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영패초선(令牌招仙)
사천성 성도.
당문의 후문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점 보는 노인인 듯 긴 도포를 차려입은 노인은, 깃발과 자리를 들고 휘적휘적 걸어와서 후문 근처에 앉았다.
후문은 평소에도 노점상들이 자리를 펼치던 곳이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는 아예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던지라 노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이 들어올린 깃발은 흔히 보던 ‘점복’이나 ‘무불통지’가 아니었다.
펄럭.
노인이 들어올린 위아래로 긴 깃발에는 ‘영패초선(令牌招仙)’이라는 낯선 글이 쓰여 있었다.
싸구려 천이었지만 서체만은 멋들어져서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했다.
게다가 노인은 길고 허연 수염까지 늘어뜨리고 있어서, 마치 신선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뭐지? 복술사가 아니었나?”
“무슨 뜻이야? 패로서 명하고, 신선을 부른다? 신선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로 영험하다는 의미인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글의 의미나 연유에 대해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를 올리고 자리에 앉아서 하루 종일 정좌를 한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해가 지면 노인은 깃발과 자리를 들고 인근 객잔으로 돌아갔다.
식사 주문은 눈짓과 고갯짓으로 했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 새벽에 다시 나왔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흐르자 노인은 후문의 명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이해 못 할 기인(奇人)이거나, 혹은 당문의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노인은 사람들이 무어라 하건 상관없이 꿋꿋하게 자신만의 일과를 반복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
깊은 밤, 당문의 후문 인근에 위치한 한 객잔.
“아함.”
의자에 앉은 점소이는 한산한 객잔 식당을 바라보며 하품을 했다.
이미 한밤중이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숙수도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고, 계산을 맡은 주인은 아예 코까지 골고 있었다.
하지만 점소이는 졸 수가 없었다.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는 데다, 주인에게 들켰다간 혼쭐이 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당할 수는 없어서, 점소이는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툭.
점소이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곤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콰당.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자고 있던 숙수와 주인은 물론, 손님들까지 탁자에 고개를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털썩, 털썩.
객잔에 있던 이들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입구에 있던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딸랑.
한 노인이 객잔으로 들어왔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과 허연 눈썹을 가진 그 노인은 식당의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다.
저벅, 저벅.
노인은 거침없이 객잔 이 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많은 방들 중 한 곳의 문을 열었다.
달칵.
방 안에 있던 사람은 바로 ‘영패초선’의 기를 들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인사말은 다른 사람이 했다.
노인과 함께 일어서는 그 사람은 바로 운현이었다.
“역시 너였구나.”
방 안으로 들어온 노인, 독선이 말했다.
웃음을 머금은 운현은 함께 앉아 있던 노인에게 말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맹주님께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노인은 운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독선에게도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노인은 방 밖으로 나갔다.
달칵.
그가 나가고, 독선은 방 한쪽에 놓인 ‘영패초선’이라는 깃발을 보았다.
“날 찾으려 이런 기를 올린 것이냐?”
“계신 곳을 알지 못하여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 당문을 신경 쓰고 계심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부족하지만 저 글도 제가 직접 쓴 것입니다.”
“내가 준 태상령패를 고작 날 찾는 데 쓰다니…….”
독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리 가벼운 물건이 아니다.”
“어르신을 찾는 건 아주 중대한 일입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충분히 태상령패를 사용할 만하지요.”
독선은 피식 웃었다.
“우선 앉으시지요.”
운현이 자리를 권했다.
독선이 자리에 앉자 운현은 두 사람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륵.
향긋한 차향이 오르고, 운현은 독선 앞에 마주 앉았다.
“그래, 어쩐 일로 나를 보고자 한 것이냐?”
운현은 찻잔을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제가 문왕을 베었습니다.”
독선의 눈동자가 빛났다.
운현은 곧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 느낌도 없더군요.”
“흠, 그야…….”
“매화검은 그것이 심마라고 말했습니다.”
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줘 봐라.”
운현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독선은 운현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운현의 눈동자와 얼굴 빛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으음.”
독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절명비로구나. 게다가 이미 다 해독이 되었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구나. 아무리 해독침을 사용했다지만, 절명비의 극독을 해소하려면 네 몸무게만큼의 영약을 퍼부어도 부족할 터인데.”
손목을 놓으며 독선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내력은 대체 어디서 얻은 것이냐?”
“북해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해라. 역시…….”
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가 아니라면 운현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한기를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이 이런 기운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만……. 헌데 나중이라니?”
“어르신께 드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운현은 찻잔을 감싸쥔 채 말했다.
“저를 지켜 주십시오.”
독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이미 화산지약을 맺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독선은 답했다.
“염중부가 영웅맹에 있는 한 나는 그와 적대하지 않을 것이고, 이미 당문을 떠났으니 당문과도 관여치 않을 것이다. 무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를 지켜 달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눈살을 찌푸린 채 독선은 운현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냐?”
“제 심마는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타인의 죽음도, 친인의 안전도, 심지어 자신의 생사에 대한 것조차도요.”
“으음.”
독선의 표정 역시 심각해졌다.
그건 독선의 의술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제가 심마에 갇혀 되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참극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독선은 알고 있었다.
아니, 천하에 오직 독선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운현 안에 있는 거대한 한기를 직접 확인했고, 운현의 검술이 어떠한 경지인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만일 제게 그런 징조가 보인다면.”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저를 막아 심마로부터 저를 지켜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목숨을 거두셔도 좋습니다.”
지켜 달라면서 목숨을 거두어도 좋다는 말은 지극히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운현의 결의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기도 했다.
“……허어.”
독선은 탄식을 흘렸다.
스스로의 목숨을 건 이야기를 하면서도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냉담한 그 눈빛은 독선마저도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그 정도란 말이냐?”
“네. 저는 제가 벌일지도 모를 일들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네 목숨을 내게 맡기겠다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 세상에 알려진 내 소문과 이야기 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어르신께서도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셨지만.”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게 어르신과 당문의 운명을 맡기지 않으셨습니까?”
독선은 운현을 단 두 번 만났다.
그리고 자신과 당문의 운명을 그에게 맡겼다.
심지어 당문의 태상령패까지 넘겼으니 운현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왜 나냐?”
독선이 물었다.
“이검학도 있고, 소림에는 네 스승인 와불도 있을 터인데.”
“와불 선사님은 거동이 불편하시고, 검성께서는 천산으로 떠나신 후 그 종적을 알 수 없습니다. 허나 두 분이 계셨더라도.”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저는 어르신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어르신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덧붙였다.
“그리고 가장 냉철한 판단을 내려 주실 분이기도 하고요.”
검성 이검학은 검에 미쳐 있으며 와불 선사는 세속을 떠나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다.
독선은 염중부와 더불어 가장 세속적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쯧.”
독선은 혀를 찼다.
“하는 말마다 다 옳으니 반박을 할 수가 없구나.”
그건 승낙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문득 독선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창룡맹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네 곁에 머무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독선은 말을 이었다.
“당문의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그 자리를 뜰 것이고, 영웅맹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모습을 감출 것이다. 나는 창룡맹과 전혀 무관하다. 다만 너와 개인적으로 함께할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겠느냐?”
“네, 상관없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이 답했다.
“저는 다만 어르신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길 뿐입니다.”
“그렇다면 좋다.”
독선은 마음을 정했다.
“네가 잘못되면 내 소망도 헛되이 될 테니 당분간은 내가 네 목숨을 맡아 주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덜컹.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운현의 청을 수락한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운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시간 나시는 대로 환자도 좀 봐주십시오. 마침 어린 여자아이가 있는데 몸이 많이 아픕니다.”
“뭐?”
독선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의술은 화산지약과 무관하지 않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파고들면 아예 화산지약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요.”
사실 법적으로 볼 때 화산지약은 허점투성이였다.
애초에 ‘적대한다’는 말의 범위나 구체적인 행동이 전혀 정의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그렇긴 하지만…….”
“어르신 같은 대단한 분을 힘들게 모셨는데 그냥 노시게 할 수는 없지요.”
“끙.”
독선은 신음을 흘렸다.
“놀게 할 수 없다니, 네가 날 먹여 살리기라도 할 것 같은 말이로구나.”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앞으로 어르신의 의식주는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전부?”
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모셨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지요. 그런 건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크흠.”
독선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좀 까다로운데…….”
“충분히 이해합니다. 홀로 계셨으니 매끼 그 번거로움이 오죽하시겠습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서생 시절에 고생해 봐서 압니다. 식사 준비에 노력이며 시간은 엄청나게 많이 드는데 정작 먹는 건 순간이고, 그 뒤에 남는 건 지겨운 설거지뿐이더군요.”
예전을 떠올리는 듯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더구나 어르신께서는 연세도 있으시니, 당연히 좋은 것만 드셔야 합니다.”
운현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드시는 것만큼은 제가 최고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창룡맹이 재정 하나는 아주 튼튼하거든요.”
“크흠, 그렇게 해 준다면야 굳이 사양할 이유는 없다만…….”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짐짓 딴청을 부렸지만 독선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자, 그럼 가실까요?”
“지, 지금?”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독선은 말했다.
그러나 운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낮에 많이 자서 잠이 안 오거든요. 어차피 어르신께서도 비슷하실 것 같은데 그냥 움직이시지요. 오히려 지금이 다니는 마차도 없어서 길도 한적하고 좋습니다.”
독선은 ‘이놈이 원래 이런 놈이었나?’ 싶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하긴 본래 운현은 말로는 물러난 적이 없다.
물론 검으로도 물러나지 않아서 독선의 마음에 든 것이지만.
운현은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하게 독선을 바라보았다.
결국 독선이 손을 들었다.
“그리하지. 어차피 늙어서 잠도 없으니.”
덜컹.
독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현은 ‘영패초선’이라 쓰인 기를 풀어 곱게 접었다.
매화검 영호준조차 혀를 내두를 중대한 담판이 식사 제공만으로 순식간에 성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