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어차피
소림사 경내의 작은 정자.
운현은 모용미와 함께 마주 앉았다.
쏴아아.
푸른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곳에서, 운현은 이제껏 있었던 일들을 모용미에게 이야기했다.
심지어 와불 선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모용미에게는 모두 해 줄 수 있었다.
“……그러셨군요.”
모용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미산에서 헤어진 이후 운현에게 있었던 일들은 그녀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운현이 이토록 어려운 일을 겪고 큰일까지 해내다니 말이다.
“미안해요. 저는…….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요.”
“아닙니다. 소저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지요.”
운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소저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운 학사님이 오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모용미는 빙긋 웃었다.
“화산이 창룡맹에 가맹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어요. 무당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소림으로 오실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운현은 놀랐다.
“아니, 무당의 결정이 벌써 알려졌다는 말입니까?”
“아직 일부에게만요.”
모용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곧 온 강호 무림이 알게 될 거예요. 이런 소문은 때로 바람보다 더 빠르거든요.”
화산의 결정이 알려진 것도 놀라운데 무당파가 가맹한 소식까지 퍼졌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화산과 무당이 강호 무림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리라.
“하지만 지금 태평맹의 모든 관심은 장강 수군의 훈련에 향해 있어요. 설마 운 학사님께서 하신 일인지는 몰랐지만요.”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모용미의 표정은 심각했다.
“당문뿐이 아니에요. 제갈세가와 공손세가도 이후의 향방에 촉각을 세우고 있어요. 장강 수군의 훈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들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갈세가와 공손세가가요?”
“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손세가는 혹시 수군의 훈련을 기회로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고, 제갈세가는 남궁세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요. 남궁세가가 힘을 회복하게 되면 제갈세가로서는 오랜 숙적을 다시 맞이하게 되는 셈이 되니까요.”
장강이 강호 무림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컸다.
중소 문파는 물론이고 공손세가나 남궁세가 같은 거대 세가들까지 장강의 상황에 따라 크게 흔들리니,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문파들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건 태평맹 문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운 학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강을 끊어 영웅맹을 사실상 고사 상태로 몰아넣으신다면.”
희미하게 웃으며 모용미는 말했다.
“태평맹 역시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운 학사님께서 주신 쪽지의 글처럼 말이에요.”
태평맹 용봉지회의 마지막 연회장에서, 모용미는 진예림이 전해 준 운현의 쪽지를 받았다.
그곳에 적힌 글은 간단했다.
‘모은 것은 헤치고, 이은 것은 끊는다.’는 짧은 말이 전부였다.
혹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서인지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총명한 모용미는 곧 그 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운현은 태평맹과 영웅맹을 적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실제로 운현은 아미파를 구하고 태평맹을 막아섰다.
그러더니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장강을 끊어 버렸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운 학사님.”
모용미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쳐다보았다.
이미 운현이 창룡검주이며 창룡맹의 맹주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운현을 학사님이라 불렀다.
“그 쪽지를 주신 건, 모용세가가 운 학사님과 함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제게 소중한 분들이 모르시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요.”
모용미의 뺨이 살짝 홍조를 띠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운현이 빙긋 웃었다.
“천만에요.”
쏴아아.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고 지났다.
잠시 침묵하던 모용미가 운현을 향해 말했다.
“저희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운현은 알 수 있었다.
모용미는 모용세가의 창룡맹 가맹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태평맹은 모용세가를 비난하겠지요. 신의가 없다고 말예요. 하지만 신의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대의명분이에요.”
단호한 어조로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운 학사님께서 반영웅맹의 깃발을 드셨으니 강호 무림의 대의는 창룡맹에 있어요. 태평맹, 아니 당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용세가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대의명분만이 아니다.
아미와 화산, 무당에 이어 소림까지 가세하였으니 이제 창룡맹은 명실공히 강호 무림의 정통 세력이다.
무림맹의 뒤를 잇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대 정파맹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운현은 모용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창룡맹의 맹주로서, 모용세가의 가맹을 요청합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모용미가 말했다.
“오늘부터 모용세가는 창룡맹과 뜻을 함께합니다.”
모용미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무가의 딸이자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라는 사실이 넘치도록 납득이 가는 모습이었다.
“아, 그러면 태평맹은…….”
“이미 탈퇴를 통보하는 서찰을 보냈어요.”
모용미의 말에 운현은 놀랐다.
그건 운현 자신을 만나기도 전에 모용세가가 이미 뜻을 정했다는 의미였다.
소림의 가맹이나 수군 훈련에 대한 내용을 알기도 전에 말이다.
“당설련 소저가 아마 화를 많이 내겠네요.”
모용미는 사뭇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운현은 알고 있었다.
사실 모용세가는 장강의 이권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태평맹과 적대 관계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창룡맹에 가맹한 것이다.
오직 운현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감사합니다.”
운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은 당연했다.
모용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운 학사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은혜를 갚을 뿐이라고 말하면 당연한 일인 듯 들리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용세가의 행동은 높이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슥.
운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용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소저.”
‘아.’
운현의 진지한 눈빛에 그만 모용미의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가벼운 농담으로 애써 자신의 표정을 감추려 했다.
“맹주님께서 그렇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된답니다. 이제 일대 정파맹의 맹주님이신데…….”
그러나 모용미의 시도는 오히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 버렸다.
“괜찮습니다.”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소저에게라면 얼마든지요.”
그 말에 모용미는 그만 얼굴이 빨갛게 되어 버렸다.
“아!”
달아오른 얼굴을 얼른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모용미의 모습에 운현의 얼굴 역시 붉게 물들었다.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당황한 운현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모용미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저도 알아요. 그게 저기…….”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운현의 올곧은 성품도, 그녀의 명석한 지혜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어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이고.”
멀리 숨어서 두 사람을 쳐다보던 영호준이 한탄했다.
“우리 맹주님이 말씀은 잘하시는데 결정적인 상황에서 헛발질을 하시네. 거기서 그렇게 하시면 어쩝니까?”
“살살 말씀하세요. 들켜요.”
담소하가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우리가 있는 건 이미 알고 계실 텐데 이제 와서 들키긴. 그리고 저런 상황이면 알아도 모르네. 지금 두 사람 눈엔 서로밖에 안 보일걸?”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영호준은 혀까지 찼다.
“쯧쯧. 이거 강호 무림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 우선 맹주님부터 어떻게 해야…….”
“그럼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담소하가 물었다.
영호준은 피식 웃었다.
“모르겠나?”
“모르겠는데요?”
담소하는 전혀 감도 안 잡힌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고 저기서 손이라도 덥석 잡아요? 그랬다간 뺨 맞을걸요?”
“맹주님이시라면 뺨은 안 맞겠지만 그러면 안 되네.”
영호준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서 필요한 건 어설픈 신체 접촉이 아니라 여자에게 확신을 주는 걸세. 나는 당신을 원한다, 바로 그걸 보여 줘야 한다는 말일세.”
담소하는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남자들은 보통 마음에 든 여자에게 무작정 잘해 주려고만 하지. 그러면 점점 호감이 쌓여서 뭔가 특별한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세. 하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라네.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의 함정.”
담소하는 눈을 반짝였다.
옆에 있던 조관도 영호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자를 사귀고 싶으면 자신이 연애 대상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야 하네.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길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거지. 비유하자면 그제야 비로소 검을 빼 든 셈이 되는 걸세.”
“검을 빼요?”
“그래. 상대가 내 앞에 턱 하니 섰는데, 검을 빼 들지 않고 있으면 헷갈리지 않겠나? 이놈이 적인가, 친구인가? 싸우자는 건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건가? 하고 말일세.”
담소하는 놀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의 비유는 담소하와 조관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사실 알고 보면 여자들도 불안해하네. 상대는 마음도 없는데 혼자 설레발치다가 안 되면 그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그래서 여자들이 실제로는 눈치도 엄청나게 살피고 생각도 아주 많다네. 이 남자가 대체 뭔 생각으로 잘해 주는 건가 하고 말이야.”
“그, 그래서요?”
“그런데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계속 잘해 주기만 하면 여자가 먼저 지치는 거지. 매력도 떨어지고, 신선함도 없어지고 말이야.”
“오오.”
영호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풍류 공자로 소문난 그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점잖고 착한 남자들보다, 깨지건 말건 우선 들이받고 보는 놈들이 여자를 더 잘 낚는다네. 그놈들은 최소한 태도는 확실히 하거든. 뭐, 거기에 여자들이 속아 넘어가는 거지만.”
“그럼 아까 같은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해요?”
“거기선 말이 중요한 게 아닐세.”
영호준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선 눈을 피하지 말아야 하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더 좋겠지. ‘이 세상에서 오직 소저에게만입니다.’라고 말이야. 우리 맹주님 목소리가 상당히 괜찮은 편이시니까 효과가 아주 발군일걸?”
“오오.”
담소하는 물론 조관까지 감탄하는데, 문득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뭣들 하느냐?”
“아, 어르신!”
담소하가 걸어오는 객옹을 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총군사께 가르침을 받고 있었어요. 연애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쓸모없다.”
객옹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어차피 될 놈은 다 되고 안 될 놈은 죽어도 안 된다. 그러니 쓸데없는 데 인생 허비하지 마라.”
담소하와 조관, 그리고 영호준마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저기 그래도 쓸모가 없지는…….”
영호준이 소심하게 반론하려 했지만 객옹이 종지부를 찍었다.
“그만 가자.”
저벅.
객옹은 여전히 진전이 없는 운현과 모용미를 향해 걸어갔다.
세 사람도 급히 객옹의 뒤를 따랐다.
“아, 어르신!”
운현은 객옹을 보고 벌떡 일어나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영호준은 작게 혀를 찼고, 담소하도 이제는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너무 환한 표정을 지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소저, 이분은 객옹이십니다.”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객옹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단아하고 정중한 자세로 예를 올렸다.
“모용미입니다. 어르신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래.”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말했다.
“볼일 다 끝났으면 가자.”
“네, 어르신. 소저, 함께 가시지요.”
그렇게 말한 운현은 객옹과 함께 걸어갔다.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객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이는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운현은 객옹과 이야기하며 벌써 앞서가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환하게 웃는 운현의 그 모습에,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질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