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불편한 조언
떨리는 손으로 운현은 반지를 쥐었다.
‘형님.’
의형 일충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언제나 태산같이 듬직하던 그의 표정과, 옥에 갇혀서도 의연하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으득.
운현은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운현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리고 이건, 아버지와 아영이가 납치되던 날 남겨져 있던 것이고요.”
이서연은 또 다른 서찰을 꺼냈다.
영호준이 운현 대신 받아 들었다.
바스락.
서찰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직 창룡검주만이 두 사람을 구할 수 있다라…….”
영호준이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보고 저희에게 연락을 한 것이군요.”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영호준은 말했다.
“좋지 않군요. 이건 저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여기엔…….”
영호준은 오늘 아침에 왔다는 서찰을 쳐다보았다.
“친절하게도 맹주님과 이서연 소저, 단 둘만 오라고 분명히 적혀 있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문득 담소하가 말했다.
영호준이 운현에게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가겠습니다.”
운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영호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서연 소저는요?”
“저도 가겠어요.”
단호한 눈빛으로 이서연이 말했다.
“부족하지만 저도 남궁세가에서 여러 해 수련을 쌓았어요. 운 오라버니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 거예요.”
“본래 납치범의 요구에 휘둘리면 절대 안 됩니다만.”
영호준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두 분의 뜻이 그러하니 따르는 수밖에요. 바로 출발 준비를 하지요.”
“어, 하지만 포양호 어디로 가요?”
포양호는 동정호에 버금가는 거대한 호수다.
수려한 풍광과 규모는 동정호에 뒤지지 않는, 가히 내륙의 바다라 할 만한 곳이었다.
“일단 출발하면 저들이 알려 주겠지. 어쩌면 아예 포양호가 아닐 수도 있네. 미리 대비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지.”
담소하는 혀를 내둘렀다.
저들의 준비가 매우 철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몰래 따라가면 안 되나요?”
“안 돼.”
영호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서찰이 온 것을 보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야. 저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담소하는 인상을 썼다.
“그러면 이대로 당해야 하는 거예요?”
“그럴 순 없지.”
영호준은 운현과 이서연을 보았다.
“두 분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영호준은 말했다.
“지금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문왕입니다.”
“네?”
“생각해 보십시오. 무림맹을 무너뜨리고 천하오대상단을 쥐락펴락하는 그가 납치까지 벌였습니다. 이건 그가 그만큼 몰려 있다는 뜻입니다.”
운현은 염중부의 말을 통해 문왕이 궁지에 몰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영호준과 조관 일행에게도 말해 주었다.
“그러니 쉽게 주도권을 넘겨 주지 마십시오. 설령 그가 인질을 고문하거나 팔다리를 자른다 해도…….”
이서연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노년의 부친은 그런 고문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안색이 변한 것은 운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호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절대 흔들려선 안 됩니다. 이쪽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 줘야 비로소 인질에게도 가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야 구할 수 있어요. 제 말 명심하세요.”
영호준의 말은 냉정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은근슬쩍 간단한 조건을 교환하거나 밀고 당기기를 하며 심리전을 펼쳐야겠지만, 제가 함께 가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군요.”
한숨을 쉬던 영호준은 이서연에게 말했다.
“아, 그런데 마차는 누가 몰지요? 우리 맹주님은 그런 거 못 하시는데…….”
운현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데 이서연이 말했다.
“제가 할 줄 알아요.”
“그럼 괜찮겠군요. 바로 출발 준비를 해 주세요.”
“네.”
이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떠나려던 이서연은 멈칫 멈춰섰다.
사락.
운현에게 고개를 돌린 이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쏟을 듯한 이서연에게,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이건 누이 때문이 아니야.”
굳은 표정은 어쩔 수 없었지만 운현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잘못도 아니고. 서연 누이는 옳은 선택을 했어.”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연은 몸을 돌리고 곧장 정원을 나갔다.
자박, 자박.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영호준은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젠.”
한숨을 쉬고 나서 영호준이 말했다.
“맹주님께 말씀드릴 차례군요.”
“말씀하십시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할 준비를 했다.
영호준이 물었다.
“맹주님은 이서연 소저의 말을 믿습니까?”
운현은 순간 의아했다.
하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영호준은 이서연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후우.”
긴 한숨을 쉬며 영호준이 고개를 저었다.
“이게 바로 모사가 겪는 어려움이지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주군의 감정까지 파악하고 혀를 놀려야 하거든요. 사마천이 사기에서도 말했지만 모사가 죽임을 당하는 건 해결책을 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론이 너무 길어요.”
담소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영호준은 말했다.
“저는 못 믿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요.”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담소하가 이상하다는 듯 반론을 제기했다.
“어, 하지만 그분의 말 중에는 분명히 사실도 있었는데요?”
“사실이 아니라 의도가 문제일세. 보약을 달이는데 독초가 들어가면 그건 보약인가, 사약인가?”
영호준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서연 소저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증거는요?”
담소하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없네. 찾기도 쉽지 않겠지. 그녀는 결코 허술하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거야말로 전형적인 음모론이네요. 결국 아무 근거도 없다는 뜻이잖아요.”
“증거는 없지만 근거는 있지.”
“뭔데요?”
“아까 이서연 소저가 말할 때의 눈빛을 보았나?”
“눈빛요?”
담소하는 물론 다른 이들도 이서연의 눈빛을 떠올렸다.
때로는 처연하고, 혹은 단호하던 그녀의 눈동자를.
“……여자는.”
영호준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본래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네. 예쁘고 똑똑한 여자일수록 더더욱 말이야.”
“켁.”
담소하가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다니? 나는 이서연 소저가 거짓말을 했다는 데 내 전 재산도 걸 수 있네.”
“화산의 도사가 무슨 재산이 있어요?”
“비유컨대 그렇다는 뜻이지.”
영호준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담소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무 억지예요.”
“억지라니? 그러는 자네는 여자를 사귀어 본 적 있나?”
담소하가 침묵했다.
영호준은 일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맹주님은요? 어사 대인께서는요?”
아무도 말을 못했다.
조정의 감찰어사가 연애를 해 볼 여유가 있을 리 없고, 운현은 여자 손목도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연애적인 의미에서는 말이다.
“크흠.”
조관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영호준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도…….”
담소하가 무어라 하려는데 영호준이 말했다.
“수상한 점은 또 있네.”
영호준은 느긋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사실 이 사건은 하나가 아니라 별개의 두 사건이 섞인 것일세. 호암상단에게 보복을 하려고 상단주를 납치한 것과, 맹주님을 잡기 위해 일아영 소저를 납치해 간 것이지.”
“그런데요?”
담소하의 말에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두 사건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거야.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본래 일아영 소저를 납치하려 왔는데, ‘어이쿠 이거 보복하려던 호암상단주가 있네? 온 김에 함께 잡아가자’ 이랬을까? 아니면 보복하러 상단주를 잡으러 왔는데, ‘아니 이런 곳에 창룡검주의 지인인 일아영 소저가?’ 이러면서 얼씨구나 납치했을까? 어느 쪽이겠나?”
“그럴 리가 없지요.”
고개를 저으며 담소하가 말했다.
“서찰을 남긴 걸 보면, 처음부터 두 사람을 납치하려고 계획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 맞아. 철저하게 계획한 거야. 그러니까 만일 나라면, 상단주따위는 내버려 두고 일아영 소저만 잡아가겠네. 맹주님에 비하면 호암상단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필 호암상단과, 아니 이서연 소저와 엮어야만 했을까?”
“그거야 알 수 없지요. 적의 의도를 모르겠다고 무조건 이서연 소저를 의심하는 건 말이 안 돼요.”
“맞아. 그래서 증거가 아니라 수상하다고 한 것일세. 어쨌든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
“의심의 여지야 누군들 없겠어요?”
영호준은 담소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진 소저가 자네에게 짜증을 내는지 알 것 같군.”
담소하가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영호준이 운현에게 말했다.
“맹주님.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 누이를 믿지 말라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영호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를 믿지 마십시오. 그리고 혹시라도 필요하다면.”
서늘한 눈빛으로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주저하지 말고 베십시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던 운현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하다면요.”
사락.
영호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불편한 조언을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감사의 뜻으로 이걸 드리지요.”
영호준은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운현의 손에 슬쩍 쥐여 주었다.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영호준이 말했다.
“가지고 계시다가 맹주님만 쓰십시오. 제가 목숨처럼 아끼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에게 아주 좋지요.”
은근히 웃는 영호준의 표정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담소하가 고개를 옆으로 빼며 뭔지 보려 했지만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작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뭔데요? 좋은 거면 저도…….”
“자네처럼 젊은 사람에겐 쓸모 없는 거네.”
담소하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차피 운현이나 영호준도 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문득 영호준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군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오후의 해가 서쪽으로 그 몸을 천천히 누이고 있었다.
***
일아영은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순간, 몰려드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윽.”
일아영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팠지만 다행히도 금방 사라졌다.
‘왜 갑자기 머리가…….’
부스럭.
몸을 일으키며 일아영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낯선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여긴 대체…….’
순간 기억이 물 밀듯 밀려왔다.
한밤중에 울려 펴진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불타는 건물들, 그리고 정체 모를 괴한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앗!”
일아영은 몸을 웅크리며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곳은 그리 넓지 않은 수수한 방이었다.
반쯤 열린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침상 옆 탁자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는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아영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휴우. 별일은 없네. 다친 곳도 없고.’
옷은 자신이 입고 있던 그대로였다.
다친 곳도 없고 묶이거나 구속하고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