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화산파의 결정
화산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도사들과 화산파 제자들은 새벽 어스름이 채 찾아오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언을 외우며 경내를 돌았다.
화산을 찾은 참배객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이른 새벽에 침상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운현 일행이 머무는 작은 전각은 해가 뜨고도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긴 여정의 피로와 밤늦도록 이어진 치료 탓에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화산파는 두 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전각을 지키게 하여 운현 일행의 휴식이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정작 가장 피곤할 것 같은 객옹과 운현은 새벽부터 일어나 있었지만 말이다.
“흠.”
운현의 말을 듣던 객옹은 찻잔을 쥐었다.
“놀라운 이야기로구나.”
“네. 사실 저도 만년빙정이 보여 준 환상이나, 낙일의 기운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네 백호수련검 말이다.”
객옹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천하에 그런 검법이 존재하는 것도 놀랍거니와, 네가 그 검법을 통해 지극한 경지를 엿보았다는 것이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로구나. 그러니 일대상인이 너를 문서의 주인이라 여길 수밖에.”
“누군가는 천운이라 하더군요.”
운현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기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제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의형 일충현이 없었다면 운현이 검의 길에 들어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작에 낙향하여 서원을 꾸리거나, 혹은 창룡전 안에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칵.
“아함.”
문이 열리고 담소하가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어, 벌써 나와 계셨네요?”
덜컹.
때마침 감찰어사 조관도 방에서 나왔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고 말았군요.”
운현은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직 이른 아침이니 더 주무셔도…….”
달그락.
문이 열리고 매화검 영호준이 전각으로 들어왔다.
“아, 마침 다들 일어나 계셨군요.”
영호준은 일행을 보며 말했다.
“장로 회의가 잠시 후에 열릴 예정입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석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어,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요?”
담소하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영호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침 시간은 진작에 지나갔다네. 하지만 내가 숙수에게 말해 뒀으니 장로 회의 후에 식사를 할 수 있을 걸세.”
“회의 전에 먹는 게 아니고요?”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뭘 모르는군. 본래 끝나고 먹어야 회의가 빨리 마친다네. 결론도 금방 나오고. 아, 객옹 님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나는 상관없다.”
객옹은 먹는 것에 까다롭지만 대식이나 탐식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와 함께 나온 볶은 곡식이 제법 맛이 좋아서, 객옹은 이미 만족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모시러 오겠습니다.”
영호준은 가볍게 손짓을 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기를 느낀 담소하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남은 것은 향긋한 차와 운현이 남긴 볶은 곡식 조금뿐이었다.
***
화산파 자하각.
십여 명의 화산파 장로들과 운현 일행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로들의 얼굴은 어제보다 사뭇 밝았다.
불진을 쥔 태을 진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화산이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맹주.”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장로들의 예를 받았지만 태을 진인은 아직도 부족하다 느끼는 듯했다.
다른 장로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사태가 수습되었으니, 크흠. 객옹께서 제시한 처방을 소림과 아미, 무당에 전하려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슬쩍 객옹의 눈치를 보며 태을 진인이 말했다.
“좋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는 저희가 전하도록 하지요. 혹시 중독된 분들이 있다면 너무 심하게 대처하지 않도록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그리고 맹주께서 중독자들을 치료하셨다는 언급을 해도 괜찮겠소?”
“저는 그저 상황이 호전되도록 도왔을 뿐입니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치료한 것도 아니며, 반드시 좋아진다고 할 수도 없다는 점을 명시하신다면, 괜찮습니다.”
“그리하리다.”
태을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내용은 소림과 무당, 아미의 장로들에게만 은밀히 전달될 것이니 혹 잘못된 소문이 퍼질 것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좋소.”
유서 깊은 문파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공공연하게 말할 리가 없었다.
이번 기혼단 사태는 강호의 또 다른 비사로 은밀히 묻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빈도는 소청이라 하오.”
길고 가는 수염을 기른 뚱뚱한 도사가 불쑥 말했다.
“창룡맹이 반영웅맹의 기치를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자 하오.”
소청 진인의 물음에 답한 사람은 영호준이었다.
“그것은 창룡맹 총군사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호준은 장로들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영웅맹에 대한 대책은 이미 했으며, 또한 하고 있습니다.”
소청 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 이미 했다니?”
창룡맹이 태평맹으로부터 아미를 구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영웅맹과 관련하여 무엇을 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었다.
소청 진인이 의아해 한 것도 당연했지만 영호준은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영웅맹의 기를 단 배는 장강 통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강 수군이 대대적인 훈련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수군?”
“훈련이라니?”
장로들은 영호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물론 이것은 연례적인 훈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유례없이 클 것이고, 지나는 배들은 모두 검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웅맹의 기를 달았거나 그와 연관이 있는 상단의 배들은 특히 더욱 까다롭게요.”
소청 진인의 눈빛이 변했다.
다른 장로들 역시 영호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럼 설마…….”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강 수군도독이 이미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오오.”
“그것이 정말인가?”
장로들은 놀란 표정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청 진인이나 태을 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호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또한 남궁세가가 봉문 상태를 끝내고 창룡맹의 일원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했으며, 곧 예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검왕가, 남궁세가의 저력을 화산파 장로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장강 수군의 은밀한 비호까지 얻는다면 그 결과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제 영웅맹의 기세는 꺾였습니다. 창룡맹의 맹주께서 사실상 장강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장로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강을 끊었다는 영호준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수군이 장강을 틀어막으면 영웅맹이 입을 피해는 그야말로 막대했다.
“참으로 놀랍소이다.”
태을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앞으로 화산이 창룡맹에 큰 힘이 되리라 여겼거늘, 이래서야 오히려 우리가 창룡맹의 덕을 보겠구려.”
“허허, 그러게 말이오.”
소청 진인은 물론 다른 도사들도 감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영호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창룡맹의 총군사이자 화산파의 대제자로서 장로님들께 제안이 있습니다.”
장로들은 일제히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실, 아주 특별한 제안이지요.”
영호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날 오후, 운현 일행은 화산파를 떠났다.
본래 며칠간 환자들을 살필 예정이었지만 증상이 이미 호전되어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기혼단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앞으로 금단증상과 후유증을 견뎌 내고 화산파의 제자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이제 그들과 화산파에 달린 문제였다.
따각, 따각.
마차 안에서 담소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어떻게 말 몇 마디로 화산파 제자 백 명과 지부 건물, 그리고 예산까지 얻어 내는 거죠?”
“어허, 말 몇 마디라니. 그리고 백 명을 얻어 낸 것이 아니라 백 명을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걸세.”
영호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객옹 님과 우리 맹주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사실 지금 창룡맹에 크게 공헌하는 것이야말로 화산의 미래를 위한 가장 훌륭한 투자가 아닌가?”
화산파 장로들에게 영호준은 창룡맹에 적극적인 공헌을 할 것을 제안했다.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함으로 당장 창룡맹에 돌아올 이득만 해도 엄청난 데다가, 앞으로 당당한 정파맹으로 자리잡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 안 하는 게 손해라는 것이다.
아미파가 창룡맹에 무한한 신뢰를 보인 것과, 남궁세가는 아예 후계까지 내다보고 있더라고 말하며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임을 강조했다.
그 결과 화산파 제자 백 명을 지원하겠다는 장로 회의의 약속을 받아 낸 것이다.
물론 사전에 장로 회의와 협의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화산파 제자 백 명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컸다.
“사실 영약이나 비급도 좀 뜯어낼까 했지만 장로님들이 그런 건 또 아까워하셔서 말이네.”
담소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문인데 그래도 돼요?”
“사문이니까 그래도 되지.”
영호준은 당당하게 말했다.
“괜찮네. 그렇지 않아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사제들도 아주 많으니까. 그리고 이 사실을 슬쩍 흘리면 아미나 남궁세가도 가만있지 않을 걸세.”
담소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럼 적어도 삼백 명인 거예요?”
화산과 아미, 남궁세가의 제자 삼백 명은 엄청난 무력이다.
과거 남궁세가의 제자 백 명이 움직이는 일에 무림맹이 들썩거렸을 정도니 말이다.
“그 정도는 있어야 어디 가서 뭐라도 할 게 아닌가? 일단 삼백 정도는 되어야 보기에도 그럴듯하고…….”
“삼백 정도로 괜찮겠소?”
문득 조관이 말했다.
“지역 도지휘사에 연락하면 관군 삼천 정도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소. 무력 행사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조 대인.”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압니다. 수군도독부를 움직이는 맹주님이신데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다만 무림에서 화산이나 아미, 남궁세가가 가지는 무게감은 조금 달라서요.”
단순 무력이라면 관군 삼천이 당연히 더 크다.
그러나 문파나 상단에는 관군보다 화산파나 남궁세가의 이름이 더 무섭고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영호준이 무언가 말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객옹 님! 총군사!”
운현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알았다!”
즉시 답한 객옹은 일행이 의아해 할 틈도 없이 마차 문을 향해 일장을 내뻗었다.
콰앙.
문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으악!”
“무슨……!”
턱.
담소하와 조관이 외치는데 객옹이 두 사람의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릭.
영호준 역시 운현을 끌어안고 즉시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마차가 터져 나갔다.
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흙더미와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폭풍 같은 기세가 주변을 휩쓸었다.
휘릭.
객옹은 담소하와 조관의 멱살을 잡은 채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영호준 역시 운현과 함께 그 옆에 내려앉았다.
탁.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담소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객옹과 운현, 그리고 영호준은 흙먼지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객옹은 평소의 무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후욱.
흙먼지가 마치 휘장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저벅.
거대한 체구와 강렬한 눈빛,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
그가 누구인지 운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으득.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바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 일대상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