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악몽
일아영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네?”
“네가 날마다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더군.”
촥.
부채를 펴서 입을 가리며 그가 말했다.
“그래서 왔다. 내가 바로 책임자다.”
일아영은 눈을 껌뻑껌뻑했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온 것도, 이런 연약해 보이는 귀공자가 무서운 사람들의 책임자라는 것도 의외였다.
“어……, 정말요?”
설마 진짜로 나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일아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문왕은 피식 웃었다.
“왜? 나오라고 소리 지를 때는 언제고,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겁이 나나?”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변덕이었다.
초조하고 지루한 기다림 중에, 문득 창룡검주의 질녀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창룡검주는 그를 패배시켰던 적수이니까.
“겁나긴 뭐가요!”
일아영은 울컥했다.
“왜 갑자기 나타나는 거예요? 누구 놀래킬 일 있어요?”
“과연 소리부터 지르는군.”
문왕은 조소했다.
“나는 그저 걸어왔을 뿐이다.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건 너야.”
천하를 좌우할 권세를 쥐고 있으나 신체적으로 문왕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니 잘못은 알아차리지 못한 일아영에게 있다.
“크흠. 소, 소리 지른 건 미안해요.”
시선을 피하며 일아영은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당신이 책임자예요?”
“그래.”
“여긴 어디예요?”
“내가 말해 줄 것 같나?”
문왕의 말에 일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해 줄지 안 해 줄지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어디에요?”
사락.
부채를 가볍게 저으며 문왕이 답했다.
“말해 주지 않겠다.”
“나는 왜 납치해 왔죠?”
“필요하니까.”
“오, 이건 대답해 줬네요. 고마워요.”
문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맙다고? 자신을 납치해 온 사람에게 감사라니, 제정신인가?”
“좀 하면 어때요? 사람을 납치해 놓고 충고하는 건 정상이고요?”
문왕은 말문이 막혔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별스러운 건 피차 마찬가지다.
슥.
일아영이 손을 내밀었다.
문왕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지?”
“내 반지 줘요.”
“없다.”
일아영이 인상을 썼다.
“정말요?”
문왕은 다시 조소를 흘렸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아, 진짜……. 모르니까 물어본다고 말했잖아요. 정말 없어요?”
잠시 침묵하던 문왕이 답했다.
“……그래.”
문왕의 음성은 낮고 서늘했다.
옆에 서 있던 무사들은 문왕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일아영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는 것도.
“너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때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을 문왕은 이해하지 못했다.
“뭐?”
“납치요.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잘될 리가 없잖아요.”
문왕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이런 식?”
그건 문왕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말이었다.
운현을 이길 수 없으니 이런 비겁한 짓이나 한다는 말로 들린 것이다.
아니,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초조해 하던 문왕은 평소 이상으로 격하게 반응했다.
“네가 뭘 알아!”
일아영은 깜짝 놀랐다.
문왕이 부채까지 내리고 화를 낸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딴 말을 내뱉는 거냐!”
문왕의 분노는 더욱 커져 갔다.
그의 눈에는 일아영과 창룡검주 운현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지고 있었다.
“네가 뭔데 나를, 감히이이!”
부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문왕의 분노는 무사들마저 안색이 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아영은 내리 누를수록 튀어오르는 사람이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예요?”
일아영은 지지 않겠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게 떳떳하면 소리 지르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어차피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아영은 말했다.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소리 지르는 것밖에 못 해요? 이 유치한…….”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왕이 일아영의 뺨을 친 것이다.
뺨을 맞고 고개가 돌아간 일아영은 이를 악물었다.
“너어……!”
열이 오른 일아영이 문왕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크윽.”
일아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았다.
문왕이 자기 자신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일아영의 뺨을 친 자신의 오른손을, 마치 별개의 생물이라도 되는 듯 움켜쥔 채였다.
“내, 내가, 내가…….”
문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스스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경악으로 부릅뜬 눈이 순식간에 뻘겋게 충혈되고 있었다.
“뭐, 뭐야. 맞은 건 난데 왜…….”
일아영이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뒤에서 수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시지요. 주군.”
수하는 문왕의 어깨를 잡았다.
평소라면 절대 허락되지 않을 무례였지만 문왕은 그조차 신경 쓰지 못했다.
수하가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무사들이 급히 문을 닫았다.
탁.
일아영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스러운 사람은 바로 일아영이었다.
탁탁탁.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멀어졌다.
하지만 일아영은 차마 문을 열 엄두가 안났다.
일아영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탁자 앞에 털썩 앉았다.
“아이씨, 이게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책임자라며 귀공자가 나온 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협상을 해 보려던 시도가 서로 소리치며 끝난 데다가, 결국에는 뺨까지 맞은 이 상황이 도저히 현실 같지가 않았다.
“아우, 진짜 이 지랄맞은 성격 좀 어떻게 해야지…….”
사실은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책임자라고 나설 정도면 무서운 사람이 분명한데 그렇게 마주 소리를 치다니.
어쩌면 뺨 맞는 걸로 끝난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중얼거리던 일아영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다.
사락.
살짝 열기는 느껴졌지만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그 귀공자는, 생김새에서 알아봤듯이 별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 빰을 처음 쳐 봤나?”
일아영은 중얼거렸다.
사실은 일아영도 맞은 것이 처음이라 잘 모른다.
어쨌거나 귀공자의 반응은 확실히 심각해 보였다.
일아영 자신이 매우 나쁜 짓을 한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에이, 씨. 맞은 건 난데…….”
일아영은 억울했다.
“왜 죄책감까지 주고 난리야!”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는 재앙이었다.
마을에 나타난 그 사내는 다짜고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가 팔을 내뻗으면 사람들이 피를 토했고, 그가 손을 움직이면 목이 잘려 나갔다.
남자도 여자도, 노인이나 아이도 가리지 않았다.
살아 숨쉬는 것이라면 짐승과 그 새끼까지 모조리 죽였다.
마치 마을 전부를 지워 없애려는 듯했다.
화르륵.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자 그 사내는 소년과 그 어머니를 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밤 하늘 아래, 피어오르는 불꽃이 마을을 삼키는 모습은 소년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소년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머니는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피로 얼룩진 얼굴, 여기저기 찢어지고 흙투성이가 된 옷과 더럽혀진 맨발까지.
늘 단아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이미 그자에게 일격을 맞은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토하면서도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 앞에서도, 소년은 그저 겁에 질려 떨 뿐이었다.
“똑똑히 보았느냐?”
그 두려운 사내가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소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넘실거리는 불길이 두렵고, 재앙과도 같은 저 사내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소년을 짓눌렀다.
“후후후.”
소년의 어머니가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이 천인(天人)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 아이조차 알아보지 못하면서?”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사내가 무어라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그 애처로운 눈동자는 소년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털썩.
가녀린 체구가 쓰러지며 작은 소리를 냈다.
소년의 어머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가는 것도, 우는 것도, 심지어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에 짓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살이냐?”
사내의 목소리에 소년은 흠칫 놀랐다.
“여, 열두 살…….”
소년은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이 사내에게 거역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죽게 될 테니까.
이 사내의 일격에 마침내 절명한 어머니처럼.
소년은 쓰러진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어머니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와 가겠느냐?”
문득 사내가 물었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사내의 눈동자가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가자.”
커다란 손이 다가올 때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머니의 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휘릭.
‘어머니.’
왈칵 설움이 북받쳤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소년은 알았다.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도, 그 부드러운 손길도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어머니!’
쓰러진 어머니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붉은 불길이 마을을 삼키며 타오르고 있었다.
팍.
“아악!”
문왕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한 손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문왕은 주위를 살폈다.
익숙한 자신의 침소였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악몽의 여운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오래된 혐오감이 가슴속에서 머리를 들었다.
“젠장…….”
문왕이 이를 악물고 신음처럼 내뱉었다.
그날 이후, 문왕은 누구에게도 손을 대지 않았다.
무수한 목숨을 거둬 왔지만 절대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여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미워도, 너무나 화가 나도 결코 자신이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일아영의 뺨을 쳤다.
그때의 감각이, 그리고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생생히 떠올랐다.
수많은 목숨을 빼앗고도, 한 여자를 친 것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다.
아주 오래되고도 질긴 악몽에.
“젠장!”
쾅.
문왕은 강하게 침상을 내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다.
“우욱.”
문왕이 몸을 굽혔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 헛구역질을 하던 문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무력감과 자기 혐오, 그리고 공포가 문왕을 짓눌렀다.
“윽, 으윽, 끅.”
나지막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 그때와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