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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23화 (323/530)
  • 323화. 난입

    콰앙.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에 천수 신니는 아미의 절기인 탄금지를 날렸다.

    쌔액.

    허공을 찢으며 짓쳐 드는 그 탄금지를 향해 빙설은 허공에서 몸을 틀며 그대로 검을 그었다.

    퍽.

    탄금지의 공세가 허공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사박.

    빙설은 가볍게 내려서고 천수 신니 역시 땅에 발을 디뎠다.

    탁.

    “놀랍군.”

    천수 신니가 가볍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내 탄금지가 그렇듯 가볍게 소멸되나니. 내력을 그토록 정교하게 제어하는 모습은 처음 보네.”

    탄금지에 실린 공력을 아무런 충격도 없이 받아 냈다는 건 그만큼 내력의 운영이 절묘하다는 의미다.

    “검이 가벼울 때는 마치 깃털인 양 하고 무거울 때는 태산과도 같으니.”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며 천수 신니는 말했다.

    “가히 천하일절이라 부를 만하네.”

    그녀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빙설의 검은 그녀와 함께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다른 이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처, 천하일절?”

    산서성 변방의 문파라 여겼던 북해일문이다.

    그런데 아미파의 고승이 천하일절이라 인정하다니, 그야말로 강호 무림이 단숨에 달아오를 만한 이야기였다.

    “특히 강맹한 기세를 그토록 부드럽게 갈무리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놀랍군. 자네 같은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빙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수 신니는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밤이 새도록 자네와 비무를 나누고 싶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이 아쉬울 뿐이네. 자네나 나나 짊어진 것이 가볍지 않으니 말일세.”

    사락.

    팔을 벌린 천수 신니는 천천히 손을 맞대었다.

    그것은 빙설을 향한 천수 신니의 예였다.

    휘릭.

    빙설의 검이 가볍게 원을 그렸다.

    검을 거꾸로 쥔 빙설은 두 손을 모으고 천수 신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빙설이 천수 신니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지켜보던 삼궁주는 크게 놀랐다.

    “빙설이, 예를?”

    북해에서도 빙설의 예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특히 비무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빙설이 비무에서 상대에게 예를 표한다는 건, 상대의 무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상대의 목숨을 거두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거 처음 아냐?”

    삼궁주의 말에 빙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두번째?”

    삼궁주가 반문했지만 빙혼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호의 호반에서 벌어졌던 운현과 빙설의 비무를 이야기하기에 지금은 그리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삼궁주는 눈치가 빨랐다.

    “아, 서기 오빠구나?”

    그때 빙설과 천수 신니의 공방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아!”

    쉬익.

    천수 신니와 빙설은 단숨에 서로를 향해 짓쳐 들었다.

    마치 문양을 새기듯 천수 신니의 두 손이 허공을 가르고, 빙설의 검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며 어지러이 얽혀 들었다.

    쿵, 쿠구궁, 콰앙.

    격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쌔액. 쉬익.

    탄금지가 허공을 가르고 빙설의 검이 그 공세를 무력화시켰다.

    일생을 바쳐 이루어 낸 천수 신니의 절기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빙설의 검은 그 모든 절기들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천수 신니도, 빙설도 분명히 알았다.

    으득.

    격돌의 와중, 천수 신니는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빙설만은 무력화시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미파는 뒷일을 기약할 수가 없으니까.

    쾅.

    폭음과 함께 잠시 생긴 찰나의 틈.

    천수 신니는 모든 내력을 끌어 올렸다.

    “하아아아!”

    두 손에 모여드는 엄청난 기세에 그녀의 승복이 폭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그러나 빙설의 검에 일렁이는 푸른 기운은 이미 천수 신니의 목을 향하여 짓쳐 들고 있었다.

    쉬익.

    그 섬뜩한 기세 앞에 천수 신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자신은 저 검에 목이 꿰뚫리겠지만 자신의 쌍장은 빙설을 확실히 무력화시킬 테니 말이다.

    ‘……뒤를 부탁하네. 법영.’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불호를 외며 천수 신니는 자신의 쌍장을 내질렀다.

    “타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락.

    문득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자신의 쌍장에서도, 빙설의 검에서도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아!’

    천수 신니는 보았다.

    자신의 목을 노리고 짓쳐 들던 빙설의 검이 멈춰 서 있음을.

    빙설의 가슴을 향하던 자신의 쌍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거짓말처럼 세상이 멈춰 있었다.

    슥.

    빙설의 시선이 움직이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천수 신니도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기도 전에 천수 신니는 보았다.

    한 자루의 검이 자신과 빙설 사이로 들어오는 것을.

    스윽.

    자신의 쌍장과 빙설의 검이 만들어 낸 공간을 그 검은 서슴없이 가르고 들어왔다.

    오직 그 검 한 자루만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정지한 가운데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훅.

    그 검은 먼저 빙설의 검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닿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그 순간 빙설의 검은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톡.

    검 끝은 뒤이어 천수 신니의 쌍장 중 한쪽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천수 신니는 어째서 빙설의 검이 위로 치솟았는지 알 수 있었다.

    ‘헉.’

    그녀의 눈앞에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빙설이 검을 위로 비튼 것이 아니었다.

    천수 신니의 쌍장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빙설의 가슴이 아니라 단단한 대지였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콰아앙.

    충격과 함께 엄청난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승부가 났다는 것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찌푸리면서도 비무의 결과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으억. 퉤, 퉤.”

    “어, 어떻게 됐나! 비무는!”

    천천히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혀 의외의 광경을 보았다.

    분명 천수 신니와 빙설이 비무를 벌이던 그곳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뭐야? 왜 셋이…….”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은 당혹해하며 웅성거렸다.

    당설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모용미만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세 번째 사람.

    그는 바로 운현이었다.

    천수 신니는 비틀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이, 그 믿을 수 없는 일이 마치 환상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환상이라면 어찌하여 자신의 쌍장은 땅을 내리치고 빙설의 검은 허공을 그었으랴?

    “대, 대체 어떻게…….”

    한 자루 검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천수 신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락.

    운현은 가만히 검을 거두었다.

    햇빛 아래 빛나던 아름다운 검이 모습을 감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수 신니에게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빙설에게도 마찬가지로 예를 표했다.

    빙설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조금도 당황함 없이 빙설은 검을 거두어들였다.

    스릉.

    만일 다른 이였다면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현만은 예외다.

    그녀가 북해십이비인 이상 영원히 변하지 않을 예외가 바로 그이니까.

    “중요한 순간에 결례를 범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두 분의 승부가 원치 않는 생사결로 흐르는 것 같아 감히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혹 죄를 물으신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천수 신니는 당황했다.

    차라리 적이거나 같은 편이었다면 당혹스러움이 덜했을 것이다.

    허나 이토록 자연스럽게 예를 표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륵.

    문득 빙설이 몸을 숙였다.

    천수 신니는 놀란 눈으로 빙설을 바라보았다.

    빙설은 그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북해의 푸른 늑대를 뵙습니다.”

    비록 북해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빙설이 극진한 예를 표하고 있음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운현은 빙설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일어나시지요.”

    남쪽 말이었지만 빙설은 일어섰다.

    천수 신니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자, 자네는 누구인가?”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 전에 먼저 이 비무의 승부를 결론지어야 할 듯합니다. 신니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천수 신니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찌 생각하느냐고?

    그건 이 혼란한 와중에도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내가 졌네.”

    안타까움도, 울분도, 미련조차도 없었다.

    이 한 번의 승부로 천수 신니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보았다.

    천수 신니의 표정은 가볍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빙설을 보았다.

    “신니께서 패배를 인정하셨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빙설의 대답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시할 뿐이었다.

    “두 분 모두 인정하시니 다행이군요.”

    운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결례를 범한 것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니, 괜찮네. 그보다…….”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천수 신니가 물었다.

    “자네는 대체…….”

    사박.

    천수 신니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빙설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북해일문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멀어져 갔다.

    사박, 사박.

    빙설이 물러나고 있었다.

    천수 신니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창룡검주다!”

    누군가 소리쳤다.

    태평맹 무사들 중 누군가 운현을 알아본 것이다.

    특히 오룡삼봉으로 뽑힌, 가까이서 운현을 보았던 후기지수들의 표정은 단번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마, 맞아.”

    “차, 창룡검주가 어떻게 이곳에…….”

    천수 신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보았다.

    ‘창룡검주?’

    그녀로선 처음 듣는 명호였다.

    하지만 그 광오 한 명호와 달리, 수수한 문사의 차림을 한 운현은 부드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

    며칠 전, 사천성 성도.

    태평맹 대회가 끝나는 날 아침.

    운현은 새벽 수련을 마친 후 조관과 함께 탁자에 마주 앉았다.

    향기로운 차가 따뜻한 김을 피워 올리고, 운현은 가만히 찻잔의 온기를 음미했다.

    그러나 마주 앉은 조관은 사뭇 긴장하고 있었다.

    운현이 그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이나 운현의 성격으로 보아 중대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운현이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서찰들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스락.

    운현은 서탁에서 서찰 몇 통을 들어 조관에게 건넸다.

    “보낼 곳은 이미 적어 놓았습니다.”

    조관은 신중하게 서찰의 목적지를 살폈다.

    행선지는 사뭇 범상치 않았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운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천성과 성도 주변의 커다란 문파들에 대한 근황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태평맹과 연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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