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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31화 (331/530)

331화. 호암상단의 변고

“그래서, 급한 전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귀공자의 목소리에 길상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길상인은 품에서 비단으로 싼 서찰을 꺼냈다.

고급 비단으로 싸고 수실로 묶은, 꽤나 정성이 들어간 서찰이었다.

정중한 태도로 길상인은 서찰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창룡검주님.”

서찰을 받던 귀공자가 씩 웃었다.

“아닙니다.”

“네?”

멍한 표정의 길상인에게서 서찰을 가져가며 귀공자는 말했다.

“저는 영호준입니다. 매화검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으며 맹주님을 호위하고 있지요. 아, 맹주님이 바로 창룡검주십니다.”

길상인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영호준은 서찰을 싼 비단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서찰을 보낸 분이 정확히 누구시지요?”

“어, 그게. 호암상단의 사무총관이십니다.”

“사무총관이라면…….”

영호준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운현을 쳐다보았다.

운현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서연 소저군요.”

길상인은 깜짝 놀랐다.

옆에 앉은 문사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호암상단의 사무총관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상인이 운현을 쳐다보는 사이, 영호준은 서찰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흠. 독은 없군요. 땀 냄새는 좀 납니다만.”

길상인은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땀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밤이고 낮이고 저 서찰을 품에서 꺼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니,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놀라는 건 아직 일렀다.

영호준은 정중하게 서찰을 운현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맹주님.”

‘헉!’

길상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맹주라면 바로 창룡검주다.

옆에 있던 그 수수한 문사가 창룡검주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그에게 제대로 예조차 표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차, 창룡검주님!”

덜컹.

길상인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슥.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영호준이 검을 빼어 길상인의 어깨에 얹은 것이다.

“더 이상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멋진 미소를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시면 제가 깜짝 놀라서 베어 버릴지도 모르거든요.”

말과 달리 영호준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길상인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운현은 수실을 풀고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영호준은 슬쩍 서찰을 쳐다보았다.

가볍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호준은 서찰의 내용을 파악했다.

‘호암상단주와, 일아영?’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찰을 보는 운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바스락.

운현은 서찰을 접고 길상인을 돌아보았다.

“호암상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시, 실은…….”

길상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암상단의 본가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길상인은 반쯤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게다가 상단주 어르신께서, 어르신께서 그만 괴한들에게 납치를…….”

말을 잇지 못하던 길상인은 운현에게 말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사무총관께서는 창룡검주님만이 어르신을 구해 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발요! 흑흑.”

길상인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울먹이기 시작했다.

영호준은 검을 거두며 물었다.

“호암상단의 사무총관을 아십니까? 그리고 일아영 소저는 누굽니까?”

길상인은 상단주만 말했지만 서찰에는 납치된 사람이 또 한명 적혀 있었다.

바로 일아영이었다.

“사무총관 이서연 소저는 제가 큰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아영 소저는.”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제겐 가족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셔야겠군요.”

운현은 영호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가야 합니다.”

울먹이던 길상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연신 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호준은 고개를 젓고는 운현에게 말했다.

“말려도 안 되겠지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운현은 알 수 있었다.

영호준은 이것이 함정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운현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사고도, 우연도 아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운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반드시요.”

“알겠습니다.”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맹주님의 뜻이 그러시면 어쩔 수 없지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대협께서도요?”

“그냥 총군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어쩔 수 없잖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영호준은 말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맹주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되니까요.”

영호준의 말은 운현의 책임이 막중함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시면 나중에 현실적인 걸로 보상해 주십시오. 그럼 시간이 없다 하니 어서 가 볼까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마치 유람이라도 가는 태도였지만 운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아영. 일충현 형님의 외동딸인 그녀가 납치를 당해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삭.

움켜쥔 운현의 손에서 서찰이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

운현과 영호준 외에도 감찰어사 조관과 담소하가 호암상단으로 가는 일행에 합류했다.

관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영호준의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나하고 항 오라버니만 남아야 하는 거죠?”

항장익과 함께 남게 된 진예림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두 다 가면 소는, 아니 창룡맹은 누가 돌본단 말이오? 게다가 항주 무관의 정예들이 곧 도착할 테니 그들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진예림은 납득하지 못했다.

“창룡맹에 관련된 일이 너무 많아요. 그걸 우리 둘이 다 하란 말이에요?”

“당연히 그러면 안 되오.”

영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저, 이곳은 아미요. 난해한 불경을 줄줄 외우는 똑똑한 사람들이 사방에 가득하고 고수의 경지에 이른 분들도 아주 많소. 게다가 연세 지긋한 선사들은 다년간 무림맹을 겪어 강호 무림의 생리에 대해서도 훤하시다오. 이런 고급 인재들을 활용하면 되지 않소?”

진예림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 했다.

“이참에 임시로 인사권을 넘겨줄 테니 마음껏 사용하시오. 총군사인 내 위로만 임명하지 않으면 되오. 그 위는 맹주시니까. 아시겠소?”

얼떨결에 창룡맹 총군사의 인사권을 넘겨받은 진예림은 어안이 벙벙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승려나 도사는 불쌍한 표정으로 부탁해야 잘 들어준다오. 본래 이분들이 정에 약하거든. 가끔은 돈에 약한 분도 있고. 어쨌든 적당히 치켜세워 주며 잘 부려 먹어 보시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영호준은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하오. 총군사 대행.”

진예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담소하가 큭큭 웃는 모습에 그저 한번 인상을 쓴 것이 다였다.

그렇게 호암상단으로 가는 일행이 결정되었다.

***

아미파 장문인 대행, 법영의 환송을 받으며 일행은 호암상단의 본가가 있는 호남성 장사로 향했다.

가장 빠른 길은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가는 방법이었다.

물론 영웅맹이 버티고 있었지만 일행에겐 상관없었다.

감찰어사 조관이 관선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영호준의 선견지명, 관의 힘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상이 빠르게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촤아아.

물살이 부서지는 뱃전에 서서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영웅맹이라도 관의 배를 건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조관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장강에서 감히 관선을 공격할 간 큰 무리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혜천 스님과 지심 사태께서도 관선을 타고 움직였습니다.”

창룡지회의 이름으로 영웅맹 지부를 습격하기 위해 떠난 이들 역시 관의 배를 타고 장강을 이동했다.

준비된 복면이나 시커먼 무복을 보고선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과연.”

영호준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러니 태평맹이 관의 후원을 얻으려고 한 것이군요.”

아무리 장강이 영웅맹의 세상이라 해도 기를 올린 관선을 세우지는 못한다.

관의 후원을 얻는 순간 사실상 영웅맹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태평맹이 아미를 향해 거침없이 야욕을 드러내던 것을 생각하면, 장강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이 태평맹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영호준이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맹주님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이야기요?”

반문하는 운현에게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특히 호암상단과 관련된 것들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할 일이긴 했다.

“음, 그러니까 그건 무림맹 용봉지회가 끝나고 나서의 일입니다.”

쏴아아.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운현은 예전 일들을 말해 주었다.

처음 상선에서 남궁세가 무사들과 함께 있던 이서연을 만난 것부터 시작하여 악양에 있는 의형의 집을 찾아간 일.

알고 보니 호암상단의 사람이 생전의 의형께 은혜를 입었고, 그 보은을 위해 찾아온 것까지 말이다.

“비록 그분들은 받은 은혜를 갚았을 뿐이지만 제게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서연 소저와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지요. 그 후에 저는 무림맹 서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호의였다는 뜻이군요.”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보잘것없는 낙향 문사였을 시절이니까요. 그러니 이서연 소저에 대해 의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야 당연히 그리해야죠. 허나 총군사로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빙긋 웃으며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단지 무직이라는 이유로 보잘것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맹주님께서는 자신을 너무 낮추시는군요.”

무림맹에서 운현이 어떤 서기였는지 영호준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들어올 때부터 이미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이서연 소저는 최근에 만난 분이네요.”

담소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분명 태평맹 무림용봉지회 첫날이었지요?”

당시 운현은 태평맹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관 일행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중에는 첫날 이서연과 재회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군요. 심지어 얼마 전에 태평맹에서 만났던 분이라…….”

영호준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 우선 직접 본 후에 판단하기로 하지요. 지금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일행에게 전해진 소식은 호암상단의 본가가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아 상단주와 일아영이 납치되었다는 것뿐이다.

영호준의 말처럼 판단은 상황을 더 파악한 후의 일이었다.

촤아아.

뱃전에서 물살이 부서졌다.

무거운 운현의 마음을 싣고, 배는 도도한 장강을 따라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

며칠 후, 일행이 탄 배는 거대한 동정호에 도착했다.

망망대해와 같은 동정호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장대한 동정호의 광경도, 유서 깊은 도시 악양의 정취도 운현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행은 배를 내린 후 마차를 탔다.

본래라면 일충현 형님의 본가를 찾았겠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곧장 호암상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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