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해약은 없다 그러나…
운현 일행은 화산파의 한 전각에 앉아 있었다.
탁자에 놓인 찻잔에서 부드러운 차향이 피어올랐지만 참회동에서 본 끔찍한 장면의 충격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만 해도 저런 참혹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화산파의 도사, 소요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혼단 사건의 조사 책임자인 그는 부상을 입어 한쪽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구금한 지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발작하더니 급속히 용태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실혼인의 모습으로…….”
옆에 앉은 태을 진인이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소요자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다른 중독자들 역시 마찬가지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급히 약을 처방하였으나 잠시뿐, 발작을 멈추지는 못했습니다. 이대로는 곧 모든 중독자들이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중독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운현의 물음에 소요자는 태을 진인을 바라보았다.
태을 진인이 말했다.
“삼대제자와 그 이하에서 스물다섯, 이대제자에서 열한 명이외다. 그리고 일대제자 중 한 명이 기혼단을 복용한 것을 적발해 내었소.”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한 문파에서 중독자가 마흔 명에 가깝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인데, 문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일대제자와 이대제자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영호준 역시 참담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중독자가 있을 가능성은요?”
운현의 말에 소요자가 고개를 저었다.
“기혼단은 특유의 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복용을 하지 않고 사흘이 지나면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금단증상이 나타납니다.”
소요자는 모든 제자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장로들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호를 받은 기명제자 급의 도사들 역시 사흘간 구금되어 자신의 결백을 보여야 했다.
소요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가장 먼저 스스로를 구금했었다.
“아직 금단증상을 겪지 않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정도라면 중독이라 할 수 없겠지요. 기혼단을 숨기고 있는 자들 역시 이제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의 소지품과 숙소를 뒤졌지만 화산은 넓고 험하다.
계곡 어딘가에 묻어 두기라도 했다면 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때 문득 객옹이 물었다.
“압수한 기혼단은 어찌했느냐?”
“따로 모아 엄중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소요자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정사대전 당시 파릇파릇한 청년이었던 소요자는 독선을 직접 보지 못했다.
다만 독선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객옹이 독선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불태우고 싶었으나…….”
“다행이군.”
객옹의 말에 소요자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찻잔을 든 객옹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실혼인의 상태로 보건대 기혼단은 강한 중독성을 지닌 데다가 사람의 조직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파괴한다. 이런 유형의 중독에는 해약이 없어.”
객옹의 말에 소요자는 당황했다.
의술에 뛰어난 화산의 도사들도 아직 기혼단이나 금단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객옹은 실혼인을 한 번 본 것만으로 이렇게 단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요자가 객옹의 말을 미심쩍게 생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태을 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그럴 수가…….”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요자와 태을 진인이 눈을 빛냈다.
태을 진인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그는 불진을 마주 잡고 객옹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간청 드리오니 부디 그 방책을 알려 주십시오. 객옹 님.”
소요자는 화들짝 놀랐다.
태을 진인은 화산의 장로다.
화산의 장문인에게도 먼저 예를 받는 그가, 객옹이라는 낯선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락.
운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운현이 말했다.
아니, 숙이려 했다.
슥.
예를 표하려는 운현을 객옹의 손이 막았다.
“네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객옹의 눈빛은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이미 말했지만 신승이 너를 검성의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제라고 한 것은 네가 우리와 같은 반열이라는 의미다. 더구나 너는 내게 스스로를 증명해 보였다.”
단호한 눈빛으로 객옹은 운현에게 말했다.
“네가 말하면 나는 그것이 합당한지 고려할 뿐이다. 그러니 내게 예를 표하거나 기분을 맞춰 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네. 저는 객옹께서 도움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알았다.”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태을 진인을 바라보았다.
“별것 아니니 알려 주마. 너도 자리에 앉아라.”
“감사합니다.”
태을 진인은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소요자는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방금 객옹은 태을 진인을 ‘너’라고 불렀다.
하지만 태을 진인의 표정에는 전혀 불쾌함이 없다.
대체 객옹이 누구기에 태을 진인이 하대를 당연히 여긴단 말인가?
그리고 운현은 어째서, 물론 그가 창룡검주이자 신승의 사제이며 창룡맹의 맹주인 것은 알지만, 이토록 객옹에게 인정을 받는단 말인가?
심지어 화산의 장로보다 더 말이다.
소요자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이미 말했지만 기혼단에는 해약이 없다.”
담담한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그러니 금단증상이 나타나려 하면 즉시 기혼단을 복용시켜라.”
“네?”
소요자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중독자들에게 기혼단을 주라니?
그러나 객옹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최소한의 분량으로 한정해야 한다. 금단증상을 막되, 의존성이 심화되지 않도록 말이다.”
듣고 있던 영호준이 객옹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하, 그러니까 중독된 이들의 현재 상태를 유지시킨다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듣고 있던 소요자는 어째서 객옹이 아까 다행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일 기혼단을 전부 태웠다면 이런 방법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찌해야 합니까?”
영호준의 물음에 객옹이 말했다.
“그다음은 너희 도사들에게 달렸다.”
영호준과 소요자, 태을 진인이 의아해 하는데 객옹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기혼단에 의지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더냐? 그것은 기혼단만이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소요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혼단에 중독된 사실이 발각된 제자들은 소요자 앞에서 통곡하고 절규했으며, 혹은 핏발 선 눈으로 분노를 터트렸다.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궁지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 결과 기혼단을 선택했던 것이다.
객옹의 말은 조사 책임자였던 소요자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니 너희가 주어야 한다. 기혼단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가치 있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이며 기꺼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소요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과연 객옹의 말처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따져 보면 중독자들은 사문의 법도를 어긴 죄인들이다.
그런 자들을, 해약조차 없는 이들을 위해 화산은 기꺼이 수고를 감수할 것인가?
소요자가 태을 진인을 돌아본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희가 그리한다면.”
태을 진인이 조용히 물었다.
“기혼단에 중독된 제자들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이미 말했지만 해약은 없다.”
객옹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들은 평생 금단증상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더 이상 기혼단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빠르게 중독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객옹은 말했다.
“사람은 지극히 연약하지만, 또한 놀라울 정도로 강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태을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태을 진인이 객옹에게 답했다.
“이 또한 화산의 업보이니 마땅히 담당해야 하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소요자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영호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승님. 장로 회의에서 반대한다면…….”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나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되어 있다.”
태을 진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설령 반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해야만 하지 않겠느냐?”
영호준은 말문이 막혔다.
태을 진인의 말처럼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로 할 수 있겠느냐?”
객옹이 말했다.
태을 진인은 다시 한번 도호를 외우고는 조용히 답했다.
“본래 도사는 속인의 어려움을 돕는 것이 당연하거늘, 하물며 사형제 된 이들을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일행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소요자가 눈을 감고 연신 도호를 외우고, 영호준의 눈동자도 촉촉이 젖어들었다.
“감사합니다.”
운현이 태을 진인에게 말했다.
“화산이 창룡맹의 일원이라는 것이 저는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태을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화산의 과오에서 비롯된 일이거늘, 오히려 맹주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소이다.”
“아닙니다.”
운현은 태을 진인에게 말했다.
“그 마땅한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니까요.”
말하는 운현의 눈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운현은 소요자에게 물었다.
“거둬들인 기혼단의 양은 얼마나 됩니까?”
“음, 그것이 제법 많기는 합니다만…….”
소요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태워 버리려 했을 때는 많은 것 같더니, 마흔 명에 가까운 중독자들의 약으로 쓰려니 너무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아!”
영호준이 갑자기 탄식을 터트렸다.
“어쩌면 기혼단에 쓰인 약재를 알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소요자가 묻자 영호준은 객옹에게 말했다.
“문왕이 상단들을 통해 모아들인 약재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혼단 제조에 쓰였다면…….”
영호준은 문왕이 호암상단을 통해 구매한 약재의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객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재만으로 조제법을 알 수는 없겠으나 대략적인 추정은 가능할 것이다.”
영호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듣고 있던 담소하가 불쑥 말했다.
“어, 그런데 그 목록을 믿을 수 있는 걸까요?”
그 목록은 운현을 배신한 이서연에게서 받은 것이다.
과연 그녀가 제대로 된 것을 건네줬을까?
“우선은 그것이라도 써야지. 우선은 말일세.”
영호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다른 생각도 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결코 단기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객옹이 태을 진인에게 말했다.
“중독에서 벗어나더라도 그들은 평생 금단증상과 싸워야 한다. 너희가 끝까지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느냐?”
“어차피 모든 사람은 평생 자신의 연약한 점과 싸워야 합니다.”
태을 진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도호를 외우던 태을 진인은 객옹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객옹께서 오늘 화산을 구하셨습니다.”
그것은 화산파 장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와 찬사였다.
그러나 객옹은 무덤덤했다.
“음.”
화산파 장로의 정중한 예에도 객옹은 슬쩍 고개를 숙인 것이 다였다.
“나머지 중독자들은 어디 있느냐?”
“별채에 따로 구금되어 있습니다.”
대답하는 소요자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문의 법도를 어긴 죄인들이다.
본래라면 계율원에 감금해야겠으나 그 수가 너무 많아 따로 수용해 둔 것이라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을리가 없었다.
“가 보자. 상황을 살펴보고 어느 정도의 투약과 조치가 필요한 지 알려 주마.”
“네!”
소요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옹 역시 일어서며 운현에게 말했다.
“너도 가자.”
“네.”
운현은 주저없이 대답하며 일어났다.
객옹이 왜 자신의 동행을 요청하는 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굳은 표정으로 소요자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