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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41화 (341/530)

341화. 소문

의원으로 보이는 노인은 이서연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무언가 푹신한 것을 목 뒤에 고여 주었다.

“으윽!”

이서연은 신음을 흘렸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끔찍할 정도로 아팠지만 의원의 손길은 이서연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를 높이자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의, 의국이라면 어디…….”

말하던 이서연은 문득 이상한 저항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녀의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붕대였다.

그 붕대가 이서연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호흡을 위한 코 부위와 눈만 빼고는 말이다.

“……이, 이게 무슨…….”

이서연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덜컥.

“환자가 깨어났다고?”

키가 작고 뚱뚱한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의원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뚱뚱한 노인은 즉시 이서연에게 다가왔다.

‘설마…….’

이서연은 조금 전 의원이 언급한 명호를 떠올렸다.

노인, 인태상이 이서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 목소리는 서늘하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누구이기에 도련님의 옥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냐?”

순간 수많은 생각이 이서연의 뇌리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인태상은 이서연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빨리 대답해라! 눈알 굴리지 말고!”

이서연은 흠칫했다.

“저, 저는…….”

그러나 입을 가린 붕대 탓에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쯧.”

혀를 찬 인태상은 의원을 돌아보았다.

“이거 좀 벗겨라. 말을 제대로 못하잖아.”

“지금 벗겨서 좋을 게 없을 건데?”

의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인태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관없으니까 어서 해.”

의원은 힐끔 인태상을 보고는 이서연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이서연의 얼굴을 가린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이서연은 얼굴 전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뒷머리가 서늘했다.

섬뜩한 예감에 이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 거울을…….”

“대답부터 해라.”

인태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누구냐? 어찌하여 도련님의 옥패를 갖고 있었느냐?”

문왕의 시신을 안고 숲속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인태상은 이서연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본래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그녀 곁에 떨어져 있던 옥패 하나가 인태상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바로 문왕의 것이었다.

그래서 인태상은 이서연을 데리고 온 것이다.

“나, 나는 문……, 큭.”

목이 타는 듯하고 가슴과 배에 격렬한 통증이 내달렸다.

온몸이 엉망이 되었는지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서연은 인상을 쓰며 고통을 참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문왕 저하께 옥패를, 받았어요. 그분의 권한을, 대리하도록.”

인태상의 눈빛이 번뜩였다.

“도련님의 권한을 대리해? 네가?”

문왕이 자신의 권한을 맡긴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던 옥패는 분명 문왕의 것이다.

“그건……. 아악!”

이서연이 고통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은 무리다.”

의원이 말했다.

“어차피 고비를 넘겼으니, 상태가 좀 더 호전되면 그때 물어봐라.”

인태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의원의 말이 옳았다.

지금 이서연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데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쯧.”

인태상은 혀를 차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의원에게 말했다.

“상태가 나아지면 알려라. 만일 저것이 죽으면 네 목을 따 버리겠다.”

“클클, 왜 그냥 지금 따지 않고? 늙은 목 따위 어디다 쓴다고…….”

의원은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빈정거리듯 말했다.

인태상은 의원을 한번 노려보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탁.

문이 닫히자 의원은 혀를 찼다.

그가 붕대를 다시 감으려는데, 이서연이 말했다.

“거, 거울을 보여 주세요.”

“목숨을 구한 것만도 천운이거늘 무슨 거울이냐?”

의원은 아랑곳 않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이서연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내, 내 얼굴이 어떻게 된…….”

“독으로 인한 화기가 위로 올라와 얼굴이 많이 상했다.”

사락, 사락.

붕대를 감으며 의원은 말했다.

“뭐, 상한 게 얼굴만은 아니지만.”

“거울!”

이서연이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어서 거울을! 거울……! 크흑. 끄윽.”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이서연은 말했다.

“……거울을, 줘요.”

“쯧.”

의원은 혀를 찼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곧 서책 크기의 거울을 손에 들었다.

“자, 봐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이서연 대신 의원이 거울을 보여 주었다.

이서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감다 만 붕대 사이로 뭉그러진 피부가 보였다.

오똑하던 코도, 새빨간 입술도, 그린 듯 곱던 눈썹도 더 이상 그곳에는 없었다.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파르르 눈을 떨던 이서연이 한 조각 희망을 갖고 의원을 쳐다보았다.

“나, 나을 수는…….”

이서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의술로는 무리다.”

이서연의 마음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내려앉았다.

“안 돼. 내가, 내가 이럴 수는…….”

부들부들 떨던 이서연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악!”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몸의 고통보다 더욱 끔찍한 현실이 이서연을 덮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이서연의 절규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쯧.”

의원은 혀를 차며 즉시 이서연의 혈을 짚었다.

비명을 지르던 이서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툭.

이서연이 고개를 떨구자 의원은 거울을 치웠다.

그리고 쓰러진 이서연에게 다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숨 쉬고 사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혼잣말처럼 의원은 중얼거렸다.

“그조차 쉽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서연은 이미 들을 수 없었다.

붕대 감기를 마친 의원은 다시 약재 앞으로 돌아갔다.

쿵, 쿵, 쿵.

정신을 잃은 이서연 옆에서, 의원의 약재 찧는 소리가 무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혈공자 문왕이 운현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강호 무림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우선 소문 자체가 사실인지 모호했던 데다가, 혈공자 문왕의 이름은 항주 혈사 직후에나 잠시 주목받았을 뿐, 태평맹이나 영웅맹에 비하면 사람들 입에 그다지 오르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소문은 잠시 퍼져 나가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겐 아니었다.

태평맹 총단, 당설련의 집무실.

서탁에 앉아 보고를 듣고 있던 당설련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뭐?”

보고하던 수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당설련을 바라보았다.

당설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수하는 즉시 답했다.

“일부 지역에서 혈공자 문왕이 창룡검주의 검에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허나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려던 수하는 당설련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달칵.

당설련의 손에서 붓이 힘없이 서탁에 떨어졌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가 봐.”

“네?”

당설련이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보고는 다음에 해! 어서 나가!”

“네!”

수하는 예를 표하고 즉시 밖으로 나갔다.

탁.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당설련이 이를 악물었다.

‘문왕이, 문왕이 죽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혈공자 문왕이 죽다니?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절명비를 받았을 텐데? 게다가 인질까지 잡은 상황이잖아?’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문왕은 운현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무림맹을 무너뜨렸지만 정작 조정의 세력을 한꺼번에 잃은 것처럼, 이번에도 문왕은 운현을 꺾지 못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의 기회조차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운현에게 목숨을 빼앗겼으니까.

‘이런 바보 같은 놈…….’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그 분노는 기어이 날카로운 외침이 되어 터져 나왔다.

“이 멍청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죽는단 말이야!”

쾅.

당설련의 손 아래서 서탁이 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설련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못 하잖아! 아무것도!”

쾅, 쾅.

문왕의 실패는 당설련의 계책을 막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운현은 인질에 대해 더 철저히 대비하게 될 것이다.

실행 자체가 어려워진 것은 물론이고, 당설련의 계책 역시 함부로 시도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만약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도 죽이겠지. 문왕을 죽인 것처럼.’

그뿐만이 아니다.

만일 계책이 실패한다면 운현은 결코 태평맹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실낱같은 가능성에 비하면 너무나 위험부담이 커진 것이다.

“후우.”

긴 숨을 내쉰 당설련은 고개를 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되겠어. 다른 방책이 필요해.’

방법은 또 있을 것이다.

아니, 없다면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당문이 해 온 방식이니까.

아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

항주 영웅맹, 맹주전.

문왕의 죽음에 대한 소문으로 놀란 사람은 이곳에도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맹주, 철혈사왕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전혀 놀라지 않던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문왕이 창룡검주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장강 일부 지역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특정되지 않아 헛소문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만…….”

문사의 보고가 이어졌지만 염중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문왕이…… 죽었다고?’

혈공자 문왕이 이대로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운현에게 복수를 하려 들 것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왕 자신이 운현에게 죽다니?

‘설마 주제도 모르고 직접 덤벼들기라도 했나?’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으니 아마도 문왕 단독으로 일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문왕이 죽을 수가 있는가?

설령 일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문왕이라면 빠져나올 방법 정도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말이다.

두 사람이 생사를 건 비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쯧,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일대상인으로부터는 일방적으로 명이 내려올 뿐, 염중부에겐 그를 대면할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영웅맹의 맹주조차 일대상인에겐 그저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으음.”

염중부는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보고하던 문사가 흠칫 말을 멈추자 염중부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나가 봐.”

“네.”

문사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맹주전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문왕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지 곰곰이 계산하던 염중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흥, 그래도.”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염중부는 말했다.

“자신을 건드린 놈을 용서하지 않는 건 맘에 드는군.”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말이다.

“후후. 나쁘지 않은 일이지.”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염중부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만큼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릴 테니 말이다.

“나쁘지 않은 일이야.”

맹주전에 홀로 앉은 염중부는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미소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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