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좋은 소식
운현과 객옹은 청송 진인과 함께 태청각을 나왔다.
원로원은 운현과 객옹이 기혼단에 중독된 제자들을 살펴보는 것을 허락했다.
무당파의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청송 진인이 원로직까지 걸고 단호한 결의를 보이자 다른 원로들도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평소에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영천자와 적풍 진인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도 영향이 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운현이 청송 진인에게 물었다.
만일 이번 일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기거나 문제가 된다면 청송 진인은 원로직에서 물러나 은거해야 한다.
말 그대로 자신의 남은 생을 전부 건 것이다.
“괜찮소.”
부드럽게 웃으며 청송 진인은 말했다.
“어차피 자리는 일을 하라고 주어진 것 아니겠소? 잘못을 고치고 선행은 격려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라고 말이오.”
청송 진인의 눈빛에는 한 점의 후회도, 불안도 없었다.
“이런 것도 못 하면 원로를 내려놓아야 마땅하오. 결국 이래도 내려놓고 저래도 그만둘 자리이니 어찌 연연하겠소? 허허허.”
말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다.
무당의 도사로 살아온 청송 진인에게 원로라는 자리가 얼마나 명예롭고 자랑스러울까?
어쩌면 그것은 청송 진인이 평생을 바쳐 이루어 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청송 진인은 기꺼이 내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진인의 뜻이 참으로 고귀합니다.”
운현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나 청송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신승께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오.”
청송 진인은 지긋이 눈을 감고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운현은 새삼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문득 객옹이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사람을 보내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청송 진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넌지시 객옹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영천자를 쳐다보시던데, 따로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생각이 안 나서.”
객옹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네?”
청송 진인은 물론 운현도 객옹을 쳐다보았다.
객옹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전에 분명 보았는데 기억이 안 나더군. 그래서 쳐다봤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객옹이 과거 약당과 인연이 있다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싶었는데 그저 기억이 안 난 것뿐이라니.
“그러셨군요. 저는 또 혹시…….”
청송 진인이 말하던 그때였다.
태청각의 문이 열리고 한 원로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바로 방금 청송 진인이 말하던 영천자였다.
영천자는 운현과 객옹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그 표정은 사뭇 굳어 있었다.
저벅.
객옹 앞에 멈춘 영천자는 천천히 예를 표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고개를 든 영천자의 눈동자에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영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시겠습니까? 그때 화로를 끌어안고 차라리 죽겠다고 악을 썼던 약사입니다.”
“흠.”
객옹은 영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툭 던지듯 말했다.
“늙었군.”
영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독, 아니 객옹께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객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영천자가 말했다.
“기혼단에 중독된 이들을 보러 가시는 거라면 저도 같이…….”
그때였다.
태청각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나왔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운현 일행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은 바로 술사 출신의 적풍 진인이었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운현 일행에게 말했다.
“다들 아직 계셨구려.”
적풍 진인의 태도는 사뭇 친근했다.
그가 이제껏 반대했던 것을 아는 청송 진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모른 척하고 물었다.
“원로원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이까?”
“아니, 없소.”
적풍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원로원은 잠시 정회하기로 했소. 논의야 이미 다들 아는 상황이니 더 할 필요도 없고…….”
슬쩍 영천자를 쳐다본 후 적풍 진인이 말했다.
“어차피 대세도 대강 정해진 듯해서 말이오.”
그간 반대하던 영천자와 적풍 진인이 한발 물러난 모양새가 된 이상, 원로원의 흐름은 이제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송 진인이 자신의 원로직까지 건 것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크흠.”
영천자는 헛기침을 했다.
그가 반대한 것은 검파 중심의 원로원 분위기에 제동을 걸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실은 약당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이 더 컸다.
영천자는 화산에서 알려 준 것만 있으면 약당만으로도 능히 제자들을 돌볼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니 구태여 외부인인 창룡맹 맹주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독선이 배후에 있다면 약당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건 의미가 없다.
약당이 무엇을 하건 결국 독선의 도움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영천자가 시선을 피하자 적풍 진인은 청송 진인에게 물었다.
“기혼단에 중독된 이들을 보러 가시는 것이오?”
청송 진인은 대답 대신 영천자를 쳐다보았다.
영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송 진인은 다시 객옹과 운현을 돌아보았다.
객옹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다 같이 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오, 그럽시다.”
적풍 진인이 반색을 했다.
운현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사뭇 친근했다.
청송 진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적풍 진인은 아랑곳없이 운현에게 말했다.
“이쪽이오, 운 대협. 날 따라오시오.”
적풍 진인은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청송 진인이 영천자를 쳐다보았지만 영천자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도 적풍 진인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운현과 객옹은 청송 진인, 영천자, 적풍 진인과 함께 발을 옮겼다.
그사이, 태청각에서는 검파의 원로들이 열심히 다른 원로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
기혼단에 중독된 무당파 제자들은 제법 외진 도관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영천자는 객옹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영천자는 중독자들이 어떻게 발견되었고 어떤 증상을 보였는지 객옹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약사의 입장에서 살핀 것이라 전문적인 내용이 많았지만 객옹은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간혹 화산에서 보지 못했던 증상에 대해서는 객옹이 영천자에게 되묻기도 했다.
반면 적풍 진인은 운현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대협은 사문이 어찌 되시오? 내가 듣기로 신승의 사제가 된 것은 나중 일이라던데, 혹시 도가 문파와 인연이 있지는 않았소?”
적풍 진인은 친근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이 대단히 자연스러운 데다 화술도 뛰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인께서는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운현의 말에 적풍 진인은 웃었다.
“하하, 본래 도사는 말이 절반이라오. 같은 술법을 행하고도 어떻게 말해 주느냐에 따라 상대가 위로를 얻기도 하고, 불안에 떨기도 하니 말이오.”
적풍 진인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운현에게 말했다.
“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진 않소. 진심이 아니고서야 어찌 사람의 마음과 명운을 움직일 수 있겠소?”
말하던 적풍 진인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도사가 더 많아서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풍 진인의 모습은 무당파의 도사다웠다.
그사이, 일행은 중독자들이 수용된 전각에 도착했다.
위치도 외진 데다 아주 낡은 건물이었다.
저벅, 저벅.
일행은 낡은 전각으로 들어섰다.
전각을 지키던 무당파 제자들이 청송 진인과 영천자, 적풍 진인에게 예를 표했다.
“화산에서 보내 준 서찰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천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객옹에게 말했다.
중독자들을 수용한 전각 내부는 조용했다.
분위기도 사뭇 차분해서, 화산의 경우와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약당의 의술로도 기혼단에 대처할 수는 없었다.
은거한 약사들이 나선다면 혹 모르겠지만, 깊은 골짜기와 동굴에 은거한 그들은 원로들조차 만나기가 어려웠다.
화산에서 보내온 서찰이 아니었더라면 혼란과 피해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영천자는 입구 옆 서탁에 놓여 있던 두툼한 서책을 들어 올렸다.
“환자들의 증후와 그 경과를 기록한 책입니다. 보시겠습니까?”
객옹은 눈을 빛냈다.
독선, 혹은 약선이라고 불리는 객옹인지라 관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팔락, 팔락.
객옹이 기록을 살피는 동안 운현이 영천자에게 말했다.
“환자들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영천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다만 갑작스레 발작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주의하시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까운 방으로 향했다.
적풍 진인이 운현의 뒤를 얼른 따라왔다.
“화산에서 온 서찰에는 대협이 중독자들을 살핀 이후 증상이 크게 호전되었다고 하던데, 혹 의술을 배우셨소?”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며 적풍 진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운현은 그렇게 답하며 방문을 열었다.
끼익.
임시로 만든 방 안에는 무당파 제자 한 명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문소리가 나자 번쩍 눈을 떴다.
“무, 무슨 일입니까?”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가 가득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적풍 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 자신이 말했던,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위로도, 불안도 된다는 것을 운현이 나름대로 활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저래서는 너무 난데없고 의도가 너무 뻔하다.
문득 적풍 진인은 중독된 제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운현과 자신을 번갈아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크흠.”
적풍 진인은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로 좋은 소식이라네.”
하지만 제자의 흔들리는 눈빛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
영호준과 담소하, 조관이 합류하고 운현은 객옹과 함께 치료를 시작했다.
탕약은 이미 약당에서 조제한 것이 있었는데 객옹은 슬쩍 살펴보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화산파 제자들에게서 보았던 음산한 기운의 흐름 역시 동일했다.
오히려 무당파 제자들은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진 덕에 몸 상태가 한결 좋은 편이었다.
“후우.”
운현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검결지를 세워 누워 있는 환자의 가슴 부위에 가져갔다.
탕약을 마신 환자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순간,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운현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한기가 쏘아져 나왔다.
‘헉!’
지켜보던 적풍 진인이 화들짝 놀랐다.
한기는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렸지만 적풍 진인의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놀란 것은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 대협. 지금…….”
적풍 진인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으음.”
잠들어 있던 환자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객옹이 즉시 환자를 살폈다.
“……괜찮다.”
그 말에 운현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옆에서 바라보던 영천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 잠시 제가 진맥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하십시오.”
운현의 말에 영천자가 얼른 환자의 맥을 짚었다.
가슴을 두드려 보고 눈동자를 세심하게 살피기도 하던 영천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영천자는 즉시 운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침입니까? 대체 무슨 요법을 사용하신 겁니까? 괜찮으시면 부디 제게 가르침을…….”
영천자는 한참 나이 어린 운현에게도 저자세를 서슴지 않았다.
평생 약사로 살아온 영천자의 의술을 향한 열정은 대단했다.
“현이 말고는 아무도 못 한다.”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 그저 다행이다 생각하고 미련 갖지 마라.”
영천자는 낙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객옹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것이다.
“허어.”
연신 안타까운 한숨을 쉬며 영천자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객옹의 말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미련을 버리기 힘들었다.
“저, 저기…….”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또 있었다.
노년의 적풍 진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대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도 되겠소?”
“네?”
난데없는 말에 운현이 놀라 반문했다.
적풍 진인의 눈동자는 마치 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