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여파(餘波)
사천성 성도, 태평맹 총단.
대외 총괄군사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던 당설련은 한 장의 서류에 시선이 멈췄다.
“이건 뭐지?”
바스락.
서류를 드는 당설련에게 수하가 말했다.
“장강 수군의 연례 훈련에 대한 보고입니다.”
“그게 왜? 무슨 문제가 있나?”
수군의 연례 훈련은 언제나 있어 온 행사다.
당설련에게 따로 보고가 올라올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년과 조금 양상이 다르다고 합니다.”
수군 훈련 계획은 본래 군의 기밀에 속해 접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과 물자가 관련된 일이다 보니 대강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준비하는 물자가 예년의 스무 배라고?”
당설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이번 수군 훈련이 전례 없는 대규모로 실시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설마 훈련에 참가하는 수군의 규모가 스무 배라는 뜻이야?”
본래 수군 훈련은 모든 장강 수군이 아닌, 선별된 일부만이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무 배라면 장강 수군의 절반 가까이 참가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수하가 즉시 답했다.
“규모 자체는 이전의 세 배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소요 물자가 폭증한 것은 훈련 기간이 길어지는 것 때문이라고 예상합니다.”
“기간이 길어져?”
“네. 그렇습니다.”
“흐음.”
당설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전까지의 수군 훈련은 전선들이 열을 지어 장강을 따라 항행하는, 주로 짧은 구간의 대도시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이었다.
기간도 한 달 정도였고 실제 장강에 수군 전선들이 떠 있는 기간만 따지면 열흘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시끄럽던 장강도 잠잠했다.
장강 수군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사람은, 상단이든 문파든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보다 세 배의 규모에, 훈련 기간까지 길어진다고?’
당설련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훈련지는 어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파악해.”
“알겠습니다.”
수하는 즉시 답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다시 한번 말했다.
“설령 무리가 되더라도 반드시 알아내야 해. 알았어?”
당설련의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수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나가 봐.”
당설련의 말에 수하가 예를 표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저 기우라면 좋겠지만…….’
장강 수군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마치 산이나 강과 같은 존재였지만, 만일 당설련이 염려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는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네가 또 뭔가 한 거야?’
그녀의 눈앞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득.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당문의 눈꽃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
항주 영웅맹, 맹주전.
화려한 의자에 앉은 철혈사왕 염중부가 팔걸이를 내리쳤다.
쾅.
“당장 훈련 계획을 알아 와!”
염중부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마치 불에 데인 황소처럼 그는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허, 허나 이것이 한계입니다.”
문사 차림의 수하가 당황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가뜩이나 관부에 연줄이 적은 데다 특히 수군은 알아낼 방도가 전혀 없어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염중부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돈은 뒀다 어디 쓸 건가? 칼은 뭐 하러 들고 있어? 알 만한 자를 포섭하든, 회유하든, 협박하든 알아내란 말이다!”
우직.
염중부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가 부서졌다.
하지만 염중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반드시 찾아내라! 수군 훈련에 필요한 물자가 왜 스무 배로 뛰었는지, 훈련지가 어디인지 반드시 찾아내! 찾아내지 못하면 널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후우욱.
분노한 염중부는 난폭한 살기를 내뿜었다.
문사 차림의 수하는 순식간에 안색이 변하며 푸들푸들 경련했다.
“꺼헉, 꺽…….”
염중부의 살기는 그가 감히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죽을 판이었다.
“……매, 맹주님. 제발 자, 자비를…….”
으득.
철혈사왕 염중부는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무능한 수하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웅맹은 사실상 급조된 조직이라 체계도, 인원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더구나 수적과 녹림을 기반으로 시작되었으니 관에 연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염중부는 살기를 거뒀다.
털썩.
“커헉!”
수하는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억. 컥.”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염중부는 서늘한 시선으로 말했다.
“반드시 알아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았나?”
“조, 존명.”
땀을 줄줄 흘리며 수하는 대답했다.
하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지만 관인을, 그것도 군의 기밀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의 상급 무관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문득 염중부가 말했다.
“……남경의 기루를 뒤져라.”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며 염중부가 내뱉었다.
“무관을 상대로 협박하는 건 위험이 크고 뇌물을 쓴다 해도 시간이 걸린다. 차라리 남경의 기루 중에 수군도독부 무관들의 출입이 잦은 곳을 뒤져.”
뇌물을 준다고 얼씨구나 받을 상급 무관은 없다.
아무리 돈을 쓴다 해도 연줄을 만드는 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본디 무관은 혈기 왕성하니 분명 기녀에게 푹 빠진 놈이 있을 것이다. 기녀에게 훈련 계획을 빼내게 해. 기녀 따위, 무슨 수단을 써도 상관없을 테니까.”
무관이 아닌 기녀라면 회유든, 협박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영웅맹 도적들에겐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고개를 숙이는 수하의 표정은 한결 밝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염중부는 수하를 노려보았다.
“실패하면 찢어 죽이겠다.”
“네, 네!”
수하는 몸을 떨었다.
눈살을 찌푸린 염중부가 말했다.
“나가.”
수하는 급히 예를 표하고는 뒷걸음으로 허둥지둥 맹주전을 나갔다.
커다란 맹주전에 홀로 남은 염중부는 이를 갈았다.
으득.
설마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창룡맹이 반영웅맹이라지만 실제로는 태평맹과 경쟁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정확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상대가 일반적인 무림인이었다면 말이다.
“……놈.”
염중부는 분노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한 사람을 향해, 염중부는 꺼지지 않는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
천태상이 대전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쿵.
“속하의 무례를 벌하시옵소서.”
쿵, 쿵.
고요한 대전에 천태상이 이마를 찧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지태상과 인태상은 그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만하라.”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일대상인이 말했다.
천태상은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를 보고자 한 것은 나의 변덕이었다.”
사락.
일대상인은 돌아섰다.
그 목소리에 불쾌함은 조금도 없었다.
“또한 그가 문서의 주인임을 확인하였으니…….”
저벅, 저벅.
일대상인은 대전 앞쪽에 놓인 커다란 의자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의자에 앉았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천태상을 내려다보는 일대상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으나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부드러웠다.
세 명의 태상은 일대상인이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파월일식을 스스로 깨우친 것에 더하여 그 이상의 검이라니…….”
일대상인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참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지 아니하냐?”
말하는 그의 입술은 분명 웃고 있었다.
천태상도, 지태상도 그리고 인태상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일대상인은 변덕이라 말했지만 애초에 동기는 문왕의 죽음과 그 죽음을 이용하지 않는 운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운현의 검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의미를 잃고 퇴색해 버렸다.
사람의 인륜과 도덕은 물론 핏줄의 정마저도 일대상인 앞에서는 미련, 혹은 그 잔재에 불과한 것이다.
스스로 운현에게 말했듯이 말이다.
슥.
천태상은 고개를 들었다.
피가 흐르는 이마에도 아랑곳 없이 그는 일대상인에게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말하던 천태상이 흠칫했다.
“주군!”
천태상은 놀란 어조로 외쳤다.
의아해하던 지태상과 인태상도 흠칫 놀라며 경악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일대상인의 옷이, 정확히는 옆구리 부분이 길게 갈라져 있었다.
겉옷의 옷자락에 가리어 보이지 않던 부분이 그제야 드러난 것이다.
“이, 이 어찌 된…….”
“후후후.”
일대상인은 웃음을 흘렸다.
세 명의 태상은 움찔했다.
턱을 괸 채로 일대상인은 말을 이었다.
“파월일식은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슥.
일대상인은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베어져 있는 것은 그저 옷자락뿐, 혈흔은커녕 상처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
그 순간을 일대상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운현이 펼쳐 낸 예검 앞에서 일대상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검, 천하를 빼어 들고서도 말이다.
만일 운현의 검이 그보다 더 깊어 하늘을 가를 정도였다면, 일대상인은 자신의 오판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후후.”
일대상인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이 흔적은 그가 이제껏 사람으로 남아 있었던 인고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 명의 태상에겐 충격이자 믿기 힘든 경악이었다.
천태상은 이를 악물었다.
운현에 대한 그의 판단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무제는 어디 있느냐?”
문득 일대상인이 말했다.
천태상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천산행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련도 그와 함께 있겠군.”
“그렇습니다.”
일대상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천태상이 물었다.
“돌아오도록 명하리이까?”
“아니.”
일대상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의 운명이 그를 이끌 것이니 놓아두어라. 비련의 집착이 안타깝기는 하나 그 또한 그의 것이니.”
무제와 비련, 그리고 문왕은 일대상인이 직접 거둔 자들이다.
천태상은 일대상인의 뜻에 고개를 숙여 복종했다.
잠시 후, 천태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천하패령은 어찌할까요?”
인태상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천하패령은 일대상인이 문왕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영패이자 동시에 일대상인의 뜻을 상징했다.
문왕이 죽은 지금 천하패령은 주인을 잃은 채 보관되어 있었다.
일대상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아이가 없으니 그 아이의 계획도 없다.”
냉정한 그 말에 인태상은 고개를 떨궜다.
이제 문왕은 완벽하게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
으득.
인태상은 운현을 향한 복수심에 이를 갈았다.
“그러면 천하패령을 거두심이…….”
천태상이 다시 말하려는데 일대상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냥 두어라.”
스륵.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대상인은 말했다.
“문서의 주인과 천하패령의 인연이 깊으니, 그 또한 하늘이 정한 대로 흘러갈 터이니까.”
그 말에 세 명의 태상은 암천무제를 떠올렸다.
암천무제가 천산행에서 돌아온다면 천하패령의 새로운 주인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기다림이 헛되어 끝내 빈손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여겼더니.”
일어선 일대상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참으로 즐거운 날이 아니더냐?”
슥.
일대상인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