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청송 진인
청송 진인과 함께 태청각으로 들어선 그 노인은, 검파의 원로들에겐 결코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도, 독선이 도대체 왜?’
학우자는 놀란 눈으로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외웠다.
하지만 술사인 적풍 진인은 조금 달랐다.
‘응?’
적풍 진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젊은 문사를 쳐다보았다.
‘방금 뭐였지?’
젊은 문사는, 겉으로 드러난 기세만으로는 옆의 노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적풍 진인이 문사 청년의 모습을 본 순간, 갑자기 그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적풍 진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문이 열리며 들어온 외부의 빛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갔으니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어떤 종류의 상서로운 기운이었다.
‘으음.’
무당파의 도사로서 평생을 살아온 적풍 진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젊은 문사를 주목했다.
그러다 문득, 약당 출신의 원로 영천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놀라고 있는 것은 영천자만이 아니었다.
검파의 원로들도 하나같이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고 있는 사람은 약당의 영천자였다.
“대, 대체 당신이…….”
영천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격동을 이기지 못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덜컹.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오!”
영천자는 손을 뻗어 노인을 향하며 외쳤다.
그 노인은 과거 정사대전 당시 피아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 바로 독선이었다.
“나는.”
객옹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태청각에 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영천자가 움찔하는데 객옹이 조용히 말했다.
“객옹이다.”
영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잠시 진정하시오.”
청송 진인이 말했다.
그는 나지막이 도호를 외우고 나서 원로들에게 말했다.
“이분은 객옹이시며, 창룡맹 맹주이신 운 대협과 개인적으로 함께하고 계시오.”
독선을 아는 원로들은 의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독선이거늘 객옹이라니?
그때 문득 학우자가 말했다.
“개인적이라 하셨소?”
청송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개인적이라는 건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의미다.
학우자는 물론 다른 원로들도 그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청송 진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다들 옛 기억은 잠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독선은 공포의 대명사이긴 했으나 무당과 직접적인 충돌이나 적대 관계는 없었다.
원로들은 청송 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그러했구려.”
학우자가 새삼 놀라운 눈으로 객옹과 운현을 바라보았다.
검파의 원로들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약당 출신의 영천자는 아니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영천자가 크게 반발했다.
“옛 기억을 내려놓으라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객옹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영천자는 객옹과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내력이 없는 약사인 그로서는 객옹의 눈빛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영천자는 얼른 청송 진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우리 약당을……!”
말하던 영천자는 순간 아차 싶었다.
청송 진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
그러나 영천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로들은 의아한 눈으로 영천자를 쳐다보았다.
약당과 독선이 과거에 모종의 인연이 있음은 모든 원로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오직 선대 장문인과 약당 출신의 원로, 영천자뿐이었다.
다른 원로들은 그저 약당이 독선과 의술 대결에서 진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약당은 물론 무당의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라, 영천자가 침묵하는 것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상황을 아는 선대 장문인이나 당시의 원로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끄응.”
영천자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오.”
영천자가 침묵하자 더 이상 객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름 젊은 편에 속하는 몇몇 원로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객옹을 쳐다보았다.
사락.
학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도는 학우자라 하오.”
그는 객옹과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운현이 답례하자 학우자는 나지막이 말했다.
“신승께서 입적하셨음은 이미 들었소. 삼가 조의를 표하오.”
학우자만이 아니라 모든 원로들이 도호를 외며 고개를 숙였다.
운현에 대해서는 경계와 호감이 섞여 있었지만, 신승의 일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말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렇게 무당을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이리로 앉으시오.”
원로원에서 외부인에게 자리를 권하는 것은 특례였다.
운현이 신승의 사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사락.
자리에 앉는 운현과 객옹을 영천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적풍 진인 역시 운현을 주시했다.
운현에게선 곧은 눈빛과 정순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까와 같은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착각이었나?’
그러나 적풍 진인은 여전히 운현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학우자가 운현에게 말했다.
“대협께서 창룡맹을 세우고 아미와 화산을 도운 것은 들었소. 이 또한 무림의 큰 복이니 감사를 드리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학우자를 흡족하게 했다.
학우자뿐 아니라 검파 출신의 원로들은 운현에게 시종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아미와 남궁세가가 창룡맹과 함께하고 있으며 화산 역시 가맹하였다 들었소. 마땅히 우리 무당도 힘을 보태 강호 무림의 안위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나…….”
그건 다른 원로들 들으라는 의도로 한 발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파 이외의 원로들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일부 절차상의 문제와 원로들의 견해가 크게 다른 탓에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뜻을 같이하는가는 전적으로 무당파가 선택할 일이지요.”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허나 강호 무림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행히 장강 수군도독부가 제 뜻을 이해하고 협력하기로 하였으니까요.”
원로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한 원로가 운현에게 물었다.
“자, 장강 수군도독부라 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장강 수군을 총괄하시는 진림 도독께서 전적으로 제게 협력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미 대규모 수군 훈련이 준비되고 있으니…….”
운현은 빙긋 웃었다.
“장강이 영웅맹의 세상이라는 이야기는 곧 옛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원로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화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소?”
학우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장강 수군도독부가 움직였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운현은 주저없이 말했다.
“피로 맹세하여 뜻을 같이하는 맹원에게 어찌 숨기는 일이 있겠습니까?”
학우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영웅맹이니 뭐니 해도 장강 수군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본격적인 토벌은 아니지만, 운현이 말한 ‘대규모 수군 훈련’이 가져올 결과는 학우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창룡맹에는 이미 화산과 아미, 남궁세가가 있다.
운현이 신승의 사제임을 생각하면 소림이 가맹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런.’
학우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무당만 제외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검파의 원로들 역시 강호 무림의 일에 해박한지라 학우자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여러분.”
굳은 표정으로 학우자가 말했다.
“창룡맹 가맹에 대해 다시 논의할 것을 제안하오. 마침 창룡맹의 맹주께서도 계시니 궁금한 것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소?”
“그러나 장문인이 현재 궐석 중이오.”
한 원로가 말했다.
“이런 중대한 논의를 장문인 없이 한다는 것은…….”
그는 동의를 구하듯 적풍 진인과 영천자를 바라보았다.
소위 ‘절차상의 문제’로 가장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적풍 진인과 영천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풍 진인도, 영천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객옹과 운현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학우자가 물었다.
“적풍 진인의 뜻은 어떠하시오?”
“음. 그게…….”
적풍 진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로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니 검파에 끌려가는 것 같아 싫고, 그렇다고 반대하자니 아까 보았던, 아니 본 것 같았던 운현의 기운이 영 마음에 걸린다.
적풍 진인은 짐짓 도호를 외며 눈을 지긋이 감고 말했다.
“……논의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학우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적풍 진인의 태도가 변한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눈을 빛내며 약당의 영천자에게도 물었다.
“영천자께서는 어떻소?”
“크흠. 나는…….”
인상을 쓰며 굳은 목소리로 말하려던 영천자가 흠칫했다.
객옹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 나는…….”
영천자는 말을 더듬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객옹의 서늘한 눈빛은 마치 언제라도 과거의 일이 재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으윽.’
결국 영천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약당의 자존심을 위해, 그리고 무당파를 위해.
“……나, 나는 그다지 상관없소이다.”
말하는 영천자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반면 학우자의 얼굴은 크게 밝아졌다.
“감사하오. 혹시 반대하는 분이 있으시오?”
이의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문인에 대해 말을 꺼냈던 원로도 영천자와 적풍 진인의 태도를 보고는 입을 닫아 버렸다.
학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바로 논의를 시작합시다.”
“잠깐.”
영천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원로원의 논의는 본디 기밀인즉, 창룡맹의 맹주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옳지 않소. 혹 그에게 물을 것이 있다면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소.”
원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우자는 운현과 객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분께서는 잠시 객당에서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운현이 학우자에게 말했다.
“기혼단에 중독된 이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
청송 진인의 눈동자가 빛났다.
무당의 창룡맹 가맹이 논의되는 순간에도 운현은 청송 진인의 부탁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원로들의 반응은 달랐다.
대부분의 원로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당은 아직 창룡맹이 아니다.
외인인 운현에게 중독된 제자들을 보여 준다는 것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학우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운 대협, 그것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청송 진인의 것이었다.
저벅.
청송 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노년의 청송 진인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로직을 걸고 모든 책임을 제가 지겠습니다. 그러니 운 대협께서 본문의 제자들을 살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원로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당파의 원로는 평생을 바쳐야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영예로운 직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로직에서 물러나면 그것은 곧 은거를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 청송 진인이 자신의 원로직을 걸고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청송 진인! 그런…….”
학우자조차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청송 진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노년의 그 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