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일인맹(一人盟)
조관은 관복을 펄럭이며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찬 칼은 황제로부터 수여받는다는 수춘도였다.
역시 관복을 입은 항장익과 담소하, 그리고 진예림이 그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당설련의 안색도 변했다.
‘하필.’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인인 줄을 알았지만 감찰어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감찰어사는 형법과 감찰을 관장하는 안찰사와 무관하지 않은 데다가, 도찰원 소속이니 여차하면 관군을 이끄는 도지휘사를 움직일 수도 있다.
조관의 말은 결코 허세가 아닌 것이다.
“오해가 있으신 듯하군요.”
당설련은 조관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운 대인과 저희 간에 이견이 있음을 표현했을 뿐, 결코 조정의 관리를 협박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네가 아직도 감히……!”
운현이 손을 뻗어 조관을 제지했다.
“당설련 소저의 해명을 받아들이지요.”
‘하!’
당설련은 어이가 없었다.
전형적인, 너무나 유치한 치고 어르기였다.
하지만 이 유치한 짓에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감사해요.”
당설련은 웃으며 가볍게 예를 표했다.
“허나 궁금하군요.”
가만히 웃음을 흘리며 당설련이 말했다.
“이것은 문파 간의 분쟁이에요. 운 대인께서 개입하실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은요.”
‘아직은?’
당설련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운현이 아미파를 향해 몸을 돌렸다.
태평맹은 잠시 기다리라는 듯한 태도였다.
평소라면 당설련이 독설과 비아냥을 날렸겠지만 감찰어사 조관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함부로 무례를 행할 수도 없었다.
운현은 천수 신니를 향해 예를 표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천수 신니는 합장을 하며 답했다.
“천수라 하네.”
운현을 바라보는 천수 신니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람들은 운현을 ‘창룡검주’라 부르며 놀랐다.
조정의 감찰어사는 그를 감싸고 존대하며 저 오만한 당설련조차 말을 조심한다.
천수 신니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청년은, 그의 복식이 나타내듯 그저 수수한 문사에 불과해 보일 따름이었다.
천수 신니는 운현에게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미파 장문인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혜월이라면 당분간 힘드네.”
천수 신니는 운현에게 답했다.
“허나 법영이 아미의 일을 돌보고 있으니, 법영과 논의하면 될 것이네.”
저벅.
천수 신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법영이 나섰다.
그녀는 운현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법영이라 합니다.”
“저는 운현입니다.”
예를 표하며 운현은 말했다.
“또한 창룡검주라 하는 허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상 자신의 입으로 소개하자니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법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또한 신승의 사제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천수 신니는 크게 놀랐다.
그 신승의 사제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법영은 다시금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고의 위급함을 돌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결례를 관대히 보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분위기는 사뭇 화기애애했다.
지켜보는 당설련이 짜증이 날 정도로.
“어째서 아미를 찾으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노년의 법영은 운현에게 깍듯이 존대를 했다.
신승의 사제라면 배분상으로는 그녀의 사고인 천수 신니와 같았기 때문이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실은 제가 이번에 맹(盟)을 하나 세웠습니다.”
“맹(盟)?”
“맹(盟)이라고?”
“맹(盟)을 세워요?”
반문은 법영 사태뿐만 아니라 천수 신니에게서도, 당설련에게서도, 삼궁주와 모용미에게서도 튀어나왔다.
“이름은…… 아, 그렇지요. 창룡맹(蒼龍盟)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저 혼자에 불과합니다만.”
당설련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운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후후. 혼자서, 맹을요?”
당설련이 웃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관이 눈을 부라렸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세상에 무슨 맹을 혼자 세운단 말인가요? 운 대인께서는 강호 무림의 법도에 대해 잘 모르시는…….”
“혼자서 맹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이.”
운현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대체 어디에 적혀 있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으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운현은 조금도 주저 없이 말했다.
“다만 누구라도 창룡맹의 현판을 끌어내리고자 한다면, 저를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스륵.
운현은 당설련을 향해 몸을 돌리며 뒷짐을 졌다.
서늘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공정한 비무라면 관인의 직분을 떠나 언제든 받아들이지요.”
후우욱.
그 순간, 강렬한 기세가 운현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칼날 같은 바람이 운현 주위로 휘감아 돌고 그의 발밑으로 하얀 서리가 번져 갔다.
츠즈즈즈.
‘윽.’
가깝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당설련은 그 기세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히히힝.
말들이 투레질을 하고 내력이 높지 않은 자들의 안색이 변했다.
운현이 내뿜는 기세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노인, 당벽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당벽후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훅.
운현의 기세가 순간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운현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밑에 아직도 남아 있는 새하얀 서리는 조금 전 그 일이 환상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북해일문이 지켜보는 앞에서 낙일의 내력을 쓰기가 어쩐지 미안한 데다가, 자신을 향한 빙설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법영 사태님.”
“아니, 아니오.”
운현의 말에 법영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과하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소문이 그대에겐 부족하구려.”
“부끄럽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법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아미파에 가맹(加盟)을 권하기 위해 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법영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태평맹 사람들의 표정은 혼란과 당혹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당설련의 얼굴은, 모든 것을 쥐고 흔들던 지금까지와 달리 무엇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허.’
법영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운현 한 사람으로 인해 상황이 이리도 급변하니,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창룡맹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허면 맹주는 그대겠구려?”
“그렇게 되겠지요.”
“창룡맹의 목적하는 바는 무엇이오?”
“우선은 반(反)영웅맹입니다.”
“반영웅맹?”
“그렇습니다. 현재 모든 혼란의 중심에는 영웅맹과, 그리고 그들의 배후 세력이 있습니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반영웅맹입니다.”
어쩌면 그건 창룡검주에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목적이었다.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
강호 무림에 자자한 소문이 바로 그것 아니던가?
게다가 운현은 신승의 사제다.
무너진 무림맹의 적통과도 같으니, 더없이 합당한 이유가 아닐 수 없었다.
태평맹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반영웅맹이라니…….”
“반영웅맹…….”
태평맹은 장강 유역의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와 정반대의 행보를 운현은 선택한 것이다.
“흠, 그렇다면 결국 창룡맹의 목적은 강호 무림에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라 할 수 있겠구려.”
“그렇습니다.”
“신승께서도 같은 뜻을 가지고 무림맹을 세우셨다 들었소.”
그건 운현이 신승의 사제이자 무림맹의 적통임을 은근히 강조하는 말이었다.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운현의 대답에 법영은 미소 지었다.
“맹주는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소?”
“그렇군요. 맹주의 권한이라…….”
운현은 잠시 대답을 지체했다.
아까 맹의 이름을 답할 때에 이어 두 번째였다.
“맹주는 가맹과 탈맹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가집니다. 그 외 모든 것은 맹원의 협의로 결정하기로 하지요.”
“무림맹과 비슷하구려.”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아미가 가맹함으로 어떤 이득을 얻겠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도를 닦는 승려께서 너무 이해득실을 따지시는 것 아닌지요?”
늙은 법영은 웃으며 답했다.
“마음을 비우면 머리가 맑아져서 계산이 아주 빨라진다오.”
“음, 이득이라…….”
이번엔 비교적 쉽게 대답했다.
“함께 피를 묶는다 하여 맹(盟)이라 하니, 어려울 때에 서로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아미를 대신하여 비무자로 나서는 것 말이오?”
“원하신다면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법영의 주름진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걸렸다.
자박.
노년의 법영은 몸을 돌렸다.
고색창연한 아미의 산문과, 자신을 바라보는 서른여 명의 아미파 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자 법영이 장문인 혜월을 대신하여 고하노니!”
법영 사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경을 낭송하듯 맑고 청아한 음성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아미는 창룡맹에 가맹할 것을 선언하노라!”
슥.
서른여 명의 아미파 승려들이 일제히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환호도, 박수도 없었다.
그러나 승려들의 나지막한 불호는 아미의 산문 앞에 분명히 울려 퍼졌다.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녀가 나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박.
법영은 다시 몸을 돌려 운현을 향했다.
“아미는 창룡맹의 가맹을 결정하였소. 맹주께서는 이를 허(許)하시겠소?”
“기꺼이 허락합니다.”
“감사하오.”
법영은 공손히 몸을 숙이며 합장했다.
운현도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예에 답했다.
“이로써 아미는 창룡맹의 일원이 되었으니!”
청아한 법영의 목소리가 산문을 울렸다.
“아미의 모든 제자들은 맹주께 예를 올리라!”
그녀의 말과 동시에 삼십여 아미파 승려들이 운현에게 일제히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락, 사락.
요란한 환호성 같은 건 전혀 없는 침묵의 예(禮)였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순간, 아미파가 운현을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아드득.
“어찌하려느냐?”
노인 당벽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찌해야겠어요?”
당설련이 운현을 노려보는 그대로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렵다.”
당벽후의 말에 당설련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아까 말하려 했다만, 나조차 그가 개입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자의 경지는 나보다 확실히 위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은 독선의 절기를 훼파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아래인 당벽후는 말할 것도 없다.
“예비대를 투입하면요?”
당벽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무리다. 천시도, 지리도, 인화도 모두가 불리하다.”
이곳은 적지라 할 수 있는 아미산이다.
게다가 태평맹은 여러 세가의 연합이라 명령 계통이 확실하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 운현 곁에는 감찰어사 조관이 버티고 서 있다.
때도 아니고, 장소도 적절치 않으며, 자신들의 준비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모든 것이 어긋나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