 들은 모용단천이 신음을 흘렸다.
“놀랍소. 장강 수군에 기혼단까지……. 맹주께서 참으로 큰일을 하셨소이다.”
“아닙니다. 모두가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운현은 찻잔을 감싸 쥐며 객옹과 영호준, 조관, 담소하를 돌아보았다.
객옹은 무덤덤했지만 다른 이들은 운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군 훈련이 시작되면 영웅맹이 어찌 나오리라 보시오?”
모용단천이 운현에게 물었다.
“철혈사왕 염중부는 결코 가만히 있을 자가 아니니, 반드시 무언가 하지 않겠소?”
“없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모용단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없다니, 그게 무슨…….”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핵심 인물들을 암습하는 것입니다. 무림맹에서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모용단천이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무림맹이 무너지던 그 밤, 철혈사왕과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날, 많은 문파와 세가의 수장들이 철혈사왕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을 거예요.”
모용미가 운현의 말을 받았다.
“수군 훈련을 멈추기 위해서는 과연 누구를 암습해야 할까요?”
“음.”
모용단천은 신음을 흘렸다.
수군 훈련은 수군 몇 명을 죽인다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장강 수군의 훈련을 막으려면 수군도독 진림이나, 운현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군. 확실히 수군도독이나 맹주님을 암습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겠지.”
“큰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해요.”
모용미는 단언했다.
운현을 암습하는 건 능력을 벗어나고, 수군도독을 암습했다간 그날부터 국가의 적이 되어 황군의 추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염중부가 할 수 있는 건 맹주님 말씀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어쩌면 마지막 발악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군 훈련을 막을 방법은 없다.
“혹시 일대상인의 힘을 끌어들이지는 않겠소?”
모용단천이 말했다.
무림맹이 무너지던 그날 나타났던 혈공자 문왕의 군세를 모용단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군세를 이끌었던 혈공자 문왕은 이제 없다.
게다가 일대상인이 과연 영웅맹을 도우려 할까?
운현은 부정적이었다.
“설령 그들이 나타난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장강 수군이 움직인 이상, 영웅맹이나 염중부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강호 무림을 장악했던 무림맹조차 군과 부딪히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강물과 우물물이 침범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저 무림인들의 생각일 뿐, 조정은 단 한번도 유일한 통치 권력임을 양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염중부가 순순히 항복할 리는 없겠지요.”
운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매만졌다.
“그래서 저는 두 번째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염중부가 장강을 포기하고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모용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장강을 포기한단 말이오? 허나 그는…….”
염중부는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자 영웅맹의 맹주이며 철혈사왕의 호를 가진 자다.
그가 그런 짓을 하려고 할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운현은 말했다.
“그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손해 보는 것을 광적으로 싫어하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놓인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운현이 말을 이었다.
“반드시 그것을 택하겠지요.”
그것은 철혈사왕 염중부에 대한 신승의 평이기도 했다.
모용단천은 슬쩍 객옹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객옹은 말없이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염중부가 장강을 포기한다라…….”
모용단천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수군도독이나 운현을 암습할 수밖에 없다.
운현의 검에 죽거나, 국가의 적이 되어 황군의 추격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훗.”
모용단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장강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이성적이다.
“그도 꽤나 난감하겠군.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쉽지 않으니…….”
모용단천은 말을 흐렸다.
염중부를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환우오천존의 자존심을 굽혀 가며 차지한 맹주의 자리가 이렇게 금방 몰락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기에, 오히려 많은 것들을 잃는 것이지요.”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로 중요한, 아주 소중한 것들을 말입니다.”
모용단천은 그 말에 동감했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운현의 눈빛은 무척이나 서늘했다.
“오빠, 이거요.”
모용상아가 불쑥 운현에게 말했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무언가 그려진 종이가 들려 있었다.
모용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니?”
팔락.
종이에 그려진 것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원과 선으로 된 사람들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이건…….”
운현이 그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림에는 모용상아의 가족인 모용단천과 모용진, 모용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더 그려져 있었다.
“이건 누구니?”
운현이 물었다.
모용상아는 방긋 웃었다.
“운 오빠야!”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모용미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모용상아가 그린 운현은 모용미와 모용상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현은 그림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할아버지는?”
“객옹 할아버지!”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현도 놀랐다.
“객옹 어르신?”
“응.”
모용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 저기, 꼬마 아가씨. 나는?”
영호준이 애써 웃으며 물었지만 모용상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 상아야.”
운현은 그렇게 말하고 그림을 객옹에게 건네주었다.
바스락.
객옹은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모용상아와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운현과 객옹.
다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그들은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모용세가는 운현 일행을 위해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비록 몇 사람만의 자리였지만 하남성의 유명한 요리와 진귀한 음식들이 모용세가의 정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객옹 역시 매우 흡족해 했고, 모두가 웃으며 식사를 즐겼다.
식사가 끝난 후, 총군사 영호준은 가주 모용단천, 외당 당주 모용미, 대제자 모용진과 함께 맹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집무실로 갔다.
조관과 담소하는 하남성 안찰사사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운현이 써 준 서찰을 박 공공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떠나고 갑자기 여유가 생겨 버린 운현은 객옹에게 말했다.
“혹시 따로 할 일이 있으십니까?”
“없다.”
객옹은 언제나처럼 무심히 말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운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개봉의 야경이라도 구경하러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