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중원(中原)
소림에서 내려온 일행은 모용세가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모용미는 운현과 함께 마차에 올라 일행과 인사를 나누었다.
영호준이라면 모용미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관과 담소하에 대해서는 얼굴 정도만 알 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사가 끝나고 나서, 운현은 모용미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실 객옹께서는 독선이십니다.”
“네?”
그건 너무나 난데없는 말이었다.
모용미는 운현은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바로 옆자리여서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지만, 모용미는 신경 쓰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슥.
운현은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손가락을 내리며 운현이 말했다.
모용미는 놀란 눈으로 객옹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차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모용미가 운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창룡맹과는…….”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창룡맹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저와 함께 계시는 겁니다.”
“아.”
총명한 모용미는 사정을 이해했다.
“……알겠어요.”
모용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독선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독선에게 제대로 된 예를 올리고 싶지만 사정이 그렇다면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모용미는 운현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운 학사님은 정말 여러 번 절 놀라게 하시네요.”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모용미는 다시 한번 객옹을 쳐다보았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 독선과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매화검 영호준이, 늘 지나칠 정도로 가볍던 그가 어째서 조용히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따각, 따각.
일행을 실은 마차는 모용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옆에서 빙긋이 웃고 있는 운현을 보며, 모용미는 어쩐지 올 때보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대문 앞에서 운현을 맞이했다.
“하하하. 어서 오…….”
그러나 모용단천의 인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마차를 내린 객옹이 걸어오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모용단천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할아버지.”
모용미가 얼른 말했다.
“저분은 객옹이세요.”
“뭐? 아니다, 미야. 저 사람은…….”
놀란 얼굴로 말하는 모용단천에게 모용미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객옹이세요.”
손녀의 심각한 표정에 모용단천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보았다.
“……으음.”
만일 객옹 혼자였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 운현이, 창룡검주가 함께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납득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운현은 독선과 만난 적이 있다고, 예전에 무림맹에서 말해 주지 않았던가?
가까이 다가온 객옹에게 모용단천은 예를 표했다.
슥.
“세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인 모용단천입니다.”
모용단천의 예는 정중했지만 눈빛에는 사뭇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 독선을 앞에 두고 누가 그렇지 않으랴?
그러나 정작 객옹의 반응은 이제까지와 다를 바 없었다.
“객옹이다.”
긴장하던 모용단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손녀의 말처럼 그는 독선이 아니라 객옹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환영합니다. 계시는 동안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모용단천의 표정은 한결 편해져 있었다.
“음.”
객옹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 같은 건 당연히 하지 않았다.
모용단천 역시 기대하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모용단천의 얼굴에 웃음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어서 오시오. 운 대인. 아니, 이제는 맹주님이라고 해야겠소이다. 하하하.”
모용미와 운현이 함께 온 것을 본 모용단천은 이미 모용세가의 뜻이 운현에게 전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운현은 모용단천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모용세가가 뜻을 함께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땅히 할 일이오.”
모용단천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운현과 모용미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용단천은 흡족했다.
“운 대인!”
모용세가의 대제자 모용진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모용진 대협.”
“대협이라니요, 부끄럽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나누었다.
“운 오빠!”
탁탁탁.
발소리를 내며 열심히 달려오는 작은 아이는 바로 모용상아였다.
“상아야!”
운현은 놀란 표정으로 얼른 자세를 낮췄다.
상아는 그대로 운현의 품에 폭 안겼다.
“오빠!”
운현은 모용상아를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상아야.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모용상아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무림맹 천하무림대회 때였다.
운현이 무림맹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급박하던 때여서, 모용상아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모용세가로 돌아갔었다.
“난 잘 지냈어! 오빠는?”
“나도 잘 지냈단다.”
“나 키 컸어! 이거 봐!”
운현이 보기에는 그래도 작았지만 모용상아는 사뭇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잘됐구나.”
“응! 언니만큼 클 거야!”
말하던 모용상아가 문득 객옹을 올려다보았다.
모용상아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더니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모용상아예요.”
객옹은 모용상아를 내려다보았다.
모용상아는 고개를 들고 객옹을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 할아버지 모용단천과 함께 있어서인지, 모용상아는 객옹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객옹이다.”
객옹이 말했다.
모용상아는 방긋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할아버지.”
“……그래.”
객옹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껏 보지 못한 반응이라 운현이 신기해하는데 모용단천이 웃으며 말했다.
“자, 다들 들어갑시다. 이쪽으로 오시오.”
일행은 다 함께 모용세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객옹이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모용상아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신기한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
사천성 성도, 태평맹 총단.
쾅.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은 서탁을 내리쳤다.
손에 들려 있던 서찰이 와락 구겨졌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모용세가, 이것들이!”
으드득.
당설련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서찰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배은망덕한 것들이 감히……!”
모용세가가 태평맹을 나갈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운현과 매우 가깝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이런 서찰 한 장으로 통고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고 말이다.
휙.
당설련은 고개를 들어 수하를 바라보았다.
“소림이 창룡맹에 가맹했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수하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모용세가 역시 곧 가세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당설련도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모용세가가 태평맹을 나간 것일 테니까.
‘소림, 무당, 화산에 모용세가까지라니…….’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중원을 완전히 넘겨준 셈이네.’
‘중원(中原)’은 문자적으로 ‘가운데 땅’이라는 뜻이지만, 큰 중요성을 가진 넓은 지역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와 화산, 무당과도 멀지 않은 모용세가는 말 그대로 중원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모용세가가 있는 곳은 역사적으로도 중원이라 불리던 하남성이다.
말 그대로 진짜 중원이 넘어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 끌어들인 것이었는데…….’
모용세가가 운현과 친분이 두터운 것을 알면서도 태평맹에 끌어들인 것은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거기다 운현의 단전이 부서졌다는 확신 역시 깔려 있었고 말이다.
‘……진작에 모용세가를 처리했어야 했나?’
그러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당장 태평맹의 조직을 안정시키고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곳들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사실 모용세가 혼자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미와 남궁세가가 창룡맹에 가맹하고,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 화산과 무당, 소림이 창룡맹에 들었다.
결국 모용세가마저 창룡맹에 가세함으로써 중원 한복판에 단숨에 집을 지어 버린 형국이 된 것이다.
화산과 무당, 소림, 모용세가로 이루어진 확고부동한 집을 말이다.
‘이렇게 되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당설련이 수하를 바라보았다.
“수군의 훈련 계획은 어찌 되었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당설련의 고운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수하는 급히 말을 이었다.
“수군도독이 직접 훈련 계획을 상신한 것까지는 알아내었습니다. 허나 자세한 기간과 지역에 대해서는 아직…….”
“수군도독이 직접?”
“네. 장강 수군도독부의 수군도독 진림입니다.”
“진림…….”
당설련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진림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냈다.
“본래 그의 파벌은 박 공공과 적대 관계일 텐데?”
태평맹은 조정에 엄청난 양의 예물을 뿌렸다.
그로 인하여 얻게 된 것도 적지 않아서, 당설련은 조정의 파벌 관계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수군도독은 군의 최고위직이잖아. 대규모로 군을 움직이면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이렇게 큰 수군 훈련을 상신했다고?”
군권을 쥔 자는 언제나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된다.
도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병관을 따로 두어 지휘권을 맡기는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허나 수군도독 진림이 직접 훈련 계획을 상신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설련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정과 황궁의 은밀한 내막은 그녀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라, 그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알아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당설련이 말했다.
“규모, 기간, 장소, 사람……. 수군 훈련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특히 어디에서 행해지는지 반드시 파악해야 해. 알아들었어?”
“네.”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당설련은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나가 봐. 아 참, 북해일문주는 아직 성도에 있나?”
예를 표하려던 수하가 답했다.
“이미 성도를 떠났습니다. 북해일문의 총관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그랬지.”
북해일문주와 북해일문의 사람들이 떠난 것은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당설련은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북해일문의 총관을 오라 명할까요?”
“아니, 필요 없어.”
뚱뚱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북해일문의 총관을 떠올리며 당설련은 고개를 저었다.
북해일문주라면 모를까, 총관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당설련이 가볍게 손을 젓자 수하는 예를 표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탁.
홀로 남은 당설련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갈세가가 흔들리는 건 나쁘지 않지만…….”
모용세가가 있는 하남성은 제갈세가가 있는 산동성,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과 접하고 있다.
모용세가가 태평맹을 떠난 것이 알려지면 제갈세가는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공손세가가 흥분하는 건 좋지 않아.”
수군훈련이 알려지며 공손세가는 기대에 부풀었다.
심지어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이 기정사실인 양 떠들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만일 수군훈련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곳이 공손세가가 아니라 남궁세가뿐이라면, 그리고 그 뒤에 창룡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공손세가는 어떻게 될까?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당설련은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모든 일 뒤에 바로 그가, 창룡검주 운현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한 대가는”
으득.
빙긋이 미소 짓는 운현을 떠올리며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치르게 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