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계례를 올릴 때까지만이라도
여자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관 아저씨!”
관철훈은 얼른 몸을 낮추었다.
“아가씨.”
예쁘장한 여자아이는 주저없이 관철훈에게 안겼다.
관철훈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주었다가 팔을 풀었다.
“잘 계셨습니까?”
“응, 착하게 잘 있었어. 약도 다 먹고.”
자랑하듯 말하던 여자아이가 문득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 아저씨들은 누구야? 친구야?”
여자아이는 신기한 듯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응. 아주 오래된 친구란다.”
사박.
몸은 낮춘 운현은 여자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운현이야. 꼬마 아가씨 이름은 뭐지?”
“저는 아령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이라 그런지 아이는 존칭을 했다.
그 모습이 더욱 귀여워서 운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가워, 아령 아가씨.”
“헤헤.”
“난 영호준이라고 한단다. 그냥 호준 오빠라고 부르렴.”
어느새 끼어든 영호준이 몸을 낮추며 인사를 했다.
“난 담소하야.”
담소하까지 말하자 조관이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크흠. 난 조관이다.”
“우와, 큰 아저씨다.”
고개를 들고 조관을 올려다보던 아령은 관철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 오늘 안 온다고 했는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령이 물었다.
“잠시 시간이 나서 들렀습니다.”
“그렇구나. 시간이 자주 나면 좋겠다.”
아령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관철훈과 아령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온화한 분위기의 시녀가 나타나 아령 뒤에 섰다.
시녀는 관철훈과 운현 일행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운현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시녀에게 답례했다.
그러자 영호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맹주님. 이 아이는…….”
“네. 알고 있습니다.”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살짝 홍조를 머금은 아령의 얼굴은 유난히 하얀색이었다.
얼굴뿐 아니라 손이나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무리 아이라지만 너무나 작고 가냘펐다.
누가봐도 한눈에 아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운현은 관철훈과 말하고 있는 아령을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저녁때까지 놀아 주고 갈 거야?”
기대로 반짝이는 아령의 눈동자에 관철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오늘은…….”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굳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고개를 돌린 관철훈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앗! 아빠다!”
아령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오, 우리 공주님!”
뚱뚱한 수군도독 진림이 환하게 웃었다.
톡톡톡.
아령은 바로 진림에게 달려갔다.
“어이쿠, 조심하렴, 조심.”
진림은 행여 아령이 넘어질까 걱정하며 얼른 몸을 낮추고 팔을 벌렸다.
“아빠!”
아령은 주저없이 진림의 품에 뛰어들었다.
팍.
진림은 커다란 체구로 아령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한 손에 아령을 안은 채 일어섰다.
“잘 있었어? 우리 예쁜 공주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아빠도 시간이 났어?”
“그럼, 시간이 났지. 허허허허.”
진림은 마냥 행복한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웃던 진림이 시녀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아가씨. 손을 씻고 오시지요.”
“나중에 씻으면 안 돼? 나 아무것도 안 만졌어.”
아령이 투덜거렸지만 진림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가 맛있는 거 사 왔는데 손 씻어야 먹지. 어서 갔다 오렴. 옷도 갈아입고.”
“네!”
진림은 조심스레 아령을 내려 주었다.
아령은 진림과 관철훈, 그리고 운현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시녀와 함께 후원 문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내내 흐뭇하게 보던 진림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소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관철훈을 노려보며 진림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 자네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거늘, 감히 우리 집에 이런 자들을 들여? 게다가 내 딸까지 만나게 하다니!”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로 진림이 소리쳤다.
“설마 저자들과 작당하여 날 팔아넘기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진림의 화는 매우 컸다.
그의 눈동자에는 불같은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대인!”
턱.
관철훈이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를 거둬 주신 대인의 은혜를 어찌 제가 잊겠습니까? 이는 결단코 대인께 해를 끼치려 함이 아닙니다.”
입술을 깨문 관철훈이 분노한 진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만 아가씨의 병을 치료하려 할 뿐입니다.”
“치료라고?”
진림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더욱 분노하며 외쳤다.
“대체 어떻게? 이자가 전설의 신의라도 된단 말인가? 내 딸의…….”
으드득.
진림은 이를 악물었다.
“내 딸의 병을 대체 어떻게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의께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순간 진림은 흠칫했다.
관철훈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박 공공의 힘이라면 어의께 아가씨의 병을 살펴보게 할 수 있습니다. 황실의 어의시라면 능히 아가씨의 병명도, 치료법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림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관철훈은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인께서 박 공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심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허나 아가씨의 병을 고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대로라면 아가씨는…….”
아령은 해가 다르게 허약해지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하루 종일 집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잠시 동안 후원을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관철훈은 도저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던 관철훈이 진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대인, 부디 이번만은 뜻을 접으시고…….”
“허어.”
진림이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몸을 휘청하더니 옆에 선 나무를 붙잡았다.
“대인!”
관철훈이 벌떡 일어나 진림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진림은 손을 내저었다.
“후우우.”
고개를 숙이고 탄식을 흘리던 진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 보였네.”
“네?”
관철훈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진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온갖 연줄과 편법을 사용하여 어의를 뵈었네. 천금을 내밀며 제발 아이를 살려 달라 했었어. 허나…….”
진림은 이를 악물었다.
“어의께서도 고개를 저으시더군.”
신음하듯 진림은 말했다.
“……이대로라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 하셨네. 한번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 그럴 수가…….”
관철훈은 황망한 표정으로 진림을 바라보았다.
“계례를 올릴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주길 바랬는데…….”
계례는 대략 십오세 전후에 치르는, 여자아이에게 비녀를 꽂아 주는 일종의 성인식이다.
툭, 툭.
굵은 눈물이 진림의 눈에서 떨어졌다.
“그조차 내 욕심이었나 보네.”
관철훈도 고개를 숙였다.
이를 악다물었지만 어느새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저벅.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건 운현의 목소리였다.
진림은 고개를 들었다.
분노는 이미 사라져 있었지만 운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가시오.”
진림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과 할 이야기는 없소. 내 집에 함부로 들어온 것은 묻지 않을테니…….”
“제가.”
운현은 진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니 기다려 주십시오.”
진림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그러나 운현은 진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벅.
운현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영호준과 담소하가 그 뒤를 따르고, 감찰어사 조관이 진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진림은 여전히 표정을 구긴 채 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멈추지도, 진림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진림의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 운현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운현 일행은 마차를 타고 남경의 숙소로 향했다.
“가능성이 있을까요?”
침묵이 흐르는 마차 속에서 담소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의께서 포기할 정도라면…….”
따각, 따각.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영호준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혹시 신의라면…….”
“신의요?”
담소하가 눈을 빛냈다.
아까 진림도 신의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설 속의 이야기였다.
반면 영호준은 신의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어요?”
담소하는 물론 조관도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있는지 없는지.”
“네?”
“소문으로만 떠돌 뿐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네. 역병으로 죽어 가던 마을을 살렸다는데, 정작 신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어. 무림맹조차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네.”
신의 의술을 지닌 의원, 신의에 대한 소문은 사실 어느 때나 있었다.
때로는 명의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고, 혹은 환자들의 소망이 만들어 낸 허상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신의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지.”
“그럼 의미가 없네요.”
담소하가 실망한 듯 말했다.
모르면 찾을 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존재 여부조차 불확실하니 지금 일행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따각, 따각.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운현이 말했다.
“이걸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영호준과 담소하, 조관의 눈이 빛났다.
운현은 품에 손을 넣더니 비단으로 싸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비단 안에 있던 것은 손바닥보다 조금 긴 크기의 보라색 옥패였다.
“이게 뭐죠? 아주 옛날 것 같은데?”
담소하가 옥패를 보며 중얼거렸다.
옥패에 새겨진 문양이며 모서리가 살짝 닳아 있어서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응? 이 문양은…….”
영호준이 고개를 가까이 하고 옥패를 들여다 보았다.
“……이건 초기 당문의 문양 같은데?”
담소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영호준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아세요?”
“조금 관심이 있어서.”
영호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옥패를 자세히 살폈다.
“맹주님, 이거 심상치 않은데요? 이건…….”
“당문의 태상령패입니다.”
“억!”
운현의 대답에 영호준이 입을 떡 벌렸다.
그는 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천천히 몸을 뒤로 빼더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게 정말 태상령패라고요? 당문의?”
영호준은 옥패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네.”
“맙소사. 이걸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이게 뭔데요?”
담소하가 손가락으로 옥패를 가리키며 물었다.
영호준은 정색을 했다.
“어허, 손 치우게.”
“왜요? 설마 독이 있나요?”
담소하는 흠칫하며 손을 거뒀다.
그러나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닐세. 옥패 닳을까 봐 그러지.”
담소하가 눈살을 찡그리는데, 영호준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이게 정말 당문의 태상령패란 말입니까? 아주 옛날에 분실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요.”
담소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궁금한 건 조관도 마찬가지여서, 그 역시 영호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일세.”
“네? 당문을 마음대로요?”
“그래. 당문에는 수많은 신물이 있지만 정작 가주의 신물은 존재하지 않네. 이것을 잃은 이후 따로 가주의 신물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 영패야말로 당문의 신물들 중 최고라 할 수 있네.”
“와! 그럼 이걸 가지고 가면 당문이 꼼짝 못 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
담소하의 표정이 금방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영호준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당문은 뭐든 할 걸세. 아니, 그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막대하네.”
영호준은 고개를 들고 운현에게 말했다.
“이 소문이 강호 무림에 퍼지면 당문의 명성은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건 자존심에 관한 문제니까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문의 신물이 타인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건 말 그대로 자존심의 문제다.
특히 명예를 중요시하는 강호 무림에서는 대단히 치명적이다.
“이것만 있다면 당문에게서 엄청난 양보를…….”
“그렇게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운현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의도로 받은 것도 아니고요.”
조관이나 담소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영호준은 미련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이것만 있으면…….”
“왜요? 또 항주 기루에서 평생 놀고먹으려고요?”
“아니.”
영호준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항주 기루를 다 사들여야지. 평생 기루만 돌아다니며 살아도 될걸?”
“켁.”
담소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내밀었다.
영호준이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 영패로 무얼 하실 작정입니까?”
“우선 사천성 성도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가능한 한 빨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