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장강을 끊으려고 합니다
항주에 위치한 영웅맹 총단의 맹주전.
“창룡맹이라고?”
화려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철혈사왕 염중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문사 차림의 수하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해지기로는 반영웅맹의 기치를 내세웠다 합니다.”
“흐음.”
염중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운현이 그저 관인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만일 운현이 태평맹과 손을 잡았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반영웅맹의 기치를 올린 것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무림맹의 적통이라면 당연히 내세워야 했을 명분이니까.
“어찌 처리할까요?”
수하가 물었다.
“처리? 누구를?”
“아니, 창룡맹에 대한 대처 말입니다.”
“왜?”
심드렁한 염중부의 반문에 수하는 오히려 당황했다.
창룡맹이 반 영웅맹을 내세우는데 당연히 대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창룡맹이 한 일은 태평맹을 방해하고 아미를 구해 낸 것이잖나? 자기들끼리 싸워 주겠다는데 굳이 우리가 끼어들 이유가 있나?”
“하, 하지만…….”
“쯧, 이렇게 감이 없어서야.”
염중부는 혀를 찼다.
“반영웅맹은 명분이다. 주도권 쟁탈에서 태평맹을 이기려는 명분 말이다. 정말 창룡맹이 우리와 싸우려는 것인지는 그들이 기반을 다진 후에야 결정될 일이야.”
피식 웃으며 염중부는 말했다.
“태평맹의 공세를 견뎌 내고 살아남은 후에 말이다.”
태평맹, 특히 당문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아무리 창룡맹의 이름이 강호 무림을 진동시키고 있다 한들, 과연 버티고 살아남을지는 두고 봐야 안다.
“그, 그러면 각 지부에는 일단 대응을 유보하도록…….”
“쯧.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염중부는 다시 혀를 찼다.
“영웅맹에 싸움을 건다면 상대가 누구이건 전력을 다해 짓밟아. 혹여 장강 유역에서 창룡맹에 동조하거나 그 비슷한 낌새라도 보이는 문파가 있을 시엔 아예 멸문시켜 버리라고 해.”
철혈사왕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강은 오직 영웅맹만의 것이다. 알겠나?”
“네, 넷!”
수하는 어깨를 떨며 말했다.
“물론.”
염중부는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강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우리가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태평맹처럼 말이야.”
“알겠습니다. 맹주님.”
수하는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끄덕이던 염중부가 문득 물었다.
“장강 대상단의 구성은 얼마나 진척되고 있지?”
“대략 절반 정도입니다.”
“절반이라…….”
염중부는 인상을 쓰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제일 큰 문제가 뭐지?”
“인력 부족은 점차 나아지고 있으나 아무래도 상권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기존 상단들이 자리잡고 있는 데다, 영웅맹의 이름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신지라…….”
“영웅맹의 이름을 드러내선 안 된다.”
수하의 말을 끊으며 염중부가 말했다.
“허나 은밀히 무력을 행사하는 건 허락하지.”
섬뜩한 눈빛으로 염중부는 말을 이었다.
“다만 결코 흔적을 남기지 마라. 증거든 증인이든 우리의 정체가 드러날 만한 것은 전부 없애 버려. 알겠나?”
“네, 넷!”
수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없어지는 건 증거나 증인뿐만이 아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자신도 위험할지 모른다.
원인 모르게 사라진 전임자처럼 말이다.
“무력이 필요하면 철혈대주에게 요청하도록.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일을 진척시켜라.”
철혈대는 맹주 직속의 무력 집단이다.
살벌한 철혈대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하는 몸을 살짝 떨었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고개 숙이는 수하에게 염중부는 가볍게 손을 저어 물러가도록 했다.
수하는 뒷걸음으로 맹주전을 나갔다.
탁.
홀로 남은 염중부는 화려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룡맹이라…….”
운현을 떠올리며 염중부는 피식 웃었다.
“놈도 고달픈 길을 선택했군. 태평맹도 태평맹이지만 문왕 역시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
창룡맹에 가장 반발할 사람은 자신도, 당설련도 아니다.
운현 때문에 모든 것을 박탈당한 사람, 바로 혈공자 문왕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를 갈고 있는 문왕에게 창룡맹의 소식은 그야말로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리라.
“뭐, 어떻게 되든 나로선 좋은 일이지. 큭큭큭.”
태평맹이건 창룡맹이건, 아니면 혈공자 문왕이건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이 기회에 쓰러져 준다면 염중부에겐 바라마지 않는 결과다.
맹주전에 울려 퍼지는 염중부의 웃음소리는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
아미파는 운현 일행을 위해 큰 건물을 내어 주었다.
물론 불전이나 경내의 전각은 아니었다.
참배객들을 위한, 외곽에 지어진 객사들 중 가장 큰 것을 통채로 내어 준 것이다.
그 객사 중 한 방에 운현과 조관, 영호준이 앉아 있었다.
“우리에겐 적이 많습니다.”
달칵.
영호준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장 태평맹이 이를 갈고 있을 테고, 영웅맹 또한 우리를 주시하고 있겠지요. 창룡지회로 무언가 도모하던 자들도 창룡맹이 탐탁진 않을 것이며, 새로이 나타난 북해일문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겉으로는 맹주님께 극진한 예를 표하고 있지만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의 힘은 과거 신승께서도 경계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한 창룡맹을 노골적으로 적대하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북해일문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그녀, 대궁주다.
그녀의 지략이나 정치력을 생각할 때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더구나 빙설을 시작으로 한 북해의 무력은 거대 문파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바로 일대상인입니다.”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이 지금 당장 맹주님을 잡으러 올 가능성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답했다.
“사실 태평맹에 올 때부터 각오를 했었습니다만, 아직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합니다.”
태평맹 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곧 운현의 정체와 위치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운현은 삼태상이나 혹은 일대상인이 자신을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합니다.”
감찰어사 조관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황법이 지엄한데 어찌 그들이 대인을 건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황법은 이미 두려워 않는 것 같습니다만.”
영호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지금은 조정과 충돌할 때가 아니라 여기는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운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니면 그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요.”
상인(上人)이라는 호칭은 도가에서 사용하는 도호다.
그가 스스로 상인이라 칭할 정도면 때와 시기를 중히 여기는 도가적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혈공자 문왕은 맹주님께 개인적인 원한까지 품고 있는 듯 보이니까요.”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하던 영호준이 말했다.
“……그리고 사실 적은 바깥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씀은?”
조관이 당장 눈을 찌푸린다.
영호준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쓴웃음을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소림이나 화산이 정식으로 가맹하는 건 생각보다 늦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얼마나 해내는가,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움직이겠지요.”
조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평생 관인으로 살아온 그는 문파들의 행태에 대해 생소했다.
찻잔을 매만지며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웅맹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일 겁니다. 염중부는 강호 무림을 아주 잘 압니다. 우리의 당면한 적이 태평맹이라는 것도, 우리가 장강 유역까지 진출할 여력이 없는 것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는 당분간 지켜보려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현이 말했다.
“현재 무림의 구도는 영웅맹이 장강을 장악하고 태평맹이 그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언뜻 보아서는 태평맹이 영웅맹을 보호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말입니다.”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럴듯하군요. 그러면 일대상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모릅니다.”
영호준의 물음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흐음.”
영호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강은 대륙을 나누는 길고 거대한 강이다.
일대상인의 의도를 예측하기에는 장강에 얽힌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우리에게 영웅맹을 상대할 여력이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강을 끊으려고 합니다.”
“네?”
영호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강을 끊어요? 강을 메우기라도 할 셈입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수군(水軍)을 움직일 것입니다.”
“수군!”
영호준은 더더욱 놀랐다.
수군이라면 영웅맹 따위 상대조차 되지 않는 막강한 무력이다.
“아니,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텐데요? 지금 상황에서 수군이 움직인다는 건…….”
수군을 움직인다면 차라리 황군을 움직이는 것이 더 확실하다.
그리고 그건 이미 운현이 영호준에게 말해 주었듯이 불가능하다.
정작 암중 배후인 일대상인은 숨어 버릴 것인 데다가, 천하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박 공공 역시 그것을 염려하여 운현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이 아니던가?
운현의 할 일은 일대상인의 목에 비수를 꽂는 것이지, 천하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다.
“영웅맹을 토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그저 수군 훈련을 하려는 것이지요.”
“훈련요?”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조관이 말했다.
“장강 수군 함대를 총괄하는 사람은 수군도독(水軍都督)입니다. 그리고 수군도독에게는 수군 훈련을 계획하고 실행할 권한이 있습니다.”
“아하!”
조관이 말하려는 것을 영호준은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수군 훈련이 시작되면 지나는 선박의 수색이나 통제는 물론, 퇴거 명령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군요.”
“그렇습니다. 군의 작전이니 이유를 댈 필요도 없고 감히 거부도 할 수 없습니다.”
장강 수군 함대의 훈련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랴?
비록 불편하겠지만 모든 배는 수군의 통제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장강의 목줄을 틀어쥐는 셈이다.
“하지만 오래 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영호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훈련이라면 기껏해야…….”
“얼마든지 오래 끌 수 있습니다.”
조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장강 수군 함대가 한 번 훈련을 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준비 기간까지 대략 반년이 넘습니다. 함대를 나누어서 번갈아 훈련에 투입하고, 장강의 주요 항구에서만 실시한다고 해도 족히 십 년은 가능합니다.”
장강은 길고 항구는 무수하다.
물론 모든 항구가 수군 함대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함대를 나눈다면 어지간한 도시는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 수군도독이 마음먹기에 따라 평생도 가능하지요. 황실의 신뢰만 굳건하다면 말입니다.”
역사상 지방 군권의 군사 훈련은 종종 반란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런 오해의 염려만 없다면 말 그대로 평생도 가능하다.
“맹주님은.”
영호준은 입을 떡 벌렸다.
“정말로 장강을 끊을 셈이군요.”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영호준이 감탄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이유를 조관이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