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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30화 (330/530)
  • 330화. 긴급한 전갈

    조관의 말에 영호준이 반문했다.

    “문제요?”

    “말했듯이 이것은 수군도독 고유의 권한입니다. 아무리 동창이나 도찰원이라 해도 수군도독의 권한에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황명으로 토벌을 명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전면적인 토벌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래도 협조를 요청하면…….”

    “박 공공께서 동창과 도찰원을 장악한 것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은 조정에 아직 많이 있습니다.”

    조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상황에 박 공공께서 수군도독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면 지방 군권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려 한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박 공공께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동창이나 도찰원과 달리 수군은 실제적인 무력이다.

    충분히 저의를 의심받을 만하고, 이를 빌미로 박 공공을 공격하는 자도 반드시 나올 것이다.

    “그리고 현 장강 수군도독은.”

    조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박 공공께 심히 적대하는 이들 중 한 명입니다.”

    “허.”

    영호준이 탄식을 흘렸다.

    상황은 막막했다.

    수군도독의 자발적인 협력을 얻어야 하는 데다, 박 공공이나 운현이 연관된 사실도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이제 보니 조정에도 적이 있었군요.”

    적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여지가 전혀 없습니까? 하다못해 뇌물이라거나…….”

    “뇌물로 될 일이 아닐뿐더러, 통할 사람도 아닙니다.”

    영호준은 혀를 찼다.

    “이거 참.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군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우선 수군 도독을 만나겠습니다. 방법은 그의 뜻을 확인한 이후에 찾아보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맹주님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기원만 하셔선 안 됩니다.”

    운현이 미소를 지었다.

    “같이 가셔야 하거든요.”

    영호준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저기, 저는 본래 군(軍)과 친하지 않은 데다 특히 남자 냄새나는 군영은 영 취향이 아니라서요.”

    “맹주의 명입니다.”

    운현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영호준의 말문을 막기엔 충분했다.

    영호준의 일그러진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

    태평맹 총단, 당설련의 집무실.

    탁.

    당설련은 들고 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서탁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막 태평맹 대표자 회의를 끝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당연히 의제는 아미산에서 패퇴한 일에 대한 것이었지만 당설련을 향한 공세는 약했다.

    가주 회합에서 당설련에 대한 신임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결국 아미산의 일로 당설련이 책임을 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맹 내의 불만이 더 커지고 있다는 거지.’

    이번 실패로 인해 태평맹의 대외정책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

    더구나 문제는 또 있었다.

    아미산에 동행했던 그녀의 동생, 용봉지회의 우승자인 당혁이 운현의 검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자체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당혁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폐관 수련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당혁을 후기지수의 핵심으로 키우려던 당설련의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길게 보면 나쁘지 않아.’

    당설련으로선 동생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당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당혁은 더욱 고수가 되어야 했다.

    그 계기가 운현이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후우.”

    당설련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웃옷을 벗고 가벼운 차림을 한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당설련은 곰곰이 생각했다.

    요즘 그녀가 하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건 자신의 입지도, 동생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지. 이거라면…….’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당설련은 생각했다.

    ‘확실히 창룡검주를 잡을 수 있어.’

    당설련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일이 과연 가능성이 있는지, 감내해야 할 위험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지.

    온갖 요소와 가능성을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시기는, 빠를수록 좋아.’

    창룡검주 운현이 없다면 창룡맹은 유명무실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창룡맹 대신 태평맹이 조정의 후원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시행해야 했다.

    창룡맹이 더 이상 세력을 규합하기 전에, 그리고 무림맹의 적통을 이은 일대 정파맹으로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아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것이 명확한데도 당설련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당설련 자신이 이런 방식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탁.

    당설련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서탁으로 걸어가 서찰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바스락.

    그녀의 손에서 서찰이 펼쳐졌다.

    부드럽고 아담한 필체가 당설련의 눈에 들어왔다.

    “서체가 예쁘네.”

    당설련은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엄한 조부 밑에서 바르게 자란 아가씨다워. 문장도 아주 예의 바르고.”

    하지만 이 서찰은 진짜가 아니다.

    상대의 필체를 정교하게 모사(模寫)한 것이지만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서체의 본래 주인조차 구분해 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사락.

    당설련은 서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내키지 않는 일이라해도…….”

    붉은 그녀의 입술이 새하얀 치아 아래서 일그러졌다.

    “해야만 하겠지.”

    당설련이 막 마음의 결단을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군사님.”

    집무실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군사님께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당설련은 서탁 위에 있던 서찰을 치우고 웃옷을 입었다.

    “들어와.”

    사락.

    문이 열리고 시녀가 들어왔다.

    그녀가 들고 있는 차반(茶盤) 위에는 차 대신 얇은 서찰 하나가 밀봉된 채 놓여 있었다.

    당설련이 서찰을 받아 들고, 시녀는 예를 표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탁.

    시녀가 나가자 당설련은 즉시 휘장을 쳤다.

    방금 그녀가 받은 서찰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를 충분히 경계한 후, 당설련은 서탁에 앉아 조심스럽게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집무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당설련은 놀란 눈으로 서찰을 읽고 다시 읽었다.

    “……훗.”

    그녀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설련은 사뭇 밝은 표정으로 서찰을 접어 촛불 위에 가져다 댔다.

    화르륵.

    얇은 서찰은 순식간에 불붙었다.

    당설련은 손에 쥔 서찰이 타들어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잡은 부분까지 불이 다가오자 당설련은 가볍게 서찰을 허공에 띄웠다.

    화락.

    서찰은 공중에서 그대로 불타 사라져 버렸다.

    옅은 탄내가 주위를 떠돌았다.

    ‘세상에.’

    이제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서찰의 내용을 떠올리며 당설련은 미소지었다.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로 공교롭네.’

    창룡검주를 잡을 가장 확실한 방법.

    그걸 떠올릴 사람이 당설련 자신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점에 이런 내용의 서찰이라니, 이건 우연을 넘어 필연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뭐, 어쨌든 고마운 일이지. 그가 정리해 주겠다면 말이야.’

    당설련은 즉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간단한 명령서를 작성했다.

    당문이 가진 치명적인 물건 하나를 어딘가로 보내는 명령서였다.

    매우 값비싼 것이었지만 당설련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걸로 창룡검주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줄 의향이 있었다.

    따랑.

    당설련은 작은 종을 흔들었다.

    밖에서 들릴 리 없는 희미한 소리였지만 곧 어둠 속에서 수하가 모습을 나타냈다.

    사락.

    “부르셨습니까?”

    “그래.”

    당설련은 명령서를 건넸다.

    수하는 두 손으로 정중하게 그 명령서를 받았다.

    “이대로 시행해. 지금 바로.”

    “알겠습니다.”

    예를 표한 후 수하는 모습을 감췄다.

    쉭.

    수하가 사라지고 홀로 된 당설련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시야에 서탁에 놓인 아까의 서찰이 들어왔다.

    여인의 아담한 서체로 쓰인 가짜 서찰.

    당설련은 손을 뻗었다.

    “다행이네, 운현.”

    사락.

    가짜 서찰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당설련은 말했다.

    “이 서찰을 받지 않게 되어서 말이야.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마치 눈앞에 운현이 있는 것처럼 당설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 손을 잡지 그랬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말이야.”

    으득.

    당설련의 눈빛이 순간 표독스럽게 변했다.

    이를 악물며 당설련은 말했다.

    “잘 가. 그리고 돌아오지 마. 돌아오면 당신을 기다리는 건 그보다 더한 지옥일 테니까.”

    붉은 그녀의 입술이 새하얀 치아 아래 일그러졌다.

    서찰을 바라보는 당설련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아미산, 아미파 산문.

    터벅, 터벅.

    초췌한 표정의 중년인이 산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깔끔하고 단정했을 그의 비단옷은 여기저기 더럽혀지고 구겨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먼 길을 급히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아미에는 무슨 일이시오?”

    산문을 지키던 승려가 합장하며 말했다.

    허나 그들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뚜렷했다.

    태평맹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탓이었다.

    중년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저, 혹시 여기에 창룡검주께서 계십니까?”

    “시주는 누구시오?”

    날카로운 눈빛으로 승려가 물었다.

    예민한 그 반응에 중년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저, 저는 호암상단에 속한 길상인이라 합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창룡검주께서 아미파에 계신다 하여…….”

    “호암상단?”

    승려는 눈살을 찌푸렸다.

    길상인이라는 중년인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창룡검주께서 여기 계시다면 제발 말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그분께 전할 긴급한 전갈이 있단 말입니다.”

    말하던 길상인의 표정은 거의 울듯이 되어 버렸다.

    “상단주 어르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입니다. 제발, 제발요.”

    승려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승려들은 길상인을 커다란 객사로 안내했다.

    길상인을 맞이한 사람은 멋들어진 옷을 입은 젊은 귀공자였다.

    “손님이 이분이십니까?”

    귀공자의 말에 승려가 정중하게 합장했다.

    “네. 맹주님께 전할 급한 전갈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는 공자의 모습은 길상인이 보아도 멋졌다.

    안내해 준 여승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승이 합장한 후 객사를 떠나고, 귀공자는 길상인에게 말했다.

    “앉으시지요.”

    “아, 네. 감사합니다.”

    달칵.

    자리에 앉던 길상인은 맞은편 옆자리에 누군가 있는 것을 보았다.

    평범한 문사 차림의 청년은 길상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길상인도 엉겁결에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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