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비수(匕首)
‘……문왕.’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문왕을 쳐다보았다.
그가 바로 혈공자 문왕이다.
항주 무림맹을 불태운 사람, 하나뿐인 의제 독고랑을 죽게 하고, 늘 짓궃은 웃음을 흘리던 신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
그뿐이 아니다.
운현을 사실상 폐인으로 만들었었고 박 공공의 목숨을 노렸으며, 일아영과 호암상단의 상단주를 납치한 사람도 바로 그다.
아니, 어쩌면 의형 일충현의 죽음에도 그의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
박 공공이 무너뜨린, 문왕의 조정 세력이 바로 일충현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이었으니까.
으드득.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가슴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서늘한 분노였다.
“……아영 누이는 어디 있나? 그리고 상단주 어르신은?”
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린 듯 멋진 문왕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예를 갖춰라.”
굳은 표정으로 문왕이 말했다.
“살아 있는 아영 소저를 만나고 싶다면 말이다.”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협박은…….”
막 무어라고 운현이 말하려던 때였다.
슥.
문왕이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수하는 즉시 붉은 비단으로 덮인 둥그런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이것은 너를 위한 내 선물이다.”
휙.
문왕의 말과 함께 수하가 그것을 운현에게 던졌다.
어둠을 가르고 여유롭게 날아오는 그것은, 꼭 사람의 머리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너의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문왕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창룡검주여.”
운현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끔찍한 기억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과 불길한 예감이 순식간에 운현을 삼켜버렸다.
후우욱.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그 물체에서 운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었다.
푸욱.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살의가 옆구리에 박혀들었다.
운현은 눈을 돌려 오른쪽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비수 하나가 시커먼 칼날을 자신의 몸에 박고 있었다.
그 비수의 손잡이를 놓고 멀어지고 있는 것은, 운현의 눈에 익숙한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었다.
사락.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의 주인은 이미 문왕 옆으로 가볍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이서연이었다.
탁.
허공을 날아온 둥근 물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횃불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운현이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옆구리는 이미 열기와 통증이 번져 가고 있었다.
“서, 서연…… 누이.”
신음하듯 운현이 말했다.
하지만 이서연은 문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죠? 이야기한 것과 다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팔락.
문왕은 대답 대신 부채를 펴 입을 가렸다.
“원래는 이런 것이…….”
“크윽.”
운현의 신음이 이서연의 말을 끊었다.
이서연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비수를 뽑았다.
텅.
시커먼 칼날의 짧은 비수가 부두 위에 떨어졌다.
“흠, 그 짧은 순간에 치명적인 부위를 피했나? 네 실력도 별것 아니로군.”
운현을 지켜보며 문왕이 말했다.
“상관없어요. 절명비에 찔린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곧 한 줌의 핏물로 변하겠지요.”
“글쎄? 과연 그럴까?”
운현의 상처에서 피가 울컥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그 색이 시커먼 것은 횃불 때문이 아니었다.
“크윽.”
운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여전히 두 발로 서 있었다.
“대단하군.”
문왕은 감탄했다.
“아니면 당문의 절명비라는 것도 별것 아니었거나.”
그 표정은 사뭇 느긋했지만 이서연은 달랐다.
운현이 아직 서 있는 것을 본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죽여야 해요.”
불안한 눈빛으로 운현을 쳐다보며 이서연이 말했다.
“어서요!”
착.
문왕의 부채가 이서연의 목에 가 닿았다.
“감히 내게 명령하는 거냐?”
이서연을 바라보는 문왕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 그렇지 않아요.”
“그럼 닥쳐.”
씹듯이 말한 문왕은 다시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턱.
운현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운현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과연.”
문왕은 감탄하듯 말했다.
“너라면 버틸 줄 알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지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스륵.
부채를 들어 저택을 가리키며 문왕은 말했다.
“아영 소저는 저곳에 있다.”
옆에서 듣던 이서연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문왕은 아랑곳 없이 말을 이었다.
“저곳에서 기다리겠다. 피가 흐르고 살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설령 팔다리가 잘려 나간다 해도 와라. 그러면 그녀를 살려 주마.”
비릿한 미소가 문왕의 붉은 입술에 걸렸다.
운현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기대해도 좋다. 너의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문왕의 눈동자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휙.
문왕은 몸을 돌렸다.
이서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제 보니…….’
문왕의 계획을 비로소 이서연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패배시킨 운현이 망가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문왕이라면, 일그러진 욕망을 가진 그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차피 결과는 운현의 죽음이겠지만 말이다.
저벅, 저벅.
붉은 일산과 함께 문왕은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려던 이서연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즐거웠어요, 오라버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서연은 말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사랑했답니다. 제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소유 중에서도 운현은 가장 큰 성공 가능성을 가진 투자 대상이었으니까.
사락.
이서연은 돌아섰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붉은 일산을 따라갔다.
“큭.”
운현은 신음을 흘리며 상처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운현의 내력은 옆구리에 파고든 절독과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만일 출발 전에 영호준이 독의 확산을 막는 내력 운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이미 온몸에 독이 번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부스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운현은 품 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손가락 정도 크기의 원통형 물건은, 바로 영호준이 준 것이었다.
빠직.
힘을 쥐어 비틀자 원통의 한쪽 끝이 열렸다.
운현은 천천히 뚜껑을 위로 들어 올렸다.
훅.
강한 향이 코를 찌르고 은빛의 긴 침이 모습을 나타냈다.
침 주위에 반짝이는 것은 원통 안에 채워져 있던 약물이었다.
운현은 그 침을 상처 부위에 가져갔다.
그리고 힘을 주어 눌렀다.
슥.
침은 상처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운현은 남아 있던 약물을 상처 부위에 부었다.
“크으윽.”
치이익.
검붉은 피가 맹렬히 반응하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잠시 후, 상처에 꽂혀 있던 침의 뚜껑이 떨어져 내렸다.
은빛 침은 녹아 버린 것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지독하네.’
운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런 감상이 떠오른다는 건 그만큼 고통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니까.
그 상태로 운현은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우웅.
영호준의 짐작이 옳았다.
더구나 그는 저들이 독을 사용할 것까지 예측해 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맹주님을 상대하려면 독과 암습밖에 없겠더군요.
독기를 억제하는 내력 운용을 알려 주며 영호준은 말했다.
―맹주님께 암습이 가능할까 싶지만,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이상 방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요. 어우, 이거 팔면 서호 취선루에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텐데.
아까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영호준은 말했다.
허나 덕분에 운현은 확실히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운현은 눈을 떴다.
이제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출혈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운현은 가볍게 내력을 운용해 보았다.
‘윽.’
가슴 부위에 뜨끔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독은 이미 그 살상력을 잃었지만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큰일이군.’
내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치명적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영호준이 보았다면 강제로라도 정양을 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적지다. 그리고 운현은 일아영을 구해야 했다.
슥.
운현은 눈을 들어 섬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나무 숲 위로 불을 밝힌 저택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문왕이 지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라면 말이다.
‘……서연.’
문득 이서연이 던진 말들이 운현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일아영을 문왕에게 팔아넘긴 사람도 아마 그녀일 것이다.
이서연이 운현을 찌른 것은, 그저 비수만이 아닌 것이다.
“큭.”
가슴에 격통이 내달렸다.
감정의 격랑이 운현을 휩쓰는 순간 내기가 흔들리고 극독이 다시금 요동친 것이다.
절명비의 극독은 아직 운현 안에 남아 있다.
이서연의 배신이 여전히 운현 안에 살아 있듯이.
“후우우.”
운현은 나지막이 숨을 고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여기서 감정에 휩쓸리면 모든 것이 끝이다.
‘내가 할 일은.’
이를 악물며 운현은 자신의 목적을 다짐했다.
‘아영 누이를 구하는 거다.’
그 외에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서연의 배신과 문왕의 조소가 운현의 마음을 집어삼키려 한다 해도, 오직 일아영을 구하는 것 하나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
운현은 그렇게 뜻을 세웠다.
저벅.
나지막한 발소리가 부두에 울렸다.
운현은 숲을 향해 걸어갔다.
스릉.
은빛 칼날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운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그것, 바로 북해의 검 미명이었다.
***
문왕은 이서연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긴 의자에 앉은 문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수하에게 말했다.
“투견은?”
“모두 풀었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기혼단의 영향으로 흉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고수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당해 내기 힘들 것입니다.”
기혼단은 이지를 상실케 하고 대상의 잠력과 근력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킨다.
덩치 큰 투견들이라면 그 흉포함과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천잠사는 어찌 되었나?”
“말씀하신 대로 숲 요소요소에 배치했습니다. 닿기만 해도 살이 베일 정도입니다.”
어두운 숲에 있는 것은 흉악한 투견들 만이 아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 사람의 눈이 닿기 힘든 발목 높이나 치명적인 목 위치에는 날카로운 천잠사가 숨어 있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즉시 피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명하신 대로 목표의 상태는 수시로 보고하도록…….”
“필요 없다.”
촥.
부채로 입을 가리며 문왕이 말했다.
수하는 순간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 문왕은 운현이 피를 흘리고 투견을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고받으려 했다.
그가 어디를 다치고,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까지 알기 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보고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중요하거나 긴급한 사항만을 간결하게 보고하도록. 나머지는 필요 없어.”
문왕은 아예 운현에 대한 흥미를 잃은 듯했다.
수하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존명.”
잠시 주저하던 문왕이 물었다.
“……그녀는?”
“정원 출입을 임시로 금하고 방에만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수하는 즉시 대답했다.
지난 며칠간, 문왕은 매일 일아영에게 찾아갔다.
방문 시간도 길지 않았고 대화조차 건조하기 그지없었지만 문왕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일아영 역시 익숙해져서, 어제는 가벼운 농담마저 건넬 정도였다.
물론 문왕은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현재 시녀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며, 창과 문을 단단히 닫아 소리가 흘러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좋아.”
문왕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원하시면 수면향으로 잠들게 하거나 수혈을 짚어…….”
“안 돼.”
수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왕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녀의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라. 알겠나?”
“네.”
깊이 고개를 숙이며 수하는 명을 받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이서연의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