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천군만마
남궁세가의 총관이 운현 일행을 안내한 곳은 가주의 집무실이 아니라 대의사청이었다.
대의사청에는 이미 가주 철검 남궁벽과 총감찰 남궁비연을 비롯한 내청과 외청의 당주들, 그리고 주요 중직자들이 모두 나와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
운현이 모습을 나타내자 가주 철검 남궁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르릉.
중직자들이 일제히 일어서자 대의사청 안이 의자 소리로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철검 남궁벽이 운현에게 말했다.
“남궁세가가 맹주께 예를 표하오.”
남궁벽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모든 중직자들이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외침 같은 것은 없었지만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창룡맹의 맹주로서.”
운현은 조용하게 말했다.
“남궁세가에 예를 표합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철검 남궁벽 역시 머리를 들었다.
모든 중직자들 또한 눈을 들어 운현을 쳐다보았다.
“순서는 조금 바뀌었습니다만.”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가맹을 창룡맹 맹주로서 허락합니다.”
“오오.”
사람들의 입에서 탄사가 새어 나왔다.
이로써 남궁세가는 창룡맹의 정식 맹원이 되었다.
짝짝짝.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박수가 대의사청 전체로 번져 가는 건 금방이었다.
남궁세가 중직자들은 사뭇 감격스런 눈빛으로 운현과 가주 철검 남궁벽을 향해 박수를 쳤다.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의 죽음 이후 내우외환을 겪은 후에, 비로소 남궁세가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새로운 가주, 철검 남궁벽을 중심으로 말이다.
“감사하오, 맹주.”
철검 남궁벽의 묵직한 목소리에 대의사청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중직자들은 눈을 빛내며 남궁벽을 바라보았다.
남궁벽은 대의사청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궁세가는 창룡맹의 일원이 되었다. 이제 반영웅맹의 엄중한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인즉.”
말하는 남궁벽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황천대와 암천무제에게 선대 가주를 잃은 그에게 반영웅맹이라는 단어는 각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중직자들은 의견을 내고 뜻을 모으라.”
“네! 가주님!”
중직자들은 일제히 남궁벽에게 예를 표했다.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쿠르릉.
의자 소리가 대의사청을 잠시 메우고, 철검 남궁벽은 운현에게 말했다.
“갑시다. 맹주님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의사청은 이미 열띤 토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직자들의 눈동자는 열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간 봉문하다시피 했던 남궁세가가, 창룡맹의 깃발 아래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 이거…….”
그 모습에 영호준이 혀를 내둘렀다.
“과연 검왕가라 할 만한 광경이로군요.”
그 말에 남궁벽은 빙긋 웃었다.
“기대하셔도 좋소.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보여 드릴 테니 말이오.”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 무림맹 당시, 남궁세가의 제자 백오십 명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무림맹의 모든 문파가 긴장했을 정도였다.
신승도 말하기를 당문이나 제갈세가조차 남궁세가를 껄끄러워했다지 않았던가?
“와아.”
기개 넘치는 남궁벽의 단언에 담소하도 감탄했다.
가주 남궁벽과 총감찰 남궁비연, 그리고 운현 일행은 대의사청을 나섰다.
남궁세가의 대의사청은 그 어느 때보다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주 남궁벽의 집무실.
운현 일행은 철검 남궁벽, 그리고 총감찰 남궁비연과 함께 탁자에 앉았다.
향기로운 차가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운현 일행은 여로의 피로를 풀며 조금 전 대의사청의 흥분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비연……, 아니 총감찰께서는 대의사청에 계시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남궁비연이 빙긋 웃었다.
“총감찰은 비리나 직무 유기에 관여할 뿐, 가문의 일은 어르신들께서 결정할 일이지요.”
본래 총감찰은 가주를 견제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가주의 외동딸인 남궁비연이 총감찰이 되니, 견제의 칼끝이 도리어 중직자들을 향하게 된 것이다.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니 적당한 때에 자리를 내려놓으려 해요.”
남궁비연의 말은 옳았다.
애초부터 총감찰이 전례 없던 일이다.
“제가 끼어드는 것이 괜찮을까 싶습니다만.”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왕 생긴 자리를 그냥 내려놓으시면 안 되지요. 권한과 책임을 조정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오히려 더욱 좋을 것입니다. 자리는 함부로 없애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미 매화검 영호준을 알고 있던 남궁비연은 눈을 빛냈다.
“그런가요? 그러면 지혜를 빌려 주시겠어요? 매화검 대협.”
“총군사라 불러 주십시오. 맹원의 요청이니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영호준은 멋진 미소를 머금었다.
“특히 미인의 요청이라면 더더욱요.”
“후훗. 고마워요. 나중에 자세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어요.”
남궁비연은 여유롭게 웃었다.
담소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총군사님의 미소가 안 통하는 여자도 있네요.”
영호준은 담소하를 한번 노려보고는, 웃으며 찻잔을 쥐었다.
가주 철검 남궁벽이 운현에게 말했다.
“감사하오, 맹주.”
“아닙니다. 저는 그저…….”
“형님의 뜻을 이루게 해 주셔서 말이오.”
남궁벽의 눈동자는 살짝 젖어 있었다.
선대 가주 남궁진천은 힘을 기르기 전에는 대사를 도모하지 말라고 명했다.
이제 남궁세가가 다시 하나가 되어 창룡맹의 깃발 아래 강호에 출도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사뭇 남달랐다.
그 심정을 운현 역시 모를 바가 아니라서,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명하시오.”
남궁벽은 조금도 주저없이 말했다.
“남궁세가는 맹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겠소.”
남궁벽의 눈빛은 운현을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림맹이 무너질 때부터 시작하여 이후 아미를 구하고 반영웅맹의 기치를 올릴 때까지, 운현이 보여 준 모습들은 남궁벽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오늘 남궁세가의 모습을 보니 제가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아무것도 없겠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총군사이신 매화검 대협과 논의하시면 충분할 것입니다.”
“기꺼이 그리하겠소.”
운현은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인 후,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남궁벽 역시 차를 음미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문득, 남궁벽이 말했다.
“창룡맹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소. 허나 맹이 오래 지속되려면 한 가지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오.”
운현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며 남궁벽의 말을 들었다.
“다름 아니라 맹의 후계자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운현은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했다.
대체 지금 후계가 문제가 왜 나온단 말인가?
“아니, 그건…….”
운현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무언가 말하려는데 영호준이 먼저 끼어들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왕조가 바로 그 문제로 흔들렸지요.”
“그렇소. 맹주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부터 대비한다 해도 이르다 할 수 없을 것이오.”
영호준과 남궁벽은 갑자기 한마음이라도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이를 생각한다니? 자신의 나이가 뭐가 어때서 말인가?
“해서, 맹주께서 괜찮으시다면 괜찮은 혼처를 주선할까 하는데 어떻소?”
남궁벽은 은근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남궁비연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생각이 없습니다.”
“허어, 생각이 없다니 그런…….”
“맹주님. 부끄러워 할 때가 아닙니다.”
때는 이때라는 듯 영호준이 나섰다.
“이건 맹의 존폐에 관한 문제이니 총군사인 제가 나서서…….”
“쯧, 어차피 화산엔 여도사가 없고 아미엔 여승뿐이잖나? 이런 건 아무래도 어른인 내가…….”
어느새 남궁벽과 영호준은 서로 누가 이 문제를 주관해야 하느냐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운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담소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놓고 감탄하는 담소하의 모습에서, 운현은 나중에 진예림이 뭐라 말할지 능히 상상이 되었다.
‘또 여자 문제냐고 하겠네.’
문제는 많지만 사실 실속은 없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차는 향기롭고 부드러워서 운현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
“수군도독이라 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운현은 철검 남궁벽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남궁벽은 기꺼이 환영의 뜻을 밝혔다.
북쪽으로 제갈세가의 확장을 막고, 남쪽으로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해야 하는 남궁세가로서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수군도독이 흔쾌히 협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실세인 박 공공이라도 수군도독의 군권을 침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흠, 장강 수군도독이라면 진림이라 하는 자인데 우리 남궁세가와도 조금 교분이 있소.”
남궁벽이 나지막이 말했다.
운현은 물론 영호준도 놀랐다.
남궁세가가 수군도독과 교분이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수군도독에 대해 말하는 남궁벽의 어조는 그리 밝지도, 공손하지도 않았다.
“혹시 필요하시면 세가의 추천장을 드리겠소.”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미 방문을 알리는 배첩을 공식적으로 발송했습니다.”
감찰어사 조관을 통해 운현은 장강 수군도독에게 방문의 뜻을 알렸다.
수군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는 군권의 총책임자 중 한 사람인지라 함부로 찾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나 놀랍군요. 남궁세가에서 수군도독과 교분이 있다니요.”
“교분이라기보다는.”
남궁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매년 선물을 보내는 정도라오. 진림은 제법 탐욕스러운 자라서 말이오.”
“네?”
그건 또 새로운 사실이었다.
감찰어사 조관은 ‘뇌물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철검 남궁벽은 ‘탐욕스럽다’고 한다.
대체 어느 말이 맞는 것일까?
“받아먹기만 하고 청탁은 안 들어주나 보죠.”
담소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직 청탁을 넣어 본 적이 없어서.”
남궁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남궁세가로서는 교분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수군도독이 그럴 마음만 먹으면 남궁세가의 배들을 괴롭히는 건 간단할 테니까 말이다.
“혹시 모르니 예물을 좀 챙겨 드리겠소.”
“아니, 그러실 필요는…….”
“객지에서는 돈 없으면 서러운 법이라오.”
남궁벽이 웃으며 말했다.
수군도독부를 남궁벽은 객지라고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곳은 운현의 권한이나 영향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자리니까.
“허나 남궁세가도 쓰실 일이 많을 터인데…….”
“허허허.”
남궁벽은 웃었다.
“혹시 이런 말 들어 보셨소? ‘부자는 망해도 삼 대를 간다’고 말이오.”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바로 남궁세가다.
안휘성의 패주이자 그 영향력이 장강을 따라 넘친다고 하던, 무림맹 십팔대 문파로 꼽히던 거대 세가 말이다.
“남궁세가의 재정은 맹주님의 생각보다 훨씬 튼튼하니 걱정하실 것 없소. 맹에 대한 기여 역시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겠으니 재정에 대한 염려는 안 하셔도 좋소이다. 허허허허.”
남궁벽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운현이 남궁세가의 형편을 염려해 준 것이 그로선 사뭇 신선한 일인 듯했다.
하지만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혹시 우리 맹주님의 명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룡검주 아니시오?”
남궁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앞에 또 다른 문장이 있지요. 바로 천외비처입니다.”
“아, 알고 있소. 그런데 그게 무슨…….”
“그러니까 우리 맹주님은…….”
영호준은 슬쩍 남궁벽에게 몸을 가까이 한 후 뭐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언뜻 ‘국가 예산’ 어쩌고 하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운현은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으음.”
철검 남궁벽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크흠. 그러시군. 그러면 예물은 각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도록 하겠소.”
영호준이 빙긋 웃고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현으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벽에겐 자존심이 달린 일인 듯, 그는 심각한 얼굴로 예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든 운현은 남궁비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밝은 미소는 부드러운 차향처럼 운현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