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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56화 (356/530)
  • 356화. 하늘 밖의 하늘

    운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자 일대상인의 기세도 변했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누던 가벼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일대상인의 눈동자는 무인의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우웅.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운현이 천천히 미명을 움직였다.

    스륵.

    그건 너무나 평범한 검로였다.

    그저 팔을 뻗어 검끝을 옆으로 향한, 그것뿐인 자세였다.

    그러나 그 순간 일대상인의 표정이 변했다.

    후웅.

    미명의 검끝이 아래를 향해 움직였다.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운현의 미명이 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객옹은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저건!’

    그건 바로 객옹 자신의 천향접을 파훼한 검이었다.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달랐다.

    우우우웅.

    아무런 내력도 담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원을 그려 나가는 운현의 미명은 완연한 검기를 두르고 있었다.

    ‘큭.’

    뒤에서 지켜보던 지태상은 자신의 팔이 움찔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당장 막아야 한다.

    검에 미친 자, 검옹 지태상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무엇인지 모를 저 검식이 끝나기 전에, 허공에 그려지는 저 원이 완성되기 전에 멈춰야 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지태상은 자신을 짓누르는 그 엄청난 압박과 초조에 이를 악물었다.

    앞에 일대상인이 버티고 서 있지 않았더라면 지태상은 당장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지태상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인태상은 두 손을 움켜쥐고 눈을 부릅뜬 채 운현을 노려보고 있었고, 천태상조차 눈살을 찌푸린 채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대상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리에 선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현의 검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우웅.

    운현의 검은 거침없이 원을 그려 나갔다.

    영원처럼, 혹은 찰나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어느새 지나고, 운현의 검은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락.

    마치 운명처럼 미명이 원을 완성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화악.

    객옹과 삼태상은 푸른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운현도, 그가 완성한 검의 궤적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오직 부드러운 빛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지금 이곳이 관도 한가운데라는 것도, 빛이 보일 리 없는 한낮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밤에 세상을 비추는 푸른 달빛 같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은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쿠우웅.

    묵직한 충격음이 천천히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온몸을 울리는 그 소리에 세 명의 태상은 정신을 차렸다.

    ‘아차!’

    지태상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들었다.

    조금 전 그 놀라운 광경에 시선과 마음은 물론 생각조차 완전히 빼앗겼던 것이다.

    만약의 경우 일대상인을 지켜야 할 자신들이 이토록 무방비상태가 되다니,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지태상은 보았다.

    후우우웅.

    일대상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는 그의 뒷모습은 변함없이 굳건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일대상인의 검, 천하(天下)였다.

    “……사, 상인께서.”

    옆에서 인태상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검을 쥐시다니…….”

    으득.

    천태상이 이를 악무는 것도, 그가 주먹을 움켜쥐는 것도 지태상은 보았다.

    지태상 역시 입술을 깨물며 일대상인을 바라보았다.

    비록 뒷모습이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대상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놀랍구나.”

    스륵.

    일대상인이 검을 내리며 말했다.

    “네가 어찌하여 비천무서의 파월일식을 아는 것이냐?”

    그 모습에 객옹은 소름이 돋았다.

    ‘이럴 수가.’

    조금 전 그 놀라운 검식 앞에서도 일대상인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다만 하나, 검을 들었다는 것뿐이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와 입가에 머무는 미소를 보며 객옹은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운현은 아니었다.

    “이것은.”

    가볍게 검을 내리며 운현이 말했다.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입니다.”

    “예검?”

    일대상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잠시 생각하던 일대상인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너는 이미 지혜의 끝을 보아 하늘의 힘에 닿았구나.”

    “아닙니다.”

    운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감히 지혜의 끝을 보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일대상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그리고 이 예검 또한, 제 전부는 아닙니다.”

    화륵.

    일대상인의 눈동자가 단번에 불타올랐다.

    그는 예검을 하늘의 힘이라 말했는데, 운현은 그것조차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격동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그것이, 정말이냐?”

    운현은 주저없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대답은 결코 거짓도, 허세도 아니었다.

    비록 예검은 백호실전검 삼식 중 운현이 완성한 마지막 검식이기는 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와불이 하늘에 숨은 용과 같다고 평했던 검.

    검기는커녕 내력조차 없었던 운현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던 검.

    그것은 바로 백호수련검이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일대상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내게는 또 다른 검이…….”

    “현아!”

    순간 터져 나온 그 목소리는 객옹의 것이었다.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호칭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객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운현은 객옹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무감(無感).

    영호준이 심마로 표현했던 그것을 운현이 사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객옹은 걱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정확한 판단이었다.

    “……때로는.”

    객옹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가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없는 무감(無感)으로 운현을 빠져들게 하는 검.

    그저 심마라고 혹은 무감이라 부를 뿐인 그 검을, 지금 운현은 펼치려는 것이다.

    운현의 그 눈빛 앞에서 객옹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러하다.”

    일대상인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운현도, 객옹도 고개를 돌렸다.

    일대상인이 불길 같은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길이.”

    스륵.

    일대상인은 자신의 검, 천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천하의 검끝을 운현에게 향하는 바로 그때였다.

    “상인 님.”

    도사의 복식을 한 천태상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일대상인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삼가 말씀드리건대.”

    쿵.

    이마를 땅에 박은 채 천태상이 말했다.

    “천기(天氣)가 이롭지 않습니다.”

    지태상도, 인태상도 흠칫 천태상을 돌아보았다.

    천태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런 자리에서라니.

    이건 일대상인에게 물러서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당장 일대상인의 엄청난 분노를 가져올 것이 분명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말을 지금 천태상이 내뱉은 것이다.

    꿈틀.

    아니나 다를까?

    일대상인의 눈썹이 다시금 크게 경련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대상인은 노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완연히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스륵.

    일대상인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운현을 똑바로 노려보며 일대상인은 말했다.

    “나를 하늘에서 끌어내린 자답구나.”

    조금 전 일대상인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른 것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사람의 모든 감정과 이치를 버렸다 여기던 일대상인이었건만, 운현의 한마디에 무인의 혼이 불타오른 것이다.

    그것은 일대상인 자신조차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릉.

    일대상인은 자신의 검, 천하를 갈무리했다.

    검이 모습을 감추고 화려한 옷자락이 그 모습을 가렸다.

    “……천하패령은.”

    일대상인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마지막 미련이다.”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대상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천하패령을 문왕에게 맡겼다. 그 역시 내 미련의 잔재이자,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흔적이니까.”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인태상이 다시금 비통한 표정을 짓는데, 일대상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다.”

    일대상인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어떻게 봐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눈빛이 아니었다.

    “허나 네가 여전히 사람의 일에 매여 있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비록 네가 내게 특별한 자로 운명 지어졌다 할지라도.”

    서늘한 눈빛으로 일대상인은 말했다.

    “그래서는 하늘 밖의 하늘에 닿지 못할 테니까.”

    그의 말을 운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대상인이 더 이상 대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락.

    일대상인이 두 손을 뒤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세 명의 태상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는.”

    그 목소리는 어딘가 이상했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마치 먼 곳에서 울리는 듯 명확하지 않았다.

    “네 검이 하늘을 가를 수 있기를 바란다.”

    웅웅웅.

    “윽.”

    담소하가 신음을 흘리며 귀를 막았다.

    조관은 물론 영호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대상인과 삼태상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남은 것은 마차의 잔해와 파괴의 흔적뿐이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관도를 스쳐 지났다.

    운현은 천천히 미명을 갈무리했다.

    스릉.

    “괜찮냐?”

    어느새 다가온 객옹이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감사합니다, 객옹 님.”

    그러나 객옹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만일 천태상의 만류로 일대상인이 물러서지 않았다면, 운현은 지금쯤 무감, 혹은 심마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으세요?”

    담소하가 근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담 제.”

    “다행이네요.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난데없이 일대상인이 왜…….”

    사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일행의 마차는 박살이 나서 파편만이 남아 있었고, 멀쩡하던 관도는 지진이라도 난 듯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다.

    “아까 천기가 이롭지 않다고 한 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에 갑자기 물러난 것 같던데요?”

    “사정이 있다는 뜻이다.”

    객옹이 조용히 답했다.

    “우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그들만의 이유가.”

    “으음.”

    담소하는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그게 뭘까요? 아무래도 상당히 중요한 일인 것 같던데요.”

    아까 일대상인은 분명 운현과 결착을 지으려 했다.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물러날 정도라니,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현 역시 일대상인이 남긴 말들을 조용히 되새겨 보고 있었다.

    “아차!”

    그때 문득 영호준이 외쳤다.

    그는 그제야 생각난 듯 급히 주위를 살폈다.

    “이런! 쯧쯧…….”

    마부의 시신을 발견한 건 금방이었다.

    처음 마차가 부서질 때 이미 절명한 것이다.

    영호준은 도호를 외고는 마부의 시신을 임시로 수습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한숨을 쉬며 영호준은 말했다.

    “우선 마차를 구해야겠군요. 아마도 관도를 따라가면 마을이 있을 겁니다.”

    담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수고해 주세요. 총군사님.”

    그 말에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무슨…….”

    항의하려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경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과 객옹뿐이다.

    감히 객옹께 마차를 구해 오라 할 수는 없으니, 결국 마차를 구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끄응.”

    영호준은 신음을 흘렸다.

    제아무리 똑똑한 그라도 이번에는 빠져나갈 방책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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