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363화 (363/530)

363화. 성인은 무위에 처한다[聖人處無爲]

사락.

운현의 백호수련검이 끝났다.

아니,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단지 멈춘 것에 불과했다.

수련의 여운을 음미하듯, 운현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미명을 갈무리했다.

스릉.

아름다운 미명의 칼날이 모습을 감추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정신을 차렸다.

“……후아.”

담소하가 탄식처럼 숨을 내쉬었다.

백호수련검 십이식은 이미 끝났지만, 아직도 그 유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남아 있는 듯했다.

영호준이나 객옹의 놀라움은 더욱 커서, 아직도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풍 진인의 감회는 남달랐다.

‘무당의 도사로 한평생을 살았건만…….’

천기를 읽고 하늘과 땅의 조화를 이해하는 술법의 이치에 매료되어 술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제아무리 하늘의 뜻을 알고 천지간의 조화를 논한다 해도 ‘도사의 술법은 말하기 나름’이라는 현실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적풍 진인은 본 것이다.

운현의 검을, 그 아름답고도 장엄한 광경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적풍 진인이 평생 찾아 헤매던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오늘에서야…….’

달빛 아래 선 운현을 바라보며 적풍 진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비로소 내 생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구나.’

적풍 진인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더없이 환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적풍 진인은 끊임없이 도호를 외웠다.

사박.

무당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운현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객옹과 영호준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저벅.

“그러고 보니 두 분께 제 수련을 보여 드린 건 처음이던가요?”

“저도 처음이에요.”

담소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새벽마다 하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방해가 될까 봐 조심하고 있었거든요.”

“그랬군. 고마워.”

운현이 담소하에게 말했다.

“새벽마다 하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나 못 할 때도 많습니다.”

객잔에 머물거나 상황이 여의치 못할 경우엔 심상 수련을 했다.

최근을 돌이켜 보면 직접 검을 들고 한 수련이 드물 정도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

객옹이 말했다.

“봐도 괜찮냐?”

운현은 살짝 놀랐다.

영호준 역시 눈을 둥그렇게 뜬 것은 마찬가지였다.

천하의 객옹이 허락을 구하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네. 물론 괜찮습니다.”

객옹은 만족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목구멍까지 ‘저도요’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강호 무림에서 타인의 수련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담소하는 아니었다.

“저도요!”

담소하가 얼른 말했다.

영호준이 말할까 말까 갈등하고 조관이 점잖게 아무 말 않는데,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네. 누가 본다고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영호준과 조관은 그 말이 자신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 고민했다.

말하던 운현은 적풍 진인이 눈을 감고 도호를 외우는 것을 발견했다.

“도사님.”

운현의 목소리에 적풍 진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유난히 밝은 적풍 진인의 모습에 운현은 물론 다른 일행들까지 살짝 놀랐다.

“대협.”

적풍 진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협이 진실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오?”

운현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적풍 진인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말했다.

“대협은 내게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느냐고 물었소. 허나 진실로 알고자 하는 것은 사실 따로 있지 아니하오?”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오?”

잠시 침묵하던 운현이 입을 열었다.

“일대상인은 제게 말했습니다. 제 검이 하늘을 가르는 검이 되어야 한다고요.”

그건 어쩌면 허황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풍 진인의 눈빛은 진지했다.

“흐음.”

적풍 진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도호를 외웠다.

그리고 곧 눈을 떠 운현을 바라보았다.

“무릇 도사는 천기를 살펴 행하오. 허나 천기를 함부로 누설해서도 아니 되오. 자칫 하늘의 뜻을 어지럽힐 수 있기 때문이오.”

운현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적풍 진인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뜻일까?

“천기를 보셨다는 말씀입니까?”

운현의 물음에 적풍 진인이 웃음을 머금었다.

“부족한 자가 어찌 감히 하늘의 뜻을 헤아리겠소?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소.”

적풍 진인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가의 가르침은 이르기를, 성인은 무위에 처한다[聖人處無爲]고 하오.”

무위란 문자적으로는 아무것도 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나 무위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소. 모든 일에 무관심한 것도, 세속을 초월하였다는 듯 거만하게 판단하는 것도 아니오.”

적풍 진인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인은 말없이 행하여 모든 이들을 깨우친다[行不言之敎] 하였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와 무관심한 자, 혹은 거만한 자에게 누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부드럽게 웃으며 적풍 진인은 말했다.

“그러니 성인이 무위에 처한다 함은, 곧 마음에 얽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는 의미요. 물이 흐르고 구름이 떠가듯 말이오.”

운현을 바라보며 적풍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은 대협 자신의 길을 가시오. 이것과 저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뜻과 마음을 따라 그렇게 나아가시오. 그리하면 모든 일은 스스로 드러나게 될 것이오.”

어쩌면 그것은 근거 없는 격려나 위로일지도 몰랐다.

많은 도사와 승려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적풍 진인의 눈빛과 목소리는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적풍 진인에게 예를 표했다.

“진인의 말씀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나야말로 고맙소.”

적풍 진인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협을 만난 것은 내 일생의 복이오. 허허허.”

도호까지 외며 적풍 진인은 말했다.

주름진 그의 얼굴에 걸린 환한 웃은 그로부터 한동안 떠나지 않고 있었다.

***

다음 날, 무당파 원로원은 전격적으로 창룡맹 가맹을 결정했다.

애초부터 검파의 원로들이 원하던 일인 데다가, 반대하던 영천자와 적풍 진인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기에 결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태청각에 서서 말했다.

“창룡맹 맹주로서 무당의 가맹을 허락합니다.”

“오오.”

덜컹.

무당파 원로들은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께 무당이 예를 표하오.”

열한 명의 원로들이 올리는 예에 운현은 정중하게 답례했다.

청송 진인의 감회는 더욱 커서, 눈물까지 보이며 기뻐하고 있었다.

학우자가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참으로 기쁜 날이오. 이제 창룡맹으로 인하여 강호 무림이 바로 서게 되었소이다.”

운현이 빙긋 웃고, 뒤에 서 있던 영호준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창룡맹 총군사인 영호준이 막 무어라 말하려던 때였다.

“아, 그리고 영천자께서 맹주께 드릴 예물이 있다고 하오.”

학우자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영천자에게 향했다.

“크흠.”

영천자는 헛기침을 하고는 서책 크기의 목함을 들고 운현에게 다가왔다.

“무당의 제자들을 위해 힘써 주셔서 감사하오. 이것은 약당에서 조제한 소청단이오.”

“소청단!”

영호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소청단이라면 태청단 다음으로 대단한 무당의 영약이다.

문파들이 영약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는 영호준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래 문외 불출의 비전이나, 뜻을 같이하여 피로 맹세한 맹주께 어찌 거리낄 것이 있겠소?”

슥.

영천자는 목함을 운현에게 내밀었다.

“부디 받아 주시기 바라오.”

운현은 난처한 표정으로 영천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소청단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 목함에 담긴 의미는 운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가 감히 이런 것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영약이 중하다 하나 어찌 사람의 생명과 비하겠소?”

영천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른 원로들이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미 원로원의 합의가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약당이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도.”

영천자는 짐짓 객옹을 보며 말했다.

“꼭 확인해 주시기 바라오.”

도전적인 그 눈빛에는 약당의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토록 귀중한 것을 받게 되니 참으로 책임이 무겁습니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보여 주신 무당의 호의는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영천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운현은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목함을 받아 들었다.

“아,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던 학우자가 말했다.

“맹주께서는 앞으로 무당이 어찌하기를 원하시오?”

운현은 대답 대신 총군사 영호준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호준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창룡맹 총군사 영호준입니다. 우선 여러분께 화산과 아미, 그리고 남궁세가의 경우를 잠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 물론 장강 수군의 총책임자이신 진림 도독에 대해서도요.”

무당파 원로들은 즉시 호기심을 나타냈다.

영호준은 씨익 웃었다.

“우선 다들 자리에 앉으실까요? 이야기가 짧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무당파 원로들이 영호준의 이야기에 푹 빠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호준의 모습이 마치 물을 만난 고기 같다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그날 저녁, 운현 일행은 무당파 원로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무당산을 떠났다.

“소청단이 셋이라…….”

탁.

마차 안, 영호준이 목함을 닫으며 말했다.

“무당이 맹주님께 크게 호의를 보이고 싶었나 보군요.”

“어쩐지 미묘한 숫자 아니에요?”

담소하는 조금 실망한 듯 말했다.

“겨우 셋이라니, 저는 한 열 개쯤 들어 있는 줄 알았어요.”

“천하의 소청단이 열 개씩 돌아다닐 리는 없지.”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곧 이에 버금가는 것들이 모여들 테니 다 합하면 열 개 정도는 될 걸세. 화산과 아미, 남궁세가에 알리면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담소하는 혀를 내둘렀다.

총군사 영호준은 이미 무당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약속받았다.

그 규모가 이전의 화산이나 아미, 남궁세가보다 더 크고 본격적이었다.

원로들 역시 과거 무림맹의 관행 때문인지, 그 정도는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더 받겠다니?

“너무 많이 받는 것 아닌가요?”

“어허, 본래 징수는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네. 남보다 더 많이 내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다 같이 많이 내야 불만이 없지 않겠나?”

담소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호준의 말이 마치 욕심스러운 탐관오리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건 창룡맹인지라 담소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따각, 따각.

뿌듯한 영호준과 일행을 실은 마차는 관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