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모두 저 때문이에요
“어서 오십시오.”
나이 지긋한 호암상단의 부총관이 일행을 맞이했다.
그는 운현 일행이 왜 방문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침 사무총관님께서 나와 계십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부총관의 안내를 따라 일행은 호암상단 본가로 들어섰다.
“흠.”
영호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큰일이 있었던 것에 비하면 차분하군요.”
“그러게요.”
담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암상단의 본가는 제법 오래된 큰 저택이었다.
상인의 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명문 세도가의 저택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의아한 것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당황이나 불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무총관님 덕분입니다.”
안내하던 부총관이 말했다.
“큰일을 당한 상단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사무총관님께서 앞장서서 대처를 지시하시고 피해를 수습하셨습니다. 덕분에 상단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지요.”
사뭇 존경의 눈빛으로 부총관은 말했다.
“사무총관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호오, 그래요?”
영호준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계시는군요.”
사무총관이 말했다.
커다란 건물 앞에 이서연과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의 보고를 듣기도 하고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의 공손한 태도는 이서연을 향한 신뢰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저분이 이서연 소저십니까?”
영호준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야, 예쁘신데요? 날카로운 모습이 아주 인상적인 미녀시네요.”
그때 이서연이 운현 일행을 발견했다.
한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이서연은 차분한 태도를 되찾았다.
“어서 오세요.”
이서연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현 역시 예를 표했다.
“오랜만이오. 서연 누이. 그런데…….”
“안쪽에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운현의 말을 끊으며 이서연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일을 마무리하고 곧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하지만 사뭇 의례적인 말투였다.
“알겠소.”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연은 부총관에게 말했다.
“부총관. 안내해 드리세요.”
“네, 사무총관님.”
부총관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명을 받들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부총관이 앞서 걷고 일행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운현은 힐끗 이서연을 돌아보았다.
이서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과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행의 모습이 건물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이서연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운현 일행은 정원이 보이는 정자에 앉아 있었다.
작지만 단아하게 꾸며진 정원은 집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친한 거 맞아요?”
담소하가 찻잔을 매만지며 운현에게 물었다.
정자에는 일행을 위해 간단한 과일과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반응이 어쩐지 냉랭하던데요? 누가 보면 대인께서 억지로 친한 척하는 줄 알겠어요. 긴급한 일이라며 부른 것치고는 너무 침착한 것 같기도 하고요.”
운현은 찻잔을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니, 그래도 상당히 동요했네.”
대답은 영호준이 했다.
“사람들 앞이라 숨긴 것 같은데 확실히 흔들리긴 했어. 문제는 의도인데…….”
“의도요? 그게 무슨…….”
담소하가 막 물으려던 참이었다.
사박.
정원에서 나는 인기척에 일행이 고개를 돌렸다.
사박, 사박.
이서연이 정원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단아한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서연 누이!”
운현이 그녀를 불렀다.
이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운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 것은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이서연의 목소리는 완연히 떨리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이서연의 표정은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심상찮은 모습에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서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연 누이!”
운현은 깜짝 놀랐다.
이서연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운현은 급히 이서연에게 다가갔다.
영호준 역시 운현을 뒤따르고, 감찰어사 조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다가선 운현이 말했지만 이서연은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모두 저 때문이에요.”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이서연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누이!”
운현이 손을 뻗는데 영호준이 더 빨랐다.
영호준은 무너지는 이서연의 몸을 즉시 안아 들었다.
풀썩.
이서연은 정신을 잃었다.
영호준은 즉시 그녀의 손목 맥을 짚고 호흡을 살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운현의 물음에 영호준이 이서연의 안색을 살피며 답했다.
“기력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과로에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듯하군요.”
그 말에 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납치된 상단주는 바로 이서연의 부친이다.
일아영의 소식에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데 이서연의 심정은 어땠으랴?
“우선 의원을…….”
“잠시만요.”
탁, 탁.
영호준은 이서연의 혈 몇 곳을 가볍게 두드렸다.
“본래 연약한 사람은 아니군요. 남궁세가에서 수련했다더니…….”
효과가 있었는지 이서연은 곧 의식을 되찾았다.
“으음.”
눈을 뜬 이서연은 운현의 얼굴을 발견하고 다시 눈물을 머금었다.
“……오라버니.”
“나요, 서연 누이.”
운현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서연은 잠깐 휘청했으나 곧 몸을 바로 세웠다.
“제가…….”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무언가 말하려는 이서연에게 영호준이 권했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서연은 정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이서연과 운현 일행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진정할 동안 잠시 기다린 후, 운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서연 누이.”
이서연은 찻잔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시선을 내리며 그녀는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저 때문이에요.”
“누이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이서연은 말했다.
“제발 아버지와 아영이를 구해 주세요. 오라버니.”
“구하겠소.”
운현은 대답했다.
“누이의 아버님도, 그리고 아영 소저도 구하겠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시오.”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아영이를 납치한 사람은, 바로 혈공자 문왕이에요.”
“문왕!”
일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운현의 표정도 굳었다.
설마 했던 문왕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문왕이 왜 두 사람을 납치한 거지요?”
영호준이 즉시 물었다.
“그건…….”
잠시 주저하던 이서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처음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이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사실 문왕은 무림맹이 무너지기 전부터 상계의 숨은 유력자로 알려져 있었어요. 그의 영향력은 천하에서 손꼽히던 다섯 상단의 명운을 가를 정도였지요.”
영호준의 안색이 변했다.
이서연은 말을 이었다.
“당시 문왕은 희귀한 약재 같은 고가의 물품을 대량으로 사들였죠. 거래량은 많지 않았지만 대금 규모는 엄청났어요. 한 번의 거래에 어지간한 상단의 수 년치 거래 금액이 오갈 정도로요.”
운현의 표정도 굳었다.
광주에서 상단 장부를 공부했던 운현은 상단의 거래 금액이 생각보다 매우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주 혈사가 일어난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가 혈공자 문왕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한때 천하삼대상단으로 꼽히던 문중상단이 멸문한 것도 바로 그의 소행이었고요.”
문중상단은 하룻밤 만에 망했고 그들을 보호하던 공손세가의 본가는 흑창기마대에 의해 불타 버렸다.
이서연의 말은 사실과 정확히 맞아들었다.
“당연히 상단들은 문왕과 거래하는 것을 재고했어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지요. 장강 물류는 혈공자 문왕의 것이라는 영웅맹이 장악했으니까요. 게다가 문중상단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면 문왕과 거래를 끊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어요.”
“잠깐만요.”
영호준이 물었다.
“그럼 상단들은 이미 문왕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무림맹이 무너지기 전에요?”
“네.”
영호준은 신음을 흘렸다.
상단조차 알고 있었던 일을 무림맹만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운현의 분명한 경고조차 무시했다.
어쩌면 당시의 무림맹이야말로 눈 뜬 장님이었는지 모른다.
기득권에 취해 코앞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영웅맹의 주인이 혈공자 문왕이라는 소문은 상단에서 흘러나온 것이겠군요.”
“아마도요.”
“혹시 문왕이 요구한 약재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다양해요. 약초와 온갖 약재들, 희귀한 영약까지 아주 많은 것들이 거래 대상이었어요. 나중에 목록을 건네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영호준이 말했다.
“모두 소저 탓이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이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모두 제 탓이니까요.”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문왕과 거래를 시작한 사람도, 그리고 그와 거래를 끊기로 결정한 사람도.”
이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모두, 저예요.”
처연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운현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영호준이 물었다.
“그와 거래를 끊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당장의 손해만으로도 상단이 휘청거릴 정도지요.”
“그런데 왜 끊으셨습니까?”
사락.
이서연은 고개를 돌려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인자예요.”
그녀의 대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비록 우리가 창검을 판 것은 아니지만, 그와 거래를 계속하는 건 결국 그를 돕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는 또다시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겠지요.”
단호한 목소리로 이서연은 말했다.
“상단의 딸로서 그런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이서연의 눈동자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소저 탓이라고 하신 거로군요. 이번 습격이 혈공자 문왕의 보복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요.”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바스락.
이서연은 품에서 얇은 서찰을 꺼냈다.
“오늘 아침, 이 서찰이 제 앞으로 왔어요.”
운현에게 서찰을 건네는 이서연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바스락.
서찰을 편 운현의 표정이 즉시 굳어졌다.
슬쩍 넘겨보던 영호준 역시 인상을 찡그렸다.
“뭔데요?”
담소하가 물었다.
영호준이 운현에게 건네받은 서찰을 살피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지의 주인을 구하려거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포양호로 출발하라는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어.”
“반지요?”
담소하의 반문에 이서연이 말했다.
“이거예요.”
사락.
이서연의 손에서 두 개의 반지가 빛났다.
“옥으로 된 이 반지는 아버지의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아영 누이의 것입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격동을 애써 참는 듯 이를 악물었던 운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 의형의 유품이자, 내가 직접 아영 누이에게 건넨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