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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36화 (336/530)

336화. 섬[島]

일아영은 방문 앞에서 고민했다.

‘뭐라고 하지?’

문을 연 다음에 무사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책임자를 불러 달라고 하려 해도, 이미 어제 만났다.

무엇보다 다시 그 남자를 보기가 꺼려졌다.

‘으음.’

일아영이 인상을 쓰던 바로 그때였다.

드륵.

“꺅.”

갑자기 눈앞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일아영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문을 연 사람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왜 그러지?”

문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벅.

문을 연 채로 문왕은 안으로 들어왔다.

일아영이 뒤로 물러서는데, 문왕은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불편한 게 있나?”

“없……. 아니, 있어요.”

엉겁결에 없다고 하려던 일아영은 얼른 말했다.

“방 안에만 있는 건 답답해요. 정원까지라도 나가게 해 주세요. 식사도 하루 한 번으론 부족해요. 그리고 내 반지 돌려줘요.”

문왕은 피식 웃었다.

“뻔뻔하군.”

일아영이 인상을 쓰려는데 문왕이 말을 이었다.

“정원까지라면 나가도 좋다. 하지만 그 너머로 가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식사는 하루 두 번으로 하지. 그리고 이미 말했지만 반지는 없다.”

문왕은 문득 일아영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갈아입을 옷도 필요하겠군. 신발도 같이.”

일아영의 뺨이 수치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문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일 또 오겠다. 괜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

“아, 네……. 아니 잠깐.”

일아영이 발끈했다.

“내가 괴롭히는 게 아니잖아요. 애초에 당신들이…….”

“그럼 나한테 따져라. 네 표현대로 내가 책임자니까.”

문왕의 말에 일아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차라리 이렇게 뻔뻔한 게 말하긴 편하다.

“그럼 지금이라도 놔줘요. 나도, 상단주 어르신도요.”

“그건 안 돼.”

일언지하게 거절한 문왕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니, 이봐요!”

일아영이 손을 뻗으려 뒤따르려 했지만 두 자루의 검이 그녀를 막았다.

‘윽.’

그사이, 문왕은 정원을 지나 밖으로 사라졌다.

일아영은 한숨을 쉬었다.

‘뭐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아까보다 한결 가벼웠다.

문왕이 사라진 쪽을 노려보던 일아영은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못 들었어요? 정원까진 나가도 된다고 하잖아요. 이곳 책임자께서요.”

철벽같던 무사들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일아영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붙잡혀 있는 신세였지만, 어쩐지 조금은 이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문왕은 자신의 대전으로 돌아왔다.

“흥.”

조금 전 일아영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왕은 실소를 흘렸다.

그때였다.

슥.

수하가 모습을 나타냈다.

문왕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수하가 빠르게 말했다.

“인태상께서 오셨습니다.”

“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파라락, 탁.

허공에서 가볍게 내려선 사람은 바로 만옹, 인태상이었다.

키가 작고 뚱뚱한 인태상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도련님.”

문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왔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의 말투는 사뭇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인태상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도련님이 하시는 일에 어찌 이 늙은이가 빠지겠습니까? 무조건 와서 도와야지요. 헐헐헐.”

“흥!”

문왕은 고개를 돌렸다.

“창룡검주의 단전도 부수지 못하고, 내시 하나의 목숨도 거둬 오지 못하면서 뭘 도와? 게다가 이미 상인께서 내 일을 돕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텐데?”

인태상은 어색하게 웃었다.

실패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상인께서는 도련님을 놓아두라 하셨을 뿐, 돕지 말라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 놓아두라고?”

문왕은 이를 갈았다.

“아예 나를 버리시겠다는 뜻인가?”

일대상인의 그 무심함이 문왕은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래서 더욱 보여야 했다.

모든 권한을 빼앗긴 지금도 자신이 능히 창룡검주를 잡을 수 있음을 말이다.

“그, 그게 아닙니다. 도련님. 상인께서는…….”

“됐어.”

문왕은 인태상의 말을 끊었다.

“할아범은 포양호 주변이나 살펴봐. 혹시 관군이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관군이라니요?”

문왕은 와락 인상을 썼다.

“그런 게 있어! 끝나면 말해 줄테니 그냥 하라는 대로 해. 아니면 떠나든가.”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인태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막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할아범.”

문왕이 나지막이 말했다.

항주 혈사 이후 자신은 모든 힘과 권한을 잃었다.

일대상인에게 버림받다시피 한 그를 찾아와 준 사람은 오직 인태상뿐이다.

“……고마워.”

그건 아주 짧은 말이었지만 인태상을 감격케 하기엔 충분했다.

“이 늙은이만 믿으십시오. 도련님. 포양호 주변엔 관군이 얼씬도 못 하게 하겠습니다.”

포양호는 매우 넓고 크다.

한 사람이 살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인태상의 말은 결코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쉭.

인태상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의 빈자리를 잠시 쳐다보던 문왕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호암상단에서 준비한 마차는 운현의 생각보다 컸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내부는 대단히 편안해서 심지어 잠을 자도 될 정도였다.

노숙을 할 경우도 있을 테니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마부석에 내내 앉아 있었다.

이서연 혼자 마차를 몰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미안해요. 오라버니. 저 때문에…….”

“괜찮소, 서연 누이.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 잘될 테니까.”

운현은 이서연을 오히려 위로했다.

“후훗.”

이서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쩐지 안심이 되네요.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리 둘뿐이잖아요.”

조금 주저하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 아 참, 부탁이 있는데.”

“뭔데요?”

“마차 모는 것 좀 알려 주겠어? 아무래도 누이에게만 맡기기는 좀 그래서…….”

“네, 알았어요.”

웃으며 이서연은 말했다.

“금방 배우실 거예요. 오라버니는 대단한 분이니까요.”

운현은 쑥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길지 못했다.

“위험해!”

쉭. 타악.

운현이 이서연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화살이 마차 지붕에 박혔다.

애초에 사람을 노리지 않은 듯 보이는 그 화살에는 작은 쪽지가 매여 있었다.

이서연이 마차를 세우고 운현은 쪽지를 펼쳤다.

“음.”

“뭐였어요?”

이서연의 물음에 운현이 말했다.

“다음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라는군.”

“하아.”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이서연이 말했다.

“이런 식이라면 목적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겠네요. 애초에 포양호 쪽이긴 한 걸까요?”

운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객잔에서 상단에 연락을 보내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삭.

운현의 손에 쥔 쪽지가 구겨지고 있었다.

***

운현과 이서연이 탄 마차는 계속 방향을 바꿨다.

납치범들이 요구하는 행선지가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마차는 포양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따각, 따각.

이서연은 운현 옆에 앉아 자고 있었다.

운현이 도착하기 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이서연이다.

그 와중에 마차까지 몰아야 했으니 그녀의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운현은 마차 모는 법을 대강 익힌 즉시 그녀와 교대했다.

하지만 이서연은 마차 안이 아니라 운현 옆에서 자려고 했다.

괴한의 습격을 겪은 탓인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지금도 이서연은 운현의 팔을 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처음엔 어깨만 기댔지만, 한번 떨어질 뻔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팔을 내주었다.

운현은 주위를 경계하며 신중하게 마차를 몰았다.

따각, 따각.

‘응?’

나무에서 펄럭이는 붉은 색의 무언가가 운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운현은 천천히 마차를 몰아 다가갔다.

펄럭, 펄럭.

그것은 길게 드리워진 붉은 천이었다.

커다랗게 쓰인 ‘오른쪽[右]’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잠시 붉은 천을 쳐다보던 운현은 다시 마차를 몰았다.

따각.

이후 만난 첫 갈림길에서 운현은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호수, 포양호의 수평선이 관도 너머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녁 무렵,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꾼 마차는 포양호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름조차 없는 작은 어촌이었다.

궁벽한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사뭇 화려한 소형 유람선 한 척이, 어스름 속에서 운현과 이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이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두 사람은 배에 올랐다.

사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돛을 올렸다.

촤아아.

바닥이 얕은 소형 유람선은 빠르게 호수 가운데로 나갔다.

“서연 누이.”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이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포양호는 매우 커요. 이런 어촌은 모래알처럼 많지요. 게다가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네요.”

사락.

이서연은 운현의 한 팔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져서, 운현은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는 무사할까요?”

“무사하실 거야.”

운현은 고개를 돌려 이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 누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마.”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오라버니!”

하지만 운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피하도록 해. 알았지?”

“안 돼요, 오라버니. 나는…….”

“서연 누이만 아무 일 없으면.”

운현은 말했다.

“나는 괜찮을 거야.”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연은 운현의 팔을 힘주어 안았다.

촤아아아.

얼마나 갔을까?

어둠이 내리고 사방이 망망대해처럼 캄캄한데, 앞쪽에 커다란 섬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저곳일까요?”

이서연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둠 속에서도 섬은 꽤 커 보였다.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었지만 그 외에는 나무 그림자가 섬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지간한 규모의 마을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섬이었다.

그사이, 배는 부두에 도착했다.

유난히 길게 튀어 나온 부두에는 횃불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그리고 아까는 보이지 않던, 섬 꼭대기 부근에 위치한 저택의 모습도 보였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 불을 밝힌 저택의 모습은 오히려 섬뜩해 보일 정도였다.

저벅.

운현과 이서연은 부두에 내려섰다.

나무로 된 부두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이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촤아아.

“배가 떠나요!”

이서연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타고 온 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배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적막이 흐르는 부두에는 운현과 이서연만 남게 되었다.

“……가지.”

운현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부두를 따라 섬으로 걸어갔다.

“갈 때는 어떻게 하지요?’

“우선 두 사람을 구하는 게 먼저야.”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날이 밝으면 섬을 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

탁.

말하던 운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멈춰 선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 커다란 붉은 일산(日傘)이 세워져 있었다.

아니, 일산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으니까.

“훗.”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일산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수하 사이에 선, 여인처럼 고운 얼굴의 귀공자가 부채로 입을 가린채 말했다.

“어서 오게.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귀공자가 누구인지, 운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혈공자 문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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