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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47화 (347/530)

347화. 목숨의 값

운현은 독선과 함께 관의 배에 올랐다.

이미 기다리고 있던 감찰어사 조관과 영호준, 담소하가 합류했고, 진예림도 모습을 보였다.

“진 소저!”

오랜만에 보는 진예림에게 운현은 반갑게 인사했다.

진예림도 방긋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운 대인님. 성도까지 와서 아미산에도 안 오다니,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나한테만 일을 떠맡겨 놓고……. 그런데 누구세요?”

독선을 본 진예림이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흰머리에 흰 수염, 게다가 허연 눈썹까지 길게 기른 독선은 누가 봐도 그 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진예림이 긴장한 것도 당연했다.

“아, 이분은…….”

“나는 객옹이다.”

독선이 대뜸 말했다.

진예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객옹요?”

객옹(客翁)은 말 그대로 하면 손님 할아버지다.

일반적으로 쓰는 노객이나, 빈객이라는 단어와는 사뭇 달랐다.

“아니, 그건 이름이 아니잖……. 왜 찔러요?”

진예림은 영호준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영호준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총군사 대행, 일은 어찌 되었소? 대행까지 여기 오면 소는, 아니 일은 누가 하고…….”

그와 담소하, 조관은 보름 내내 부두에서 대기했다. 언제 운현이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서찰을 통해 아미산에 몇 가지 지시를 하기는 했지만 결국 일을 한 사람은 총군사 대행, 진예림이었다.

“다른 사람 시키는 건 총군사님만 할 줄 아는 게 아니거든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진예림이 말했다.

“업무 분담은 예전에 끝났어요. 아미의 승려 분들을 아주 적재적소에 넣어 드렸죠. 그보다는 직위 명칭 정하는 거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걸 알려 드리는 게 더 힘들었어요.”

진예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그깟 직위 명칭은 왜 그리 다들 예민한 건지, 그리고 자기 일이라고 자기만 알려고 하는 건 또 뭐예요? 누가 보면 가업으로 이 일만 해 온 사람인 줄 알겠더라고요.”

“이야, 조직 구조의 고질적인 병폐를 단번에 파악하다니, 역시 진 소저는 능력이 있소. 이 기회에 아예 부 총군사를 하는 게 어떻소?”

“부 총군사요?”

“아니면 대내 총괄군사라든가.”

“그게 그거잖아요. 아니, 그보다…….”

진예림은 독선을 슬쩍 눈짓하며 영호준에게 물었다.

“저분은 진짜 누구예요?”

“……곧 알게 될 거요.”

평소답지 않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영호준은 말했다.

“그냥……, 수틀리면 죽는다는 것만 아시면 되오.”

진예림은 인상을 썼지만 영호준의 눈빛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과 사를 한 손에 쥐고 그 변덕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독선이라는 이름의 사신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영호준도 그를 직접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어르신 한 분 모시고 오겠습니다’라며 떠난 운현이 떡하니 독선을 모시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문의 태상령패를 어디서 구했느냐니까 곧 알게 될 거라고 하더니…….’

영호준은 당장이라도 배를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정사대전 당시였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으리라.

물론 그런다고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참 내. 왜 저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진예림은 영호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힐끗 독선을 쳐다보았다.

독선은 운현과 함께 장강을 쳐다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뚝뚝한 독선과 부드러운 운현의 표정이, 마치 엄하지만 사이좋은 조손 사이를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담소하도 두 사람의 대화에 종종 끼어들고 있었다.

“별로 안 무서워 보이는데?”

진예림의 말에 영호준이 푹 한숨을 쉬었다.

“모르는 게 낫소.”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아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독선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공포와 위압감이었다.

촤아아아.

독선과 운현 일행,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영호준을 싣고 관선은 장강을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

남경 외곽, 수군도독 진림의 저택.

독선은 아령의 손목을 잡은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 수군도독 진림과 관철훈, 그리고 운현 일행이 초조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면 아령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을 진맥한 의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원은 혀를 찼고,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으며 가끔은 눈동자가 젖어들기도 했다.

그것이 아령은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독선은 달랐다.

“눈.”

독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령아, 의원님께…….”

“자요.”

아버지 진림이 뭐라 하기도 전에 아령은 눈을 가까이 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독선은 아령의 눈과 안색을 살폈다.

“등.”

“네.”

아령은 빙글 돌아서 등을 독선에게 향했다.

독선은 옷 위로 이곳저곳 가볍게 두드려 보고는 말했다.

“됐다.”

아령은 몸을 돌려 앉았다.

독선은 아령에게 말했다.

“내 말대로 하면 너는 건강해질 수 있다.”

아령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곧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저, 정말요?”

독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네가 내 말을 의심하는…….”

“저기 어르신.”

운현이 슬쩍 끼어들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좋다는 뜻입니다.”

독선은 의사소통이 서툴렀다.

젊어서는 수련에 평생을 바쳤고. 명성을 얻은 후에는 당문의 사람들조차 그를 어려워했다.

그가 말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굴종하거나 혹은 반항하다가 죽었다.

게다가 화산지약 이후에는 아예 은거하듯 살았으니, 사람 간의 의사소통에 능할 리가 없었다.

“……크흠.”

독선은 헛기침을 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령의 동그란 눈을 내려다보며, 독선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믿어라. 나는 널 고쳐 줄 것이다.”

“네! 믿을게요!”

아령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그제야 독선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예림은 고개를 저었다.

신선의 풍모를 지닌 독선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고 귀여운 아령과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쩐지 웃기기도 하고 말이다.

“너는 이제 죽음과도 같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깨어날 때에는 더 이상 예전의 네가 아닐 것이며, 새날이 네 앞에 열리리라.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던 성장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다소간의 증후는 나타날 것이나…….”

“어, 뭐라고요?”

아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 믿을 수가 없잖아요.”

독선이 아령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렇군. 옳은 지적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저기, 어르신.”

운현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서툰 독선인데, 아이인 아령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보호자께 하고 우선은 치료를…….”

“안 된다.”

독선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중대사인데 어찌 본인에게 말하지 않고 치료할 수 있겠느냐?”

“믿을게요!”

아령이 독선의 말을 끊었다.

독선이 쳐다보자 아령이 말했다.

“할아버지를 믿을게요. 그러니까 그냥 해 주세요.”

“……날 믿는다고?”

“네.”

아령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잠시 침묵하던 독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

독선은 눈을 빛냈다.

“너의 믿음은 보답받게 되리라.”

“네!”

아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밝고 환한 아령의 웃음에, 무표정한 독선의 얼굴에도 한 줄기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시작한다.”

슥.

독선은 아령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아령의 눈이 슬며시 감기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사락.

독선은 기다렸다는 듯 아령의 가냘픈 몸을 안아 들었다.

아령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모두 나가도록 해라.”

진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관철훈이 붙잡고 방을 나갔다.

운현 일행도 조용히 나서려는데 문득 독선이 말했다.

“너는 남아라.”

그건 운현을 향한 말이었다.

운현은 잠시 의아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탁.

모든 사람이 나가고 방에는 잠든 아령과 독선, 그리고 운현만이 남았다.

독선은 아령을 침상에 누이며 말했다.

“내가 이 아이를 고치는 것을 봐 두도록 해라.”

“네? 제가요?”

운현은 의아했다.

“하지만 저는 의술에는 전혀…….”

“의술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후욱.

독선의 소매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가 내력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 아이의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을 따라 어떻게 기가 흘러가고 순환하는지, 그리고 수많은 세맥들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낱낱이 보아 두라는 것이다.”

우우우웅.

손을 들어 아영의 얼굴 정중앙에 얹으며 독선이 말했다.

“너라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와불이 인정한 심안(心眼)의 소유자니까.”

화아아악.

독선의 내력이 폭풍처럼 방 안에 휘몰아쳤다.

***

잠시 후, 치료를 끝낸 독선은 운현과 함께 방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독선을 바라보았다.

“의, 의원님. 우리 아령이는…….”

뚱뚱한 진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다.”

진림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독선 앞에 몸을 던졌다.

“의원님!”

진림이 울듯이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아령이를, 아령이를 살려 주시다니……. 이 진림, 백골이 진토가 되더라도 반드시 이 은혜를…….”

어의마저 포기한 딸이 살아났으니 진림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원이 아니다.”

울먹이는 진림을 내려다보며 독선이 말했다.

“……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진림이 올려다보자, 독선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객옹이다.”

“네! 객옹 님.”

진림은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독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부녀가 말은 잘 듣는군.”

작은 소리였지만 진림은 어찌 들었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윗사람 말은 아주 잘 듣습니다! 하하하.”

그건 사실이었다.

직책상 수군도독 진림의 윗사람은 바로 황상이니, 어찌 잘 듣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절맥이 치유되었으니 그간 쌓인 약 기운이 효과를 낼 것이다. 성장통은 물론이고 피부에 다소간의 증상이 나타날 것이나, 급하게 약을 쓰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면 자연히 사라질 터이니 조급히 여기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진림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윗사람 말을 잘 듣는다는 건 확실히 사실인 듯했다.

“절맥이었군요. 역시…….”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사실 절맥이라는 건 특정한 병명이 아니다.

비슷한 증후를 가진, 이해할 수 없는 불치병을 이르는 표현이었다.

그 난해한 절맥을 독선이 치료한 것이다.

“하긴 뭐 저분은 의술은 물론 내력까지 엄청난 분이시니…….”

독선은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자다.

그라면 불치병으로 알려진 절맥을 치료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객옹 님.”

진림이 눈물을 글썽이며 독선에게 말했다.

“부족하나마 제가 아령이를 위해 평생을 모아 온 금이 있으니, 부디 제 성의로 여기시고…….”

“필요 없다.”

독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창룡맹은 돈 많아.”

“네?”

진림이 멍한 표정으로 반문하고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영호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이고, 저게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닌 수군도독이, 그것도 탐욕스럽다는 말까지 들어 가며 평생 모았다면 그 금액은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일 터였다.

어의에게 천금을 내밀었다는 진림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진림은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러면 제가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목숨의 값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

독선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니 갚을 필요 없다. 애초에 갚을 수도 없으니까.”

그 말을 한 후, 독선은 휘적휘적 걸어갔다.

뚱뚱한 진림은 감격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외쳤다.

“객옹 신의님! 감사합니다! 객옹 님이야말로 진정한 신의십니다!”

순간 독선이 멈칫했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던 운현이 진림에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빙긋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객옹께서도 쉬셔야 할 테니 도독께서도 쉬시지요.”

“아, 알겠소.”

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독선을 따라 발을 옮기고, 다른 일행들도 그 뒤를 따랐다.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진림이 일행을 위한 방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앞서 걷는 독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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