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책임자
일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구출된 건가? 내가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주위는 평범하고 평온하기까지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곳이라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아! 상단주님!’
일아영은 상단주 이호암을 떠올렸다.
그때, 어르신이 납치되었다고 누군가 외쳤던 기억이 난 것이다.
탁.
일아영은 침상을 내려왔다.
신발도 여전히 신고 있는 채였지만 그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사락.
일아영은 문 앞에 다가가 기색을 살폈다.
문은 양쪽으로 밀어서 여는 식이었는데,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일아영은 문을 열었다.
드륵.
유난히 크게 들리는 문소리에 일아영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스릉.
날카로운 칼날이 일아영의 눈앞에 대뜸 나타났다.
“꺅!”
일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예리하게 날이 선 두 자루의 검이 마치 빗장처럼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의미를 일아영은 즉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여전히 붙잡혀 있는 것이다.
스륵.
그사이, 두 자루의 검은 각기 좌우로 사라졌다.
‘이익.’
놀랐던 일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한 발을 문을 향해 내디뎠다.
스릉.
아니나 다를까?
두 자루의 검이 또다시 일아영의 눈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일아영은 비명을 지르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뭐하는 거예요?”
일아영은 옆을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문 좌우에 두 명의 무사가 서 있었다.
칼은 바로 그들이 꺼내 든 것이다.
“당신들은 누구죠? 왜 날 여기 데려온 거예요?”
그러나 무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칼을 꺼내 든 무사들은 사뭇 무서운 눈빛으로 일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장정이라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지만 일아영은 달랐다.
“뭐요? 왜 노려봐요?”
그녀는 무가의 딸이다.
게다가 젊었을 적 일충현을 그대로 빼닮은 일아영은 누군가 내리 누르려 하면 오히려 더욱 반발하는 성격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누가 시킨 거죠? 이건 엄연한 범죄라고요! 이봐요!”
폭포수처럼 일아영이 쏟아 냈지만 무사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사박.
일아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휙.
검이 바람을 갈랐다.
‘앗!’
날카로운 칼날은 놀라는 일아영의 눈앞을 지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베고 지나갔다.
사락.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일아영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언제 이런 노골적인 위협을 받아 보았으랴?
일아영은 숨이 가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격렬한 반발심이 솟아올랐다.
그건 그녀의 천성이었다.
“왜 갑자기 검을 휘두르고 난리예요? 말로 하면 누가 잡아먹어요? 대체 누가 여기 책임자예요? 사람을 납치해 왔으면 얼굴이라도 내밀어야 되잖아요!”
일아영은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밀지는 않았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요! 이봐요! 내 말 들려요? 책임자를 데려오라고요!”
무사들은 대꾸조차 없었다.
“흥!”
일아영은 두 손으로 문을 잡고 거칠게 닫았다.
탁.
방문이 닫혔다.
일아영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하아, 하아.”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칼 든 사람들한테…….’
생각해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저들이 자신을 해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그래도 죽일 것 같진 않은데…….’
상황을 봐선 함부로 죽일 생각은 아닌 듯했다.
‘대체 여기 어디지? 아까 보니까 마을이나 도시는 아니고…….’
그 와중에도 일아영은 바깥의 모습을 확실히 눈에 담았다.
문밖은 넓은 복도가 있고 그 너머는 정원이었다.
야트막한 담도 보였지만 온통 나무들 뿐, 사람의 기척이나 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가만. 창문은 어떻지?’
일아영은 덧창이 열려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창밖에도 두 사람의 무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쳇.’
문을 지키고 서 있는데 창문이라고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그때 창밖, 울창한 나무들 저 너머로 푸른 수평선이 반짝였다.
‘바다는 아니고, 호수? 설마 동정호 부근인가?’
수평선이 보이지만 짠내가 나지 않는다.
동정호에 접한 악양에서 살던 일아영은 저 수평선이 호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의 호수라면 동정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수평선만으로 여기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다.
“후우.”
일아영은 탁자 앞에 털썩 앉았다.
문득 탁자 위에 있는 찻주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갈증과 허기가 밀려왔다.
‘배고파.’
일아영은 찻주전자 안을 살펴보고 차를 조금 따랐다.
쪼륵.
살짝 맛을 보았지만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먹어도 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보다 갈증이 더 컸다.
벌컥.
일아영은 차를 세 잔이나 마셨다.
그제야 갈증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탁.
찻잔을 놓으며 일아영은 중얼거렸다.
“먹을 것도 좀 주지.”
일아영은 혹시나 하고 자신의 품을 뒤졌다.
그리고 곧,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가지고 다니던 작은 화장품 주머니며 많지 않은 돈까지, 소지품이 남김없이 사라진 것이다.
“뭐야, 이거. 다 가져간 거야?”
어차피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탈탈 털어 가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차.’
일아영은 무언가 생각난 듯 화급히 품속을 뒤졌다.
하지만 없었다.
“어떡해.”
일아영은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반지도 가져갔잖아.”
돌아가신 부친 일충현이 남긴 두 개의 반지, 그중 운현이 전해 준 반지가 사라진 것이다.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일아영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
“일아영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수하의 목소리에 문왕은 눈을 들었다.
“그래?”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문왕은 무심히 포도알을 집어 들었다.
“어찌하고 있다더냐?”
“소리를 질렀다 합니다.”
문왕의 손이 멈췄다.
“소리를 질러?”
수하를 돌아보며 문왕이 물었다.
그린 듯 단아한 문왕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네. 책임자더러 나오라며 격렬히 항의를 했습니다.”
피식.
문왕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포도알을 씹으며 문왕이 말했다.
“아니면 두려움과 혼란으로 미쳤거나. 창룡검주의 질녀라더니 고작 이 정도인가?”
“소리를 쳤으나 경솔한 행동은 없었습니다. 무작정 나가려 하지도 않았고, 준비된 차를 마신 후에는 자신의 소지품을 찾는 듯했습니다.”
“흥, 적어도 멍청하진 않으니 다행이네.”
문왕은 입에 든 것을 은쟁반에 뱉었다.
“창룡검주는?”
“며칠 전 아미산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면 아직도 한참 남았군. 여기까지 오려면.”
“그렇습니다.”
“준비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톡, 톡.
문왕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쳤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언제나 고통이었다.
창룡검주를 손에 넣기 위한 기다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으득.
문왕은 이를 갈았다.
“느리군.”
창룡검주를 손에 쥐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느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느려.”
입술을 깨물며 문왕이 말했다.
그 눈빛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차 있었다.
***
일아영이 깨어난 지도 벌써 사흘.
그녀는 탁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나마 먹을 걸 주니 다행이긴 한데…….’
다행히 굶길 생각은 없었는지 하루에 한 번, 시녀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이때다 싶어서 시녀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사흘간 방 밖으로는 한 발도 나가지 못했다.
다행히 방 안에 놓인 칸막이 뒤에서 씻는 것과 다른 일들을 해결할 수는 있었다.
시녀가 바로 치워서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보아하니 어느 상단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 같은데…….’
저들이 무림인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상단 간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은 가끔 있었고, 호암상단 정도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노려지는 것도 흔했다.
‘절대 저잣거리 삼류 패거리들은 아니야.’
이들은 치밀하고 조직적이다.
상단주 이호암까지 납치한 것을 보면 그 무력 또한 결코 낮지 않다.
결코 단순한 납치 사건이 아닌 것이다.
‘뭘 노리는 걸까? 그리고 왜 날 납치해 온 거지?’
목적은 알 수 없다.
당장 가능성 있는 것만 해도 너무나 많으니까.
문제는 왜 자신을 납치했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은 사무총관 이서연을 보좌하는 사람에 불과한데 말이다.
‘혹시 착각했나?’
이서연을 납치하려던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정도의 조직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그녀의 소지품까지 가져갔으니 말이다.
‘아니면 위협용으로 쓰려고?’
이호암에게 손을 대지는 못할 테니 대신 자신을 죽여 협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접이 너무 좋다.
심지어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는 데도 말이다.
‘하루 세 번 항의하는 걸로는 안 되나? 다섯 번쯤으로 늘릴까?’
일아영은 하루 세 번, 방문을 열었다.
어김없이 두 자루의 검이 길을 막았지만 이제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일아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책임자는 대체 언제 오는 거냐고 말이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얌전히 있는 편이 좋다는 건 일아영도 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어르신을 도와야 해.’
상단주 이호암의 안전을 확인하고 도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일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박, 사박.
방문 앞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일아영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드륵.
휘릭.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앞을 막았다.
“책임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일아영은 오른쪽 무사를 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 든 사람들을 함부로 자극하지 말자고 나름 반성을 했으니 소리를 지르는 대신 최대한 단호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안 들려요? 아니면 말을 몰라요? 책임자를 불러 달라고요.”
무사의 눈빛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일아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지겹지도 않아요? 그냥 책임자를 불러 주면 되잖아요. 안 되면 안 된다고 대답이라도 하던가요.”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하듯 말했지만 역시나 무사는 묵묵부답이다.
일아영은 짜증이 났다.
“아, 진짜. 그놈의 책임자는 대체 누구…….”
“나다.”
“꺅!”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일아영은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없으리라 여겼던 대답이 튀어나오니 오히려 놀란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본 적 없는 귀공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그 모습은 흡사 여자처럼 곱고, 옷차림도 상당히 화려했다.
“누, 누구세요?”
일아영이 묻자 귀공자는 인상을 쓴 채 말했다.
“책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