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푸른 늑대가 깃발을 올렸다
“후우.”
조호선은 짐짓 한숨을 쉬며 도관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 잘 결심했다. 내가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도관백의 어깨를 두드리며 조호선은 말했다.
“하지만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거다. 우리 화산이 왜 이토록 궁지에 몰렸겠느냐? 바로 힘이 없어서가 아니냐?”
조호선은 사뭇 비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물론 사문의 어르신들은 달갑잖게 여기실 것이다. 허나 강해질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이겠냐? 게다가 일단 강해지고 나면…….”
속삭이듯 조호선은 말했다.
“화산을 내려가게 된다 한들 무슨 걱정이겠느냔 말이다.”
도관백은 흠칫했다.
“화, 화산을 내려가다니요!”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누가 화산을 내려가라더냐?”
스륵.
조호선은 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작은 목함 하나가 들려 나왔다.
도관백은 긴장된 눈빛으로 목함을 바라보았다.
“극히 조심해야 한다.”
조호선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환약을 복용하면 엄청난 효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과욕을 부려 정해진 양을 넘기면 절대 안 된다. 자칫하면 몸을 망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도관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목함을 받아 들었다.
“명심해라. 하루에 한 알이다.”
“아, 알겠습니다. 사형.”
손바닥 만한 함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여기에 정말 놀라운 환약이 들어 있는 것일까?
정말 자신의 경지를 높여 줄 수 있을까?
그런 도관백의 속내를 읽었는지 조호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검술이 두 단계는 올라갈 것이다.”
“헉.”
도관백은 놀라 숨을 삼켰다.
두 단계라면 십 년, 아니 이십 년은 수련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걸 환약을 삼키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있다니?
“이, 이런 것을 어떻게…….”
그 정도면 보통 환약이 아니다.
소림사의 환단이라 해도 그 정도의 효능은 없을 것이다.
“본디 연단술(煉丹術)이라면 영웅맹 따위보다 우리 화산이 더 뛰어나지 않더냐?”
조호선이 웃으며 말했다.
“화산과 인연이 있는 속가(俗家)에서 비밀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니 더 이상 알려 들지 마라. 이런 걸 탐탁잖게 여기는 분들도 아직 많으니까.”
화산의 속가에는 연단술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도 있다.
영웅맹에서 사용한다는 환약을 입수했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환약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꽉 막힌 화산의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저기, 사형.”
“왜?”
조호선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도관백이 물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도관백의 눈빛에선 결의가 엿보였다.
“훗, 녀석.”
조호선은 기특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와 함께 새로운 화산의 미래를 열어 가는 것이다.”
도관백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조호선은 도관백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좋은 성취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말을 꼭 명심하도록 해라.”
조호선은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지자 도관백은 자신의 손에 들린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함을 열었다.
달칵.
특유의 약향이 넘실거리듯 흘러나왔다.
목함 안에는 새카만 작은 환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이것이…….”
도관백은 눈을 빛냈다.
강호 무림을 호령하는 자신의 미래가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
사천성 성도 외곽, 북해일문의 저택.
북해일문의 문주인 대궁주는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문주님.”
나지막한 음성에 대궁주가 말했다.
“들어와.”
사락.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가벼운 백색 무복을 입은 설영대의 한 무사가 대궁주에게 예를 표했다.
“아미산에서 온 연락입니다.”
대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촛불에 흔들리는 그녀의 얼굴은 스산하기까지 했다.
“결과는?”
“당설련은 아미에서 패퇴, 태평맹의 아미 공략은 실패입니다.”
대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실패라니? 빙설이 나서지 않았어?”
“삼궁주께서 전하시는 또 다른 급보가 있습니다.”
무사는 또박또박 말했다.
“푸른 늑대가 깃발을 올렸다.”
대궁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빙설이 있었는데도 어째서 태평맹의 아미 공략이 실패했는지를.
“태평맹이 물러나게 된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
“빙설은 계획대로 아미파 고수들을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푸른 늑대께서 비무를 중지시켰고, 그 자리에서 창룡맹의 설립을 선언하셨습니다.”
대궁주는 잠시 침묵했다.
푸른 늑대가 올린 깃발은 바로 창룡맹이었다.
“……그리고?”
“북해일문은 즉시 비무에서 물러났으며, 감찰어사 조관이 창룡검주를 옹호하며 태평맹에 대해 협박성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태평맹은 결국 아미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당설련이 물러난 건 감찰어사의 말 때문이 아니야.”
대궁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푸른 늑대를 이길 수가 없어서겠지.”
당설련이 어떤 사람인지 대궁주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감찰어사의 협박 정도에 물러설 여인이 결코 아니다.
대궁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설영대 무사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네?”
“그분과 동행한 다른 사람은 없었어?”
“화산의 매화검 영호준과 소림의 혜천이라는 자가 창룡맹에 가맹했습니다. 그리고 남궁세가가 서찰을 보내…….”
“됐어. 그만.”
그 밖의 내용은 삼궁주가 돌아온 후에 들어도 상관없다.
대궁주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었다.
무사는 예를 표하고 즉시 사라졌다.
사락.
서탁의 촛불이 가만히 흔들렸다.
대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푸른 늑대가 깃발을 올렸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하아.”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대궁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서탁 위에 놓인 촛불이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크게 일렁였다.
***
사천성 아미산.
아미파 경내의 한 전각에 앉은 운현은 경치를 내려다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군요.”
“가을이 되면 더욱 아름답다오.”
법영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눈 덮인 새벽의 정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꼭 한번 보고 싶군요.”
“맹주시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오.”
두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를 나누었다.
“크흠.”
매화검 영호준이 헛기침을 했다.
“두 분의 고매한 풍류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으니 이야기를 진행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전각에는 운현과 법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찰어사 조관과 그 일행, 매화검 영호준과 소림의 혜천도 함께 앉아 있었다.
아미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나이 많은 천수 신니와 정신을 차린 지심, 그리고 아미파 십이선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운현과 법영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천수 신니는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새삼스럽지만 아미를 구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법영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십이선사들, 실제로는 여덟 명의 승려들도 운현에게 합장을 했다.
특히나 지심의 경우에는 눈물까지 보이다 있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운현이 정중하게 답했다.
법영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하나의 맹이 되었으니, 아미가 무엇을 해야 하겠소?”
“아, 그건…….”
운현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영호준이 얼른 끼어들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괜찮지요? 맹주님.”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호칭은 좀…….”
“네, 그건 안 됩니다. 맹의 품격에 관련된 문제라서.”
운현의 말을 단호히 거절한 영호준은 법영에게 말했다.
“우선 현실 인식부터 함께 해 보지요. 아미의 상황은 화산이나 소림과 비슷하지요?”
법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두 분이 해 주신 말씀대로라면 말이오.”
항주를 탈출하며 장문인 혜월이 크게 다치고 십이선사 중 셋이 열반에 들었다. 장래가 촉망받던 젊은 승려들의 희생도 컸다.
무림맹까지 무너지자 아미파는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했다.
참배객은 허용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의 산문 출입은 금지된 상태였다.
“이런 형편만 아니었더라도 감히 태평맹이 아미에게 오늘 같은 짓을 할 수는 없었을게요.”
법영과 십이선사들의 눈빛에 노기가 떠올랐다.
“바로 그것 말입니다만.”
영호준이 말했다.
“저와 맹주님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무림맹이 무너지고 영웅맹이 장강을 차지하니, 무주공산이 된 지역을 태평맹이 무차별적으로 삼키고 있다. 다들 이렇게 생각하시지요?”
법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사실 아닌가?
“하지만 당문이 애초부터 무림맹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 혹은 방조했다면요?”
방조라면 은밀히 도와주었다는 의미다.
법영은 크게 놀랐다.
“그, 그럼…….”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형편이 되니까 당문이 아미를 넘보는 것이 아니라, 당문이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를 삼키려 한 것이고요.”
지심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증거가 있소이까?”
영호준은 지심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합니다. 당설련 군사는 절대 끌려다니지 않거든요. 그녀는 주도권을 쥐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여자니까요.”
근거치곤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라 지심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했다.
영호준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하여 맹주님께서 세우신 뜻은 이러합니다.”
듣고 있던 운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호칭을…….”
“‘태평맹이 모아 놓은 것을 헤쳐 버리고, 영웅맹이 이어 놓은 것을 끊어 버리겠다! 창룡맹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영호준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 올렸다.
사뭇 연설하듯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아미파 십이선사들은 감동하고 있었다.
“오오오.”
“참으로 그러하오.”
“과연 맹주님이시오.”
십이선사들은 감탄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태평맹의 위협으로 멸문의 위기에 처했던 이들이니 영호준의 말이 얼마나 시원했으랴?
“그러니 여러분은 우선 법영 사태님을 중심으로 아미의 혼란을 수습하시고 대외 활동도 선별적으로 다시 재개하십시오. 창룡맹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면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강호 무림에서 세력의 유무는 절대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소림과 화산에 남궁세가까지 가세한 창룡맹을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 하지만 실제로 분쟁이 발생하면 개입할 여력은 없잖아요.”
담소하가 문득 말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게 정치를 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생각일세, 소형제. 중요한 건 우리가 언제든 개입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여기는 것이지. 칼은 휘두를 때가 아니라 칼집 안에 들어 있을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거든. 억지력이라고 들어 봤나?”
“그러니까 결국 허세를 부리자는 거지요?”
“비슷하네.”
“그 허세가 먹힐 것 같은 상황만 선별해서 대외 활동을 하는 거고요?”
“말하자면 그렇지.”
“말하자면이 아니라 그냥 그런 거잖아요.”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가 아주 똑똑하군. 자네 나하고 일 하나 할까? 그렇지 않아도 창룡맹에 인재가 부족하거든.”
담소하가 움찔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