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만사형통
독선이 치료한 바로 다음 날, 아령은 의식을 되찾았다.
처음엔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하루가 다르게 아령의 건강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뛰어놀아도 쓰러지지 않았고, 흙을 만져도 앓아눕지 않았다.
아령의 잠을 깨우던 한밤의 격통도 더 이상 없었다.
밝고 환한 미소가 아령뿐만 아니라 저택 전체에서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수군도독 진림의 저택 후원.
운현 일행과 진림, 그리고 관철훈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탁자에 앉아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부드러운 차향을 음미하며 일행은 놀고 있는 아령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여기! 여기야!”
흙장난을 하던 아령이 시녀를 열심히 불렀다.
시녀가 급히 다가가자 아령이 무언가 손에 턱 건넸다.
손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건 바로 벌레였다.
“꺄악!’
시녀가 기겁을 했다.
아령은 깔깔 웃었다.
“아하하하! 왜 놀라? 이렇게 귀여운데. 꼼지락꼼지락하잖아.”
“아, 아가씨!”
시녀가 질색을 했지만 아령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림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야, 역시 제 딸이군요. 먼저 간 처에게 저도 저런 장난을 하고 놀았지요. 어려서부터 아주 가까웠거든요.”
감회에 젖어 중얼거리던 진림이 눈을 돌렸다.
“객옹 님, 그리고 운 대인.”
뚱뚱한 진림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머리를 든 진림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 딸을 치료해 주심은 곧 저의 생명을 건져 주신 것과 같습니다. 비록 관에 매인 몸이라 목숨은 나라에 바쳐야 하나, 그 외에는 무엇이라도 기꺼이 내어 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독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만 차를 음미했다.
운현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감사합니다, 진 대인.”
진림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황상의 뜻을 받들어…….”
“설명은 안 하셔도 됩니다.”
빙긋 웃으며 진림이 말했다.
“이 진림이 무엇을 하리이까?”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말했다.
“장강에서 수군 훈련을 해 주십시오.”
“흐음.”
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운현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일전에 말씀하신 장강을 끊는 계책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잠시 수염을 매만지던 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이 진림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영웅맹이 바싹 말라비틀어지도록 만들면 됩니까?”
그건 과장도, 허세도 아니었다.
훈련을 핑계로 영웅맹의 기를 단 배를 강제로 구류하고, 관련 있어 보이는 상단의 배들을 모조리 검사하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영웅맹이라도 자금줄이 마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불편을 겪게 되는 상단이나 인근 지역 지방관의 반발이 예상되긴 하지만 황제 직속의 수군도독에겐 찍소리도 못한다.
결국 영웅맹이나 그와 연관된 상단의 입장에서는 장강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것이다.
“아직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장 영웅맹과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수군도독의 협력을 얻었으니 시간은 운현의 편이고, 일대상인의 목적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선은 남궁세가와 협의하여 천천히 진행하시면 될 듯합니다.”
남궁세가는 장강의 사정에 환하다.
어느 도시에서 어떤 종류의 통제를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남궁세가라, 알겠습니다. 앞으로 영웅맹이 속 좀 타겠군요. 돈줄 끊기는 기분이 어떤지는 제가 아주 잘 알지요. 흐흐흐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뚱뚱한 진림의 모습은 그야말로 탐관오리에 다름없었다.
운현은 웃으며 물었다.
“이제 아영이도 건강해졌으니 재물을 모으실 필요는 없겠군요.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이쿠, 제 딸의 은인께 그럴 수는 없지요. 그리고 재물을 모은 건 제 딸을 위한 것도 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진림이 말했다.
“제가 본래 욕심이 좀 많습니다. 하하하.”
운현은 살짝 당황했다.
관리가 대놓고 욕심이 많다고 말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수군도독이 말이다.
“그럼 집무실이 휘황찬란한 것도 그냥 취향이신 건가요?”
담소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 정식 관원이 아닌 데다 관할도 완전히 다른 담소하에게는 수군도독이라도 그리 어렵지 않은 듯했다.
아니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본성이거나.
“아닐세. 이 저택을 보면 알겠지만 내 취향은 옛스럽고 아담한 쪽이지.”
과연 진림의 저택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집무실은 화려하게 해 놔야, 이게 많이 들어오거든.”
슬쩍 손가락으로 동그렇게 원을 만들어 보이는 건 분명 돈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가 받는 것은 철전 따위가 아니겠지만.
“알고 보면 주는 쪽도 나름 머리를 많이 굴린다네. 품에 어음이 든 서찰 둘을 준비하는 건 요즘 기본이지.”
“서찰이라니요?”
“도독부에 은자나 금자가 든 상자를 들고 올 순 없잖은가? 보통은 거대 상단의 무기명 어음을 사용하지. 흔적이 안 남으니까.”
딸을 소중히 여기는 진림은 단 한번도 저택 방문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수군도독부 집무실에서 받았다는 뜻이라, 어떤 의미에선 아주 대담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요? 그럼 서찰 둘은 뭐예요?”
진림의 설명에 담소하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영호준이나 진예림, 조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살피고 간을 보는 걸세. 이 사람은 큰 걸 줘야 하나, 작은 걸 내밀어야 되나 하고 말이야. 이 눈치 작전이 의외로 아주 치열하거든? 잘못하면 주고도 욕을 먹고, 너무 많이 주면 바라는 게 많아지니까.”
“그럼 진 대인께서는 언제나 큰 걸 받으시겠네요?”
“쯧쯧, 그럴 리가 있나?”
당연하다는 듯 진림은 말했다.
“마땅히 둘 다 받아야지.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도 심리전에 진다면 수군도독 못 해 먹네.”
“오오.”
담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고 영호준 역시 감탄의 빛이 역력했다.
“받아도 되는 건지, 먹으면 안 되는지 감별하는 것도 기본적인 소양이고. 알고 보면 수군도독도 참 힘든 자리야.”
수군도독이 힘든 건 그런 이유가 아니겠지만 진림은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
쓴웃음을 짓던 운현이 진림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헌데 진 대인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무엇 말입니까?”
“제게 협조하신 것이 알려지면 계파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텐데요.”
수군도독 진림 역시 소속된 정치 계파가 있다.
그리고 그 계파는 박 공공과 심히 적대하는 관계다.
운현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진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운현으로 하여금 다시 쓴웃음을 짓게 했다.
“적당히 바치면 아무 일 없습니다. 저야 박 공공과 여전히 척을 지겠지만, 그렇다고 운 대인을 의심할 박 공공이 아니니 어차피 상관없지요.”
운현이 비록 진림의 은인이지만 정치적인 입장을 바꾸거나 계파를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진림은 여전히 박 공공의 반대 계파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거야말로 만사형통이군요. 운 대인께서는 뜻을 이루고, 저는 딸의 병을 고친 데다 돈까지 아끼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주 즐거운 날이에요. 하하하.”
뚱뚱한 수군도독 진림의 만족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택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았다.
***
운현 일행은 진림과 관철훈, 아령과 작별했다.
아령은 독선에게 안겨서 눈물까지 보였지만, 독선은 끝까지 담담하기만 했다.
세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일행은 진림의 저택을 떠나 남궁세가로 향했다.
따각, 따각.
마차 안에서 담소하가 감탄하듯 말했다.
“진 대인은 수군도독이신데도 참 인간적인 사람이네요.”
“뭐?”
진예림이 당장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뇌물을 밝히는데 뭐가 인간적이야?”
“그래도 청탁은 안 들어준다잖아요. 객옹 님께 감사하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우리 편이고요.”
담소하의 말에 진예림이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진 도독에 대해서는 도찰원도 이미 알고 있네.”
감찰어사 조관이 말했다.
“허나 대가성이 애매하고, 수군도독으로서 공적과 능력도 확실하여 옹호하는 이들이 많으니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일세.”
도찰원이 진림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그것은 곧 황제 역시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림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황제가 진림을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담소하는 그것 보라는 듯 진예림을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어, 그럼 운 대인께서는 두 계파에 인연을 갖게 되신 셈인가요?”
“그러네?”
진예림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조정 실세인 박 공공은 운현의 가장 큰 후원자다.
그 박 공공을 견제하는 또 다른 계파에 속한 수군도독 진림이 운현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니, 두 계파에 든든한 후원자를 갖게 된 셈이었다.
“우와, 대단하네요.”
담소하가 감탄하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 공공을 중심으로 하는 황실 환관 조직과, 수군도독 진림이 속한 관료 조직 양쪽에 연줄을 가진 셈이지만 조관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하아, 연줄도 양다리라니…….”
진예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운현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혹시.”
영호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사뭇 정중한 태도로 독선에게 물었다.
“역병으로 죽어 가던 마을을 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귀주성의 귀양 북쪽에 있는 이름 없는 산촌이었습니다만…….”
“귀양 북쪽이라면, 칠 년 전 일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잠시 들렀던 적은 있다.”
그 말은 독선이 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독, 아니 객옹께서 그 소문의 신의셨군요.”
“나는 신의가 아니다.”
독선은 담담하게 말했다.
“또한 의원도 아니고.”
의원은 아니면서 절맥증을 고치고, 신의도 아니지만 역병이 돌던 마을을 구했다.
하지만 영호준은 독선의 말에 반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객옹 님.”
고개까지 공손히 숙이며 영호준이 말했다.
그 얌전한 모습에 진예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영호준을 탓할 수는 없었다.
독선이 아니라 말하면 아닌 것이다.
영호준은 공포의 대명사였던 독선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일행의 마음이 모두 영호준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객옹 님도 창룡맹에 들어오신 건가요?”
담소하가 물었다.
영호준이 화들짝 놀라는데 독선이 말했다.
“아니. 나는 그저 이놈과 함께 있을 뿐이다.”
독선은 턱짓으로 운현을 가리켰다.
“아, 그렇군요.”
담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속이 탔다.
‘독선께 어찌 그런 무례한 질문을!’
환우오천존인 독선에게 창룡맹에 들어왔냐고 묻다니, 듣기에 따라서는 그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객옹이 실은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독선’이며, 아주 무시무시한 분이니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고 영호준이 말했지만 담소하나 진예림의 태도는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운현 때문인지도 몰랐다.
담소하나 진예림은 이미 운현이 철혈사왕 염중부,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그를 패퇴시키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독선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곧 저녁때네요? 오늘은 뭘 먹을까요?”
담소하가 즐거운 듯 독선에게 말했다.
운현은 독선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배를 타고 장강을 내려오는 동안에는 정박하는 지역의 음식을 준비했고, 진림의 저택에 머무는 중에는 남경의 특산 요리를 가져왔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매화검 영호준이 각 지역의 온갖 음식을 줄줄 꿰고 있었던 데다가, 독선도 특별한 식사는 하루 한 번 정도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수고한 사람은 총군사 영호준과 수군도독 진림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불만은 전혀 없었다.
독선의 무시무시함을 잘 알고 있는 영호준도, 딸의 목숨을 구한 은인을 대접하는 진림도 말이다.
“객옹 님 덕분에 먹는 시간이 즐거워져서 참 좋아요.”
환하게 웃으며 담소하가 말했다.
독선 덕분에 일행의 식사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진예림 역시 흡족하긴 마찬가지였다.
따각, 따각.
영호준만이 쓴웃음을 속으로 삼키는 가운데, 마차는 남궁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