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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26화 (326/530)

326화. 퇴각

‘……운현.’

당설련은 으스러질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당설련의 분노는 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축하드려요.”

당설련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당설련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정의 관인께서 맹주가 되셨으니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겠군요.”

그건 확실한 비아냥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무라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설령 목숨을 건 생사결이라 해도 말입니다.”

그것은 창룡맹이 강호 무림에 속한다는 선언이었다.

“분명 생사결이라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기쁘군요. 과연 창룡검주께서는 강호 무림의 법도를 존중하시는 분임을 알겠어요.”

말하던 당설련이 옆을 돌아보았다.

“대내 총괄군사님.”

“넵!”

제갈기호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당설련은 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요. 제가 가주 회의에서 위임받은 권한은 아미에 대한 것일 뿐, 창룡맹은 아니었지요. 이 상황에서 비무를 계속하면 월권이 될까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갈기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가주 회의는 창룡검주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후의 일은 가주 회의에서 결정된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빙긋 웃으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그는 운현을 슬쩍 돌아보며 한 눈을 찡긋하기까지 했다.

“그렇군요. 조언에 감사드려요.”

당설련은 다시금 운현을 돌아보았다.

“창룡맹 설립을 축하하는 의미로 오늘 이 자리는 물러나도록 하지요. 하지만 힘과 세력이 전부인 강호 무림에서 맹주와 아미뿐인 맹이라는 건…….”

조소를 머금고 당설련이 말했다.

“조금 우습군요.”

그건 그저 단순한 조롱이 아니었다.

창룡검주가 아미를 구해 낸 이야기는 강호 무림을 떠들썩하게 하겠지만, 맹주와 아미파뿐인 맹이라면 어디서든지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락.

당설련은 그대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것 말씀입니다만.”

운현의 목소리가 당설련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오해를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무슨 뜻이지요?”

당설련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슬그머니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나오시지요.”

당설련도, 태평맹과 아미의 사람들도 운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바스락.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복을 입은 젊은 승려와 화려한 옷을 입은 귀공자였다.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매화검!”

준수한 귀공자는 바로 매화검 영호준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화산의 매화검과 소림의 혜천이십니다.”

혜천이 나지막이 불호를 외며 합장하고, 매화검 영호준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오랜만이오. 당 소저.”

그건 마치 항주 시내에서 아는 아가씨를 만난 것 같은 인사였다.

당설련의 표정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영호준의 인사엔 대답도 없이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림과 화산도 끌어들인 건가요?”

“아닙니다. 두 분은 그저 개인 자격으로 가맹한 것입니다만.”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화산의 매화검이다.

그가 창룡맹에 가맹했다면 화산의 뜻 역시 같다는 의미였다.

소림도 마찬가지다.

하기야 운현은 신승의 사제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아, 그리고.”

바스락.

운현은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냈다.

“남궁세가도 가맹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습니다. 물론 현 가주이신 철검 남궁벽 대협께서 직접 쓰신 서찰이지요.”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평맹은 물론 아미파 승려들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미에 이어 소림과 화산, 그리고 남궁세가까지 가세한다면 창룡맹은 가히 일대 정파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겠지.’

당설련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언뜻 영웅맹과 태평맹이 강호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듯하나 사실 남아 있는 문파들은 더 많다.

과거 무림맹 십팔대 문파라 불리던 그들은 태평맹이나 영웅맹보다 더욱 큰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맹과 영웅맹의 세상에서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창룡맹이 기를 올린 것이다.

신승의 사제이자 무림맹의 적통이며, 영웅맹에 맞설 유일한 사람이라는 창룡검주가 말이다.

이후에 벌어질 일은 너무나도 뻔했다.

당설련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외면했다.

그리고 즉시 말에 올랐다.

“출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친 후 당설련은 말에 몰아 앞서 나갔다.

태평맹 사람들은 허둥지둥 말에 올랐다.

올 때는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이들이 지금은 마치 오합지졸처럼 떠나고 있었다.

사박.

삼궁주가 운현에게 다가왔다.

“그럼 다음에 봐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삼궁주는 잠시 주저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를 부탁해요.”

운현이 흠칫하는 사이, 삼궁주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말에 오른 북해일문 일행은 태평맹을 따라 산문 앞을 떠났다.

모용미가 살짝 보내는 미소에 운현도 웃음으로 답했다.

그렇게 태평맹은 산문 앞을 떠나갔다.

“후우.”

흙먼지가 가라앉자 담소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갔네요.”

“수고했네, 담 제.”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조관과 항장익, 진예림에게 감사를 표한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여어, 운 대인. 아니, 맹주님. 수고하셨습니다.”

매화검 영호준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사천성 성도에 도착한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혜천이 운현에게 묵묵히 합장을 하고, 운현 역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호준은 운현 옆에 서서 친근한 척 말을 이었다.

“아미파 여승들의 예를 받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남자로서 아주 존경스러운 일이군요. 어이쿠, 이분은 이리도 고운데 어찌 중이 되시……. 크흠.”

여승 한 명에게 말을 걸던 영호준은 법영의 눈초리에 얼른 헛기침을 했다.

법영은 운현에게 말했다.

“어려운 때에 아미를 도우셨으니 참으로 피를 함께 묶은 맹입니다. 할 이야기가 많을 듯하니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그녀의 초청에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남자가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아미파는 여승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참배야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능하지요.”

주름진 얼굴에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법영은 말했다.

“설령 제한이 있다 하더라도 맹주께는 당연히 예외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습니까?”

운현은 그녀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조금 거북했다.

남자뿐인 서원에서 지낸 운현은 여전히 여자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호준은 흥미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후후.”

운현을 보며 노년의 법영은 웃음을 흘렸다.

주름 가득한 그녀의 미소는 참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

“후우, 후우.”

화산파 제자 도관백은 가쁜 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리라고 해 봐야 야트막한 바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방금 수련으로 헤집어 놓은 흙바닥보다는 나았다.

“하아.”

도관백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검을 휘둘러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후우.”

다시 한숨을 내쉬는 그의 눈에 멀리 화산의 풍광이 들어왔다.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한 산자락과 아득히 높은 하늘.

보기만 해도 절로 호연지기가 길러질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 이 풍경이 답답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후우.”

답답했다.

그래서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부스럭.

도관백은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데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날세.”

도관백의 경계심은 곧 누그러들었다.

“아, 사형…….”

부스럭.

숲 그늘에서 나온 사람은 그의 사형, 조호선이었다.

도관백은 검을 갈무리했다.

달칵.

검이 칼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도관백은 사형 조호선에게 예를 표했다.

“수련을 하고 있었나?”

조호선이 물었다.

흙바닥에 남은 흔적을 흘깃 쳐다보는 그의 질문에 도관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흠, 그래도 자넨 성실한 편이군. 다른 사제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다들 멍하니 있던데.”

무림맹이 무너졌다.

문파의 주요 제자들이 죽거나 크게 다쳐 돌아왔고, 폐관수련 중이라는 장문인 역시 큰 내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화산은 외부 활동을 축소하고 제자들의 산문 출입을 금했다.

장강은 영웅맹의 세상이 되었고 태평맹이 천하를 휘어잡을 것이라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강호 무림을 호령할 꿈에 부풀어 있던 화산파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게는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도관백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본래 도가 문파이던 화산이 거대 문파의 위세를 누리기 시작한 이후 변질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설령 화산을 내려가더라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도관백은 달랐다.

그에겐 오직 화산에서, 그리고 강호 무림에서 성공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조호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결심은 섰나?”

도관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호선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단 말이냐?”

“하, 하지만 그건…….”

“그래. 영웅맹이 쓰는 것과 같은 종류의 환약이다.”

화산에선 금기와 같은 말을 조호선은 서슴없이 내뱉었다.

오히려 흠칫 놀란 것은 도관백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효과만은 확실하지.”

암천무제가 남궁세가의 전 가주를 일검에 베어 버린 것도, 수적과 녹림에 불과한 영웅맹이 무림맹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저 환약 덕분이라 했다.

그러나 도관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네 사제 중에 장진원이라고 있지?”

장진원은 그 또래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도관백이 이곳에서 따로 수련을 시작한 계기도 그를 꺾기 위한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도관백은 흠칫했다.

“서, 설마…….”

“그래.”

조호선이 비웃음을 흘렸다.

“이미 꽤 되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장진원이 앞서 나간 이유가 바로 이 환약 덕분이었다니.

조호선은 나지막이 말했다.

“너 말고도 이 환약을 원하는 이들은 많다. 그들이 기꺼이 내놓으려는 것들도 아주 크지. 하지만 넌 뭘 줄 수 있지?”

아무것도 없었다.

조호선은 피식 웃었다.

“관백. 내가 네게 온 것은 순수한 호의다. 하지만 그래도 결심하지 못하겠다면.”

고개를 저으며 조호선은 말했다.

“나도 더 이상은…….”

“하겠습니다!”

도관백이 다급하게 말했다.

몸을 반쯤 돌린 채 조호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냐?”

“네.”

도관백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호선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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