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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38화 (338/530)

338화. 검기도 내력도 없이

이서연은 문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설마 지금 일아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요?”

“너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문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상관이 없다니요? 이미 죽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요? 설마 다른 한 사람도 살아 있는 건…….”

“흥.”

문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이곳에 도착한 사람은 그녀뿐이다. 상단주는 이미 한 줌의 핏물로 변했고 네가 말한 유언장도 찾아서 파기했다. 약속대로 말이다.”

서늘한 시선으로 문왕은 말했다.

“그러니 너는 능력껏 상단을 장악하고, 나중에 빈 관을 묻으면서 서럽게 우는 척이나 하면 돼.”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계약의 일부가 이행된 것에 대해서는 만족스럽군요. 하지만 대체 왜 일아영을 살려 두는 거죠? 설마 그 계집에게…….”

“말을 조심해라!”

문왕의 격한 목소리가 이서연에게 날아들었다.

“너 따위가 함부로 말할 상대가 아니다! 알겠나? 이 천한 계집아!”

그건 평소의 문왕답지 않은 격렬한 반응이었다.

소리를 치기보다는 차라리 목을 치라고 명했을 테니까.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모욕을 참았다.

“좋아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문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서연은 말했다.

“어차피 일아영이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이제 한 사람만 확실히 처리된다면 만족해요.”

서늘한 시선으로 이서연은 말을 이었다.

“그는 창룡검주일 뿐만 아니라 창룡맹의 맹주예요. 만의 하나 그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난다면 그 뒷감당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거예요.”

“흥!”

문왕은 조소했다.

“언제부터 창룡맹이 그리 대단한 세력이 되었지?”

“창룡맹도 문제지만 조정의 전권 대리인이라는 건 아주 심각한 일이지요. 여기서 그를 놓치면 우린 파멸이에요.”

“파멸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서연을 조롱하듯 문왕은 말했다.

“너다.”

“어쨌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이서연이 답했다.

“그는 여기서 죽어야 해요. 반드시요.”

착.

문왕은 거만하게 고개를 들며 부채로 입을 가렸다.

컹, 컹.

활짝 열린 커다란 창 너머로 투견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연은 초조한 눈빛으로 어두운 숲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캄캄한 어둠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운현은 미명을 들고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컹, 컹.

붉은 눈동자를 귀화(鬼火)처럼 번뜩이며 투견들이 달려왔다.

투견들은 그 덩치가 크고 빠른 데다 흉포하기까지 해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운현이 내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운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검기도, 내력도 사용하지 않겠다.

독고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검은 검기가 전부가 아니다.

독고랑은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냈다.

비록 그 또한 운현의 검에 다다르기 위한 수련의 하나였지만, 운현에게 독고랑의 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소림의 와불 선사 또한 말했다.

북해의 내력보다, 운현의 검이 더 대단한 것이라고.

―네놈의 수련검은 하늘 위에 노니는 용과 같다. 그러니 착각하지도 말고 헷갈리지도 마라. 네가 봐야 할 건 오로지 네 검뿐이니라.

컹, 컹.

투견들이 짖는 소리에 운현은 눈을 들었다.

도저히 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흉악한 짐승들이 짓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피하지도, 숨지도 않았다.

슥.

운현은 검을 들어 올렸다.

달빛에 칼날이 빛난다 싶더니 곧 유려한 궤적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천천히, 그러나 주저함 없이.

파란 달빛을 따라 검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백호수련검도, 백호실전검도 아니었다.

그저 흐를 뿐인 지극히 단순한 검로, 그러나 언젠가 보았던 꿈결같은 영원의 검무를 닮은 검로.

그것은 어쩌면 학사검, 혹은 창룡검이라 불러야 할 검이었다.

***

문왕은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눈앞의 이서연은 물론, 창밖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그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이서연은 초조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히도 불안한 예감이 스물스물 밀려들고 있었다.

슥.

문왕의 수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일파가 무력화되었습니다.”

문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는 말했다.

“서른 마리의 투견이 전멸했다고? 기혼단까지 먹인 놈들이?”

“그렇습니다. 즉시 제이파를…….”

슥.

문왕은 손을 뻗어 수하의 보고를 중단시켰다.

“창룡검주의 상태는?”

수하는 잠시 주저했으나 곧 답했다.

“옆구리의 상처 외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습니다. 허나 검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력 운용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뭐라고요?”

이서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이서연을 돌아보았다.

으득.

입술을 깨물며 이서연이 입을 다물었다.

“검기도 없이 서른 마리의 투견을 죽였단 말이냐? 게다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그렇습니다.”

수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투견들은 그의 일검에 목이 잘려 나갔습니다. 두 번도 없었습니다.”

절명비의 극독에 중독된 사람이, 제대로 걷지도 못해야 할 그가 투견을 일검에 가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서연의 안색이 새파래지는데 문왕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퇴각 준비를 해라.”

“네?”

수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평소라면 용서받지 못할 무례였지만 문왕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상태라면 더 이상은 헛수고일 뿐이다. 이미 일이 틀어졌으니 이곳을 버리는 게 최선이다.”

문왕의 목소리는 지극히 냉정했다.

그러나 이서연은 달랐다.

“무슨 소리예요!”

이서연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죽여야 해요! 못 들었어요? 검기를 쓰지 못한다잖아요! 지금 죽여야 한다고요!”

“왜 그래야 하지?”

“네?”

문왕의 반문에 이서연의 말문이 막혔다.

지극히 차분한 눈빛으로 문왕은 말했다.

“네 말대로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실패하면 내 목숨이 위태롭다.”

문왕의 판단은 냉정하고 정확했다.

어쩌면 운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의 하나 죽이지 못한다면 문왕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시간은 많다. 그리고 기회는 이번만이 아니지.”

그것은 평소의 문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말이었다.

“괜히 내 목숨까지 걸고 저자를 죽일 필요는 없어. 싸움은 도박이 아니니까.”

문왕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여기서 모든 게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이상, 위험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그러면 이서연은 파멸이다.

배신당한 창룡검주 운현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문왕은 수하에게 말했다.

“신호를 올려라. 인 할아범에게…….”

“기회를 주세요.”

이서연의 목소리에 문왕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퇴각할 거라면 제게 맡겨 보시지 않겠어요? 그 결과를 보고 결정해도 되잖아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서연이 말했다.

문왕은 피식 웃었다.

“고작 네 능력으로?”

“제 능력만이 아니지요.”

사락.

이서연은 가벼운 몸짓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제게 권한을 주세요. 이 섬의 무사들만 내어 주셔도 창룡검주를 죽이는 건 충분해요.”

“실패하면 네 목숨이 위험할 텐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서연은 웃었다.

“실패하면 파멸하는 건 저라고, 아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서연의 눈동자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흐음.”

문왕은 희미한 조소를 지으며 이서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을 문왕은 믿지 않았다.

진심으로 창룡검주를 죽이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혼전의 와중에 몸을 빼 도망갈 생각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상관없지.’

퇴각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데다, 이제 이서연에겐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좋아.”

문왕은 자신의 옷에 걸려 있는 옥패를 쥐었다.

휙.

옥패가 허공을 날고, 이서연은 즉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어디 한번 해 봐라. 네가 정말 쓸 만한지 내게 보여 봐.”

이 옥패는 그저 문왕의 장신구일 뿐 아무런 권한도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 옥패가 문왕의 것임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옥패는 이서연이 문왕의 뜻을 대행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락.

옥패를 소중히 품에 안은 이서연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그리하겠어요.”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매의 눈이라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옥패를 받은 이서연이 나가는 모습을, 문왕은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수하에게 명했다.

“퇴각 준비를 해라.”

문왕은 이서연의 성공 여부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인태상께 도움을 요청하시지요.”

수하의 목소리에 문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수하는 굳은 결심으로 말을 이었다.

“인태상이시라면 능히 창룡검주를 상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하지 못한다면?”

문왕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인 할아범은 이미 두 번이나 나를 실망시켰다. 세 번째가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어.”

사락.

의자에서 일어난 문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택은 불태워라. 흔적은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일아영 소저는 각별히 정중하게 모시도록 해.”

“만일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문왕은 잠시 생각했다.

일아영의 성격이라면 어디 가냐며,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훗.”

나지막이 웃음을 흘린 문왕이 말했다.

“일아영 소저에겐 내가 직접 말하겠다.”

자신의 말이라면 수긍할 것이다.

지금껏 그러했듯이.

저벅, 저벅.

수하와 함께 문왕은 대전을 나섰다.

***

일아영의 처소에서 문왕이 발견한 것은 이미 텅 비어 버린 방이었다.

시녀들은 물론 무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문왕은 길길이 분노했다.

“아영 소저는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수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라졌다.

문왕은 텅 빈 일아영의 방을 서성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갑자기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섬 곳곳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도 문왕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슥.

“찾았습니다.”

“어디야!”

“이서연이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뭐?”

문왕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곧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문왕의 옥패를 받은 후, 이서연은 곧장 이곳으로 와서 일아영을 데리고 간 것이다.

“무사들은? 시녀들은 뭘 하고 그걸 그냥 놔뒀어!”

문왕은 격렬히 분노했다.

“이서연이 전하의 옥패를 들고 모든 이들에게 즉시 퇴각을 명했습니다. 지금 모든 인원이 섬을 떠나는 중입니다.”

“뭐라고!”

문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즉시 이서연의 속셈을 깨달았다.

“이 천한 계집년이 감히!”

이서연은 일아영을 인질로 운현을 죽이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퇴각시킨 건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매의 눈을 가진 이서연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 제일 가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그녀의 판단은 지극히 정확했다.

그리고 문왕을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게 했다.

으드득.

문왕은 이를 갈았다.

“인 할아범에게 신호를 올려라.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네.”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아영 소저가 있는 곳은 파악했나?”

“네. 지금…….”

“그곳으로 가자.”

수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왕은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수하가 말했다.

“태상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리시는 편이…….”

“그러다 아영 소저가 다치면?”

문왕은 서슬퍼런 눈빛으로 말했다.

“이서연은 독한 계집이다. 창룡검주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아영 소저에게 얼마든지 비수를 박을 테지. 그걸 그대로 놔두라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문왕의 분노에 수하는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가자. 지금 당장!”

“……존명.”

수하는 고개를 숙여 문왕의 명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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