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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62화 (362/530)

362화. 기혼단의 위협

깊은 밤, 무당파 객당.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찻잔을 쥔 운현이 적풍 진인에게 말했다.

적풍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오히려 내가 미안하오. 제자들을 치료하느라 지금까지 고생하셨는데……. 날이 밝은 후에 이야기해도 상관없소.”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기다리셨는데 어찌 그냥 보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약사들께서 도와주셔서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영천자는 운현의 치료를 지켜본 후 당장 약사들을 불러냈다.

숙련된 약사들은 운현과 객옹의 치료에 감탄하며 즉시 두 사람을 돕기 시작했다.

낡은 전각에 활기가 돌며 치료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밤이 깊은 후에야 모든 일이 끝났다.

“무당을 위해 힘써 주셔서 감사하오.”

적풍 진인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마 영천자도 이번에 깨달은 것이 많을 것이오. 허허허.”

운현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영천자는 약사들과 토의를 하겠다며 약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적풍 진인은 그때까지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밤이 늦어서야 운현 일행과 마주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당의 도사님들은 다 신선 같으시던데…….”

옆에 있던 담소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신기한 듯 적풍 진인을 향해 물었다.

“막 풍운조화도 일으키시고 그러시나요?”

적풍 진인은 빙긋 웃었다.

“소형제는 풍운조화를 일으켜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 그건…….”

담소하는 잠시 머뭇거렸다.

딱히 무엇을 하려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위해 천지의 조화를 깰 수는 없는 법이네. 또한 제아무리 놀라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나?”

“의미요?”

“그렇다네. 누군가에겐 그저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는 일이, 다른 이에게는 하늘의 뜻이 되기도 하거든.”

나지막이 도호를 외우며 적풍 진인이 말했다.

“길을 헤매는 자에게 하늘의 뜻을 밝혀 주고, 쓰러진 자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도사의 일이라네.”

옆에서 듣던 영호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화산의 도사인지라 적풍 진인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찻잔을 매만지던 운현이 문득 말했다.

“마침 저도 진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적풍 진인이 눈을 빛냈다.

“그보다 진인께서 제게 궁금하신 것이…….”

“아니, 아니오.”

적풍 진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도사는 본래 말하기 전에 듣는 법이라오. 그러니 먼저 말씀하시오. 대협께서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운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영웅맹의 맹주는 염중부이지만 그 배후에는 일대상인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적풍 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인(上人)’이라는 칭호는 누가 봐도 도가의 인물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얼마 전, 저는 그와 마주쳤습니다.”

운현은 가만히 찻잔을 감싸 쥐었다.

일대상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분명 저와 일전을 치르려는 듯 보였으나, 그의 수하 중 한 사람이 일대상인에게 진언했습니다. 천기가 이롭지 않다고요.”

“천기라 했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을 한 자는 도사의 복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대상인은 뜻을 거두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풍 진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물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눈살을 찌푸린 적풍 진인은 생각에 잠겼다.

“흐음. 천기가 이롭지 않다라…….”

중얼거리던 적풍 진인은 고개를 들었다.

“우선 그들이 도가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가정하겠소. 그 정도의 인물들이 사람이나 현혹하자고 상인이라는 명호를 쓰거나 도사의 복식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사람들은 운이 나쁘거나 세가 불리한 것을 천기가 좋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오. 허나 그 정도의 인물이 함부로 천기를 운운하지는 않으리라 보오.”

진지한 눈빛으로 적풍 진인은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요. 먼저 그것은 거짓 없이 천기를 의미한 것이며, 또한 그들이 천기를 살펴 행해야 할 정도로 큰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천기를 살펴야 할 정도로 큰일…….”

운현은 가만히 적풍 진인의 말을 되뇌었다.

자신은 그것을 역모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대상인은 천하패령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한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운현과 일전을 결하려던 일대상인이 그 뜻을 거둘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 제가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요?”

“반대로 묻고 싶소.”

적풍 진인이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운 대협은 무엇을 하고 계시오?”

운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밤이 깊도록 운현 자신을 지켜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다니.

“기혼단에 중독된 이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째서요? 무당에 은혜를 끼쳐 맹원으로 받아들이고자 함도 아닌 듯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의원도 아닐 터인데 말이오.”

적풍 진인의 지적은 사뭇 날카로웠다.

그러나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의원만 사람을 구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옳습니다. 저는 다른 이유로 기혼단을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운현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것이 혈공자 문왕이 세운, 천하패령 계략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네?”

놀란 목소리는 담소하의 것이었다.

조관은 물론 영호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아니, 잠깐.”

말하던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군!”

“아하!”

담소하도 거의 동시에 말했다.

“알 것 같아요. 혈공자 문왕은 천하삼대상단을 통해 막대한 양의 약재를 사들였죠. 바로 기혼단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래. 그 결과 실혼대가 나타났고, 화산과 무당의 제자들이 중독되었지. 하지만 기혼단의 목적이 과연 그것뿐일까?”

영호준의 말에 담소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요. 천하삼대상단이 유통한 약재는 상단의 수 년치 거래 금액에 상당할 정도였다고 했어요. 약재의 양에 비하면 현재까지 풀린 기혼단은 터무니없이 적어요.”

담소하가 객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객옹 어르신. 기혼단에 혹시 엄청난 양의 약재를 정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분이 있었나요?”

“아니.”

객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없었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하네요.”

담소하가 눈을 빛냈다.

“화산과 무당에 퍼진 기혼단은 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만일 이 기혼단이 세상에 퍼져 나간다면, 아니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면…….”

영호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끔찍한 세상이 펼쳐지겠지.”

기혼단의 중독성은 화산이나 무당의 제자들조차 이겨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만일 기혼단이 세상에 무차별적으로 번져 나간다면 그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기혼단의 유혹에 가장 먼저 노출될 사람들은 서민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이들일 거예요.”

담소하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예를 들어 관직에 있거나 제법 규모가 있는 상단, 세가, 명문가 같은 곳들 말예요.”

조관의 표정이 변했다.

담소하의 말은 옳았다.

기혼단은 서민보다 오히려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먼저 번져 갈 터였다.

각 지방의 관리들, 지위가 있는 상급 무관들, 그리고 조정과 황실에까지 말이다.

“……감히 나라의 근간을 흔들려 하다니!”

조관이 이를 악물고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상에 기혼단이 퍼져 나간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이건 그냥 역모 정도가 아닌데요? 아예 다 같이 망하자는 거잖아요.”

담소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더 이상 역모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영호준 역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천하패령이라더니 확실히 천하의 주인이 되긴 하겠군. 처참하게 망가져 버린 천하의 주인이 말이야.”

한숨을 푹 쉰 영호준은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기혼단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신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또 문파들을 가맹시키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어요.”

담소하의 말에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것도 있긴 했네.”

순순히 인정한 운현은 적풍 진인을 돌아보았다.

“이것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 그 이유입니다. 혹시 이해가 안 되신다면 더 자세한 설명을…….”

“아니, 괜찮소.”

적풍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미 들었소.”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적풍 진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적풍 진인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느냐는 운현의 물음이 그리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으음.’

적풍 진인은 갈등하고 있었다.

만일 운현이 평범한 무림인이라면, 혹은 문사였다면 해 줄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래도 좋을까?

고민하던 적풍 진인은 결단을 내렸다.

“말을 돌리는 것 같아 미안하오만, 내가 대협을 살펴보고 싶다고 한 것을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대협의 검을 보여 주실 수 있겠소?”

그가 운현의 검, 미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 물론 무인에게 검법을 보여 달라는 말이 강호 무림의 예에 어긋남은 알고 있소. 허나…….”

적풍 진인이 다급하게 말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보여 드리지요.”

적풍 진인은 눈을 빛냈다.

“저, 정말이오?”

“네.”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덜컹.

말만이 아니라는 듯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적풍 진인에게 물었다.

“가까운 곳에 연무장이나 비무대가 있습니까? 적당한 공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있소!”

덜컹.

적풍 진인은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무당파에 어찌 연무장이 없을까?

게다가 적당한 공터라면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이, 이리 오시오.”

혹시라도 운현의 마음이 변할까 적풍 진인은 얼른 객당을 나섰다.

운현이 해검지에서 검을 풀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적풍 진인은 생각했다.

영호준은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운현과 객옹은 적풍 진인의 뒤를 따라 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가요!”

담소하와 조관까지 나서는 것을 보며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영호준도 운현의 검술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박.

운현은 공터 중앙에 멈춰 섰다.

무당산의 밤하늘은 높고 달빛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숨을 고른 운현은 천천히 미명을 빼어 들었다.

스릉.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미명의 칼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명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서늘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웅.

나지막이 검명이 흘렀다.

운현의 마음속에 떠오른 한 자루 검의 심상은 곧 미명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운현의 검은 허공을 가르며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사락.

흐르는 물처럼, 스쳐 가는 바람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검로가 운현의 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호수련검 십이식이었다.

후우웅.

적풍 진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경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적풍 진인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허억!”

운현이 검술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적풍 진인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 이럴 수가…….”

적풍 진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운현의 검은 누가 봐도 아름답고 놀라웠지만 적풍 진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달랐다.

“아아…….”

신음처럼 적풍 진인은 탄식을 내뱉었다.

운현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빛이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것은 바로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 곧 서기(瑞氣)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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