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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55화 (355/530)

355화. 일대상인(一大上人)

일대상인은 커다란 체구를 가진 노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위압적인 기세는 그의 나이를 생각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실의 사람처럼 위엄을 강조한 화려하고 긴 옷을 입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군왕과 지배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벅.

일대상인은 마차의 잔해 사이에 멈춰 섰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적의나 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맹주님.”

영호준이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휘릭, 탁.

일대상인의 뒤에서 또 다른 이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운현이 이미 아는 자들이었다.

“……놈.”

아드득.

인태상이 운현을 향해 이를 갈았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 같던 인태상의 뚱뚱한 얼굴은 아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긴 수염과 커다란 대검을 지닌 지태상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 또 한 사람, 언뜻 평범하게 보이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도사 복식의 노인은 아마도 천태상일 듯했다.

슥.

운현은 영호준의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똑바로 세웠다.

“……괜찮겠습니까?”

영호준의 걱정은 당연했다.

그러나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운현은 영호준을 가볍게 뒤로 밀어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마치 모두를 보호하듯이.

저벅.

곧게 몸을 세운 운현은 일대상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일대상인이군요.”

“……그렇다.”

일대상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그는 빛나는 눈동자로 운현을 향해 답했다.

“과연 뛰어나 보이는구나.”

일대상인이 운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놀랍지는 않군.”

“놀라운 것을 원한다면.”

운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인태상과 지태상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훗.”

일대상인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나쁘지 않다.”

여전히 운현을 바라보며 일대상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가 차라리 너와 같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 말은 운현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 하는 것 같았다.

인태상은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더니 결국 고개를 떨구고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일대상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너는 문서의 주인이냐?”

“문서가 무엇입니까?”

“모른다.”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일대상인은 스스로도 모르는 책의 주인을 찾고 있다는 말인가?

“허나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일대상인이 말했다.

“그것은 천지의 조화처럼 비천무서와 짝을 이루는 유일한 것이며 하늘의 무력이 인정하는 단 하나뿐인 상대다.”

운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대상인이 말하는 문서는 책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물건조차도 아닐 수 있었다.

불길 같은 눈동자로 운현을 바라보며 일대상인은 물었다.

“네가, 문서의 주인이냐?”

“아닙니다.”

운현은 일대상인에게 말했다.

“그리고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단호한 거부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원한다 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원치 않는다고 피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운명처럼 어느 날 갑자기 너를 찾아오는 것이다.”

운현은 흠칫했다.

어느 순간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왔던 백호수련검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운명처럼 보고야 말았던 그 놀라운 세계.

이를 악물었지만 순간의 흔들림을 숨길 수는 없었다.

“……역시.”

일대상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로구나.”

“경이(驚異)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운현은 일대상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검의 길을 걷는 무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운명 같은 순간을 느꼈다 해도, 문서의 주인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합리나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고집이 세구나.”

일대상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나쁘다 할 수는 없지.”

슥.

뒷짐을 지고 있던 일대상인이 한쪽 손을 운현에게 내밀었다.

“오늘.”

불길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일대상인이 말했다.

“내가 너를 시험하겠다.”

훅.

일대상인이 손끝을 모아 가볍게 위로 올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퍼퍼퍽.

좌우의 땅이 뒤집히며 위로 터져 나갔다.

“으악!”

담소하는 비명을 지르며 객옹에게 달라붙었다.

조관과 영호준은 물론이고 객옹의 안색도 변했다.

삼태상을 통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일대상인의 무위가 이 정도일 줄은 그도 몰랐기 때문이다.

“거절은 용납하지 않는다.”

일대상인이 운현을 향해 말했다.

“거절하지 않습니다.”

운현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객옹과 영호준에게 눈짓을 했다.

객옹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운현의 뜻을 따랐다.

저벅.

운현이 한 발 앞으로 나가는 것과 함께 일행 네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단호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했다.

“여기서 당신을 쓰러뜨리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난다.

운현에게 사실 영웅맹이나 태평맹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일대상인이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그저 강호 무림의 이권 단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정의 특별 감찰어사 역시 마찬가지다.

일대상인에 대한 염려가 없어진다면 나머지는 도찰원이나 조정의 통상적인 감찰 업무에 맡길 뿐이다.

그러므로 일대상인과 대결하는 것은, 운현에겐 오히려 바라마지 않던 기회였다.

“그 말은.”

슥.

일대상인이 뒷짐을 푸는 것과 동시에 삼태상이 뒤로 휙 물러났다.

탁.

거리를 벌린 그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네가 한 말들 중 가장 실망스럽구나.”

펄럭.

일대상인의 옷이 가볍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비무나 대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 옷자락도 일대상인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두 팔을 아래로 가볍게 벌린 일대상인이 운현에게 말했다.

“덤벼 봐라.”

일대상인의 기세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특유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그뿐, 사방을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기세도,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하는 칼날 같은 살기도 없었다.

하지만 운현은 볼 수 있었다.

우우웅.

일대상인의 주위로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도, 일대상인은 이미 주변을 장악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운현조차 안색이 변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스릉.

운현은 북해의 검, 미명을 뽑았다.

일대상인은 빈손이었지만 운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운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일대상인의 눈이 빛났다.

“……과연.”

사뭇 감탄하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날 끌어내릴 만하구나.”

운현은 일대상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슥.

운현은 미명을 쥐고 눈앞에 똑바로 세웠다.

웅.

미명이 가늘게 울었다.

언제라도 운현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처럼.

“후우우.”

운현은 반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츠즈즈즈.

발밑으로 때아닌 서리가 번져 갔다.

객옹도, 영호준도, 담소하와 조관은 물론 삼태상마저 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후우우우욱.

운현을 중심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한겨울의 눈 폭풍처럼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쿠쿠쿠쿠쿠.

그 모습을 일대상인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슥.

운현의 검이 천천히 하늘로 솟는 그 광경을 조관과 담소하는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전율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영호준과 객옹의 놀라움은 더더욱 컸다.

‘이, 이럴 수가…….’

객옹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운현의 경지가 어떠한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은 객옹의 눈을 의심케 했다.

곧게 치켜든 운현의 검에서, 마치 천 년의 거목 같은 존재감이 뿜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우우욱.

운현의 검, 미명에 담긴 힘은 더더욱 커져 갔다.

마치 하늘을 뚫을 듯한 그 거대한 존재감에 삼태상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쉭.

운현이 미명을 그어 내렸다.

그와 함께 백호실전검 제삼식, 중검이 일대상인을 향해 떨어졌다.

콰자자작.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존재가 일대상인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운현의 검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놀라지 않았다.

스륵.

일대상인은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한 손을 하늘로 올려치는 것과 동시에, 그리고 다른 손을 땅으로 강하게 내질렀다.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 양.

쿠웅.

“큭!”

삼태상이 신음을 흘렸다.

객옹이 즉시 담소하와 조관을 끌어당겼고, 영호준도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압력에 몸을 낮춰야 했다.

콰지직.

일대상인의 발밑에서 섬뜩한 소리가 퍼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콰아아아아.

마치 커다란 종소리가 멀어지는 듯한 여운이 사방에 퍼져 갔다.

백호실전검 제삼식, 중검이 끝난 것이다.

“이것이.”

사락.

일대상인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네 전부더냐?”

일대상인이 서 있던 관도에는 흉측하게 벌어진 균열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런 충격조차 받지 않은 채로.

“아닙니다.”

운현 역시 담담하게 말했다.

백호실전검 제삼식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운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중검을 받아 내는 것을 보니 모르고 한 건 아니군요.”

“허.”

일대상인의 눈빛이 변했다.

“……날 시험했다고?”

“그렇습니다.”

일대상인이 버텨 낼 줄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검을 펼쳐 낸 것은, 그가 진정으로 흐름을 제어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운현 역시 일대상인을 시험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 보니 나를 시험하는 사람이 꼭 나보다 잘났다는 법은 없더군요.”

담담한 눈빛으로 일대상인을 쳐다보며 운현은 말했다.

“때로는 천박한 자들이 고귀한 자들을 멋대로 헐뜯는 세상 아닙니까? 스스로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일대상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실소를 흘렸다.

“과연.”

일대상인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네 말대로다. 과연 그러하지. 후후후.”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뒤에 있던 삼태상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일대상인이 누군가와 이토록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웃기까지 하다니.

그들에겐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일대상인은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에는 완연한 호기심이 머물러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운현은 검을 몸 가까이 세웠다.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운현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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