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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40화 (340/530)

340화. 심마(心魔)

가장 먼저 운현을 찾아낸 사람은 영호준이었다.

감찰어사 조관이 포양호 인근 관아에 수색령을 내려 놓은 상황에서, 밤하늘에 오른 불빛 신호를 영호준이 먼저 발견한 것이다.

다만 거리가 멀었던 데다 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저벅.

저택 안으로 들어선 영호준은 조심스럽게 운현에게 다가갔다.

운현은 대전 앞, 넓은 공터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발치에 깔아 놓은 웃옷 위에 잠들어 있는 여인은 아마도 일아영이리라.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영호준이 나지막이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네.”

대답하는 운현의 눈동자를 영호준은 똑바로 쳐다보았다.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의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분명 엄청난 일을 겪었을 텐데도 말이다.

사락.

영호준은 일아영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규칙적인 호흡을 확인한 후, 영호준은 운현의 옆구리를 살폈다.

시커멓게 말라붙은 피와 변색된 상처 부위에 영호준의 안색이 변했다.

“지독한 독이군요. 무엇에 찔린 것입니까?”

“……절명비라 하더군요.”

운현의 대답은 어쩐지 살짝 반응이 느렸다.

“가지고 계십니까?”

슥.

천천히 고개를 돌린 운현이 숲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저 숲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영호준이 숲을 쳐다보는데 운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서연 소저의 시신과 함께요.”

“그녀를 베셨습니까?”

“베지는 않았습니다만.”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운현은 말했다.

“절명비를 맞았으니 아마도 죽었을 것입니다.”

저택 너머로 보이는 숲은 아직 어두웠다.

그사이 운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왕도 죽었습니다.”

영호준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왕이 죽었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운현은 바닥에 흐른 혈흔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베었고,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나뒹구는 활과 화살 몇 개도 보였다.

하지만 그것뿐, 다른 것은 없었다.

“시신은요?”

“인태상이 가지고 도주했습니다.”

“허!”

영호준은 탄식하듯 말했다.

“절명비에 찔리시고도 문왕을 죽이고 인태상을 쫓아내셨단 말입니까?”

“인태상은 애초부터 저와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지막이 말하던 운현이 일아영을 내려다보았다.

“아영 소저는 괜찮습니까?”

“그보다 맹주님이 더 위중합니다.”

운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영호준을 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총군사께서 주신 것 덕분에…….”

“독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영호준은 말했다.

“심마(心魔)입니다.”

그건 운현으로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주화입마 같은 것입니까? 하지만 제 내력은…….”

“맹주님.”

바스락.

영호준은 한쪽 무릎을 꿇고 운현과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요.”

운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영호준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글쎄요? 딱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운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영호준은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맹주님께 의미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쩌면 아주 단순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누구인가요?”

영호준이 재차 물었다.

운현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단 한 사람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도…….”

운현이 막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이었다.

쓰러져 있는 일아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

순간 과거의 일들이 벼락 치듯 떠올랐다.

감옥에 갇혀서도 미소로 자신을 보내 주었던 일충현의 모습이 운현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도.

“……형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고 제…….”

왈칵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의형 일충현을 위해 자신은 일아영을 구했다.

그리고 의제 독고랑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문왕을 베었다.

그런데 어느새 의미는 사라지고 냉정한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텅 비어 버린 사람처럼.

뚝, 뚝.

운현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왈칵.

닫아 놓았던 마음의 문이 열리며 감정의 격랑이 운현을 뒤덮었다.

가슴이 미칠 듯이 아파 왔지만 운현은 이제 알고 있었다.

이 통증은 중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운현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후우.”

영호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늘게 떨리는 운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영호준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

곧 날이 밝았다.

감찰어사 조관이 데리고 온 관군이 섬을 이 잡듯 수색했고, 그리 크지 않던 부두는 몰려온 배들로 가득했다.

“이서연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감찰어사 조관이 말했다.

일아영이 잡혀 있던 방에 앉아 있던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발견되지 않았다고요?”

“네. 말씀하신 비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혈흔으로 추정되는 것은 있었습니다만…….”

“그래요?”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절명비를 맞은 이서연이 어떻게 도주할 수 있었을까?

해독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까?

“다른 것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투견들의 시체를 발견했고, 천잠사를 쳐 놓은 덫은 지금 해체 중입니다. 혹시나 해서 문왕의 시신도 찾아보았습니다만 역시 없었습니다.”

이 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운현과 일아영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아영 소저는요?”

“의원이 돌보고 있습니다. 깊은 잠이 들었을 뿐, 다른 이상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대인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조관이 운현의 옆구리를 보며 말했다.

간단한 처치를 하고 붕대를 감아 두었는데, 그 상처가 심상치 않음은 조관도 알고 있었다.

“아, 이건…….”

“괜찮습니다.”

영호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대단하신 맹주님께서 벌써 알아서 다 해독하고 계시더군요. 이럴 거면 그 아까운 해독침을 왜 드렸나 자괴감이 들 정도입니다.”

정말로 아까운 듯 영호준이 혀를 찼지만 그건 과장이었다.

영호준이 준 해독침이 아니었다면 운현은 아마도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제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총군사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영호준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하긴, 목숨 걸고 구한 것이니 그 정도는 돼야 수지가 맞지요. 게다가 큰 공적도 세우셨으니까요.”

“공적이라니요?”

탁자에 앉아 있던 담소하가 불쑥 물었다.

“일아영 소저는 구했지만 상단주는…….”

“그게 아니지.”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문왕이 죽었잖나. 영웅맹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혈공자 문왕 말일세. 반영웅맹의 기치를 올린 우리 맹으로선 이보다 더 큰 공적이 어디 있겠나?”

담소하는 물론 조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연…….”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자랑스레 말했다.

“아마 앞으로 한 삼사 년은 이걸로 우려먹어도 될 정도라네.”

혈공자 문왕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컸다.

창룡맹이 기를 올리자마자 영웅맹의 배후를 처단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명분과 공적이 어디 있을까?

박 공공 역시 흡족해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운현의 목소리에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운현은 말했다.

“이것은 저와 문왕의 사적인 은원이었습니다. 맹의 공적으로 내세울 것이 못 됩니다.”

“허나…….”

영호준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굳이 감추라 하진 않겠으나 맹의 이름으로 알리지도, 확인해 주지도 마십시오.”

운현의 뜻은 단호했다.

“이서연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 대한 책임을 호암상단에 묻지 마세요. 물론 사실을 알려 줄 필요도 없습니다.”

“설마 이대로 용서하실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관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조관과 담소하, 영호준은 잠시 놀란 듯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흠, 맹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영호준이 말하는데 문득 담소하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호암상단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갸웃하며 담소하가 말했다.

“운 대인과 이서연이 함께 출발하는 걸 다들 봤잖아요. 그런데 이서연과 상단주는 행방불명이고 운 대인과 일아영 소저만 돌아오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대답은 영호준이 했다.

“하지만 혼란의 와중에 흩어졌다고 말하면 뭐라 못 할 걸세. 어쩌면 아예 물어보지 않을 수도 있고.”

“네? 아니, 사무총관이 사라졌는데도요?”

“사무총관이 사라졌으니까 그런 거지.”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난리가 났는데 잡혀간 상단주가 멀쩡하리라 생각하진 않을 걸세. 게다가 사무총관까지 사라졌으니, 호암상단 사람들이 납치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데 관심이 있겠나, 아니면 주인이 사라진 빈자리를 차지하는 데 더 관심을 두겠나?”

담소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호암상단은 순식간에 혼란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자그마치 천하삼대상단의 하나로 꼽히는 거대 상단의 주인 자리가 비어 버렸으니 말이다.

영호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흐음, 이 기회에 후계 분쟁에 끼어들어 호암상단을 맹의 후원자로 세우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덜컥.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떠나지요.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은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다치신 곳은…….”

조관이 염려했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절명비의 극독은 이미 그 기세가 꺾였다.

후유증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운현의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쉰다고 낫는 것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영호준이 일어나며 말했다.

섬의 수색과 관군들의 통제를 위해 조관이 남고, 나머지 일행은 섬을 떠났다.

낮에 본 섬은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

“……으윽.”

머리가 깨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이서연은 눈을 떴다.

화려한 방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던 이서연은 온몸을 내달리는 극심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악!”

“흠, 정신이 들었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서연은 머리조차 돌릴 수 없었다.

터벅, 터벅.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서연의 혈을 거침없이 두드렸다.

“아아악!”

또다시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아픔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늙은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꼼짝 못 하는 이서연을 내려다보며 노인은 그녀의 눈동자를 살폈다.

“죽진 않겠군.”

이서연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여, 여긴 어디…….”

입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게다가 입 주변에서 무언가 저항감이 느껴졌다.

“의국이다.”

툭 던지듯 말한 노인은 이서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환자가 깨어났다. 인태상께 알리도록.”

“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서연은 조금씩 고개를 움직여 보았다.

‘크윽!’

아픔이 느껴졌지만 조금 전보다 훨씬 나았다.

이서연은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악!”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올 정도로 아팠다.

“쯧.”

노인이 혀를 차더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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